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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꽃은 이야기를 삼켰다.

by 성준

해가 늦어질 무렵에 다행히 비가 그쳤다. 여기는 노을이 일품이라 해진이 말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비 온 터라 그 노을은 볼 수가 없었다. 안내해 준 방에 간단히 짐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고, 주변이 캄캄해졌다. 수인은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어 이런 어둠이 낯설다. 도시에서는 아무리 해가 지고 어두워도 주변에 불빛이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가로등이나 상가의 쇼윈도의 불빛, 간판의 네온사인 등 어둠을 직접 마주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방에서 나와 단층의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코너를 돌자 정말 말 그대로의 어둠이 덮쳐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손이 만져질 듯했다. 만져질 듯한 어둠을 손으로 휘저어 보았지만 손조차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잠깐을 꼼짝도 못 하고 어둠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이 되자 저기 아주 멀리에 있는 집들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암막 커튼을 치고 바라본 희미한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었다. 몇 걸음 더 걸어보고 싶었지만, 발아래 무엇이 있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에 수인은 걸어온 걸음을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코너를 다시 돌자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처음 경험한 어둠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수인은 거실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바람도 차고 기온도 추운데 이마에 땀이 송골 맺혀 있었다. 손으로 차가워진 땀을 닦아내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마치 나는 살아있다는 신호 같기도 했다. 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정신없이 시작한 여행이고, 평소와는 다르게 떠나보자고 마음먹어서 숙소 주변에서 대충 때우려 했는데. 주변에 식당이나 편의점은 고사하고, 이 어둠을 뚫고 과수원을 걸어내려갈 엄두가 나지도 않는다. 오늘은 별 수없이 굶어야겠다.


- 혹시... 저녁 먹었니? -


마당 건너 창고 같았던 건물에서 해진이 다가오며 묻는다. 수인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럼 같이 먹을래? -


이번에는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인다.

익숙한 듯 간단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밥을 안치고, 약한 불에 임연수를 얹혀 놓고는 감자와 호박을 예쁘게 썰어내어 된장국을 끓인다. 된장이 끓는 사이 예쁜 계란말이가 뚝딱 완성이 되고, 중간중간 생선이 타지 않게 뒤집어 먹기 좋게 구워낸다. 수인은 그 모습을 거실에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얹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춤은 추는 것 같기도, 무용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칼질을 하고 간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그릇에 담아내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밥을 차려내는 모습을 본 지 꽤 오랜만임을 깨달았다.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주책맞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 오래 기다렸지? 먹을까 이제? -


몸은 정직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 없는 몸은 뚝딱 밥 한 공기를 넘겼고, 염치없음을 아는지 배시시 웃으며 빈 밥공기를 해진에게 다시 내밀었다. 한 그릇을 더 달라고


- 밥 많이 했다. 많이 먹어! -


두 번째 공깃밥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짭조름한 임연수도 맛있었고, 하트 모양으로 잘라낸 계란말이는 폭신했다. 김치는 아삭아삭, 된장국은 포근한 맛이었다. 두 공깃밥을 먹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몸에 기운이 났다. 몸에 기운이 났더니 무언가 움직여야겠다.


- 그냥 둬 조금 있다가 정리하면서 할 거야. 괜찮다니까. 수인이는 손님이잖아 -


한사코 거절하는 해진을 거의 밀어내다시피 부엌에서 쫓아내고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집에서도 잘하지 않았던 설거지지만 몇 개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법 익숙해졌다. 그때는 억지로 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하고 싶다. 그랬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단 두 명의 식사 설거지라 금세 끝이 났다. 씻어낸 그릇들을 잘 마르게 정리하면서 찬찬히 주방을 둘러보니 넘치지는 않아도 모자란 것 없이 구색은 갖추어져 있었다. 널찍한 싱크볼과, 아일랜드 식탁과 나름 구색이 갖추어진 그릇들과 컵들. 마이크로웨이브 머신과, 커피 머신, 미니 오븐까지 맘만 먹으면 웬만한 요리들은 다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양념들. 수인은 싱크 주변의 물기를 훔치고 커피 머신에서 신중히 커피를 골랐다. 어떤 캡슐이 어떤 맛인지 감이 안 와서 어떤 색이 좋을지 색깔로 고르기로 했다. 오늘의 커피 선택이 나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두 잔의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들고 마당으로 나서니 해진은 파이어피트에 불을 붙이고 있다. 작은 불씨는 잘 자리가 잡혔고, 제법 굵어 보이는 장작들을 예쁘게 얹고 있었다. 파이어피트 옆에는 두 개의 캠핑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언제 준비했는지 캔맥주와 간단한 견과류가 있었다.


- 앉을래? 일단 맥주도 가지고 오긴 했는데... -

- 응. 여기 커피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예쁜 색으로 골랐어 -

- 응? 그래 담요 하나 가지고 나올게 -


해진이 담요를 가지고 나온 사이 불은 제법 타올랐다. 배도 불렀고 불꽃은 일렁이고 아까의 추위는 낭만으로 바뀌었다. 해진이 가져온 담요를 두르니 제법 이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아니 장소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좀 더 자신이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그때 너 서울에서 너 만나고 왔을 때. 사실 그때 서울 집 정리하려고 올라갔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여기는 아버지가 하시던 과수원이야. 어떻게 할까... 팔까 말까 고민하다가.. 잠시 여기서 시간을 좀 보내기로 했어. 나도 올해 취업 실패하고 시간이 좀 생겼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취업도 그렇고, 이제 이곳도 그렇고 좀 차분히 생각해 보자 하고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어. 그러다가 재미 삼아서 에어비엔비 등록도 했는데 수인이가 여길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사실 수인이가 여기 3번째 손님이야. 첫 손님은 여기 오자마자 미안하다고, 이렇게 주변에 뭐가 없을 줄 몰랐다고 환불해 달라고 해서 그냥 보냈고, 두 번째 손님은 3일을 묶었는데 이틀 동안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어. 나중에는 덜컥 겁이 나더라고,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다행히 3일째 퉁퉁 부은 얼굴로 나와서는 서비스로 차려준 아침밥을 허겁지겁 먹고는 사라졌지. 자리를 못 잡아서 그런지 참 특이한 사람들이 오기에 이번엔 어떤 사람이 올까 걱정반 근심반이었는데 수인이가 여길 왔네? 참 여기가 안 좋은 기운이 있는가 봐 ~ -


해진은 그간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힘들었을 시기에 힘든 이야기인데 차분한 목소리의 해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다.' 란 생각이 들었다.


- 오빠 나는....-


수인은 맥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동안 쉽게 하지 못했던 자신의 지난날과 생각들을 털어내었다. 주변의 어둠 때문인지, 일렁이는 불꽃 때문인지, 우리 이외는 아무도 들을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수인은 이곳에서 정말 많은 말들을 했다. 서로 눈빛을 나누지도 않았고, 일렁이는 불꽃에 눈을 고정한 채 수인을 이야기를 하고, 해진은 맥주를 마셨다. 수인 몫으로 가져온 맥주도 해진이 다 마실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잠시 감정이 격해져 울음이 터져 버린 수인을 울게 두고 해진을 몇 개의 맥주를 더 가지고 나왔다.


불꽃은 일렁거리고, 그들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쉽게 어디에서도 하지 못했던 서로의 밑바닥까지 토해내듯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제대로 된 불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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