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 저녁 먹었어? 아 그래 오늘 좀 늦는구나. 그래 알았어요 운전 조심하고 혹시나 술 마시면 꼭 대리 부르고. 고생해 -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이제 막내 아이가 5살이 되고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부쩍 커버린 아이를 보니 뿌듯하다. 거울에 비친 꽤 도드라지는 새치와 주름 그리고 뱃살을 보니 지난 10년간의 세월을 제대로 맞은 듯하다. 지난 10년은 나가서 일을 한 시간보다 집에서 육아를 했던 시간들이 더 길었다. 와이프는 당차게도 결혼 전부터 혼자 사업을 해오던 커리어 여성이었다. 그것도 여성이 거의 없는 인테리어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해왔다. 횟수로만 따지면 벌써 25년 정도 된다. 직원들이 많지 않아 와이프가 손수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그만큼 소득도 좋다. 그만큼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그 부족한 시간 속에서 네 살 터울 아이들이 셋이다. 막내는 유치원을 입학했고, 큰 애는 이제 중학생이 된다.
남자가 집안일을 한다는 것이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선호하는 것이 아님은 여전하다. 어딘가 건강상에 문제가 있거나, 성격상에 심각한 하자가 있거나, 혹은 직업을 구하기 힘든 경우라 생각하는 경우가 아직까지도 여전하다. 그러다 보니 나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을 잘 나서질 않는다.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은 인터넷을 통해 주문 가능하고, 원래 성격이었는지, 적응한 성격인지 집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10년의 세월은 강산을 변화시키듯 사람의 성격도 변화시킨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해 어디다 던져놔도 친구를 만들던 성격에서 이제는 동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말을 걸어올까 봐 못 본 척 동선을 바꾸는 간사함을 지닌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다. 남자가 전업주부라는 것에 나도 모르게 자격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 보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와이프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의견보다 와이프의 의견을 따르곤 했다. 어차피 가정의 가장 큰 기둥은 와이프라는 생각에 나 스스로의 의견쯤은 와이프에게 양보해도 좋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 많이 늦었네. 어서 주무셔 -
피곤해 보인다. 머리가 아프다며, 이제 힘이 부친다며 투덜대며 방으로 들어가는 와이프의 눈치를 본다. 일이 잘 풀려야 하는데.. 로또라도 맞아야 큰소리치고 살 수 있으려나.. 때로 부부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당신이 나가서 돈 벌어오라는 소리가 제일 무섭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서도 와이프가 벌어오는 만큼 벌어올 방법이 없다. 와이프의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최근 잠을 잘 못 잔다. 별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침대에서 뒤척인다. 멍하게 있다가 핸드폰도 보다가 뒤척이다 시계를 확인하면 새벽 두세 시가 된다. 겨우 아침에 일어나 밥을 차린다. 새벽형 인간인 와이프는 벌써 일을 시작했다. 새벽 4시 언저리에 일어나는 와이프에게 항상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드는 생각이다. 아 오늘도 잔소리 듣겠네...
몇 년을 미루고 미뤘던 정신의학과를 방문했다. 정작 상담을 받자고 했던 때는 오질 못했는데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상담을 시작했다. 조곤조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때로는 컴퓨터에 타이핑을 하시던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셨다. 별다른 조언을 해주시지는 않았지만, 다음 상담까지 스스로 돌아볼 간단한 주제 정도를 정해 주셨다. 약은 효과가 좋았다. 하루에도 뒤엉키던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한결 평온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혹은 '뭐 그럴 수도 있지...' 같은 느낌이랄까. 차분해졌다고 해야 할지 무감각해졌다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집안은 평온해졌다. 스스로의 자격지심에 조금은 무뎌졌고, 와이프의 말과 행동에 서있던 날카로운 신경들은 가뭄의 꽃밭처럼 풀이 죽어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머리는 멍한데 감정은 차분해졌다. 그동안 미루었던 여행을 가야 할 것 같다.
- 여보 나 이번 주에 고향엘 다녀와도 될까? 가능하면 2박 정도였으면 싶은데 괜찮을까? -
- 애들은 어쩌구? 같이 가는 거야? 아님 혼자서? -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 혼자 가려 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냐 그럼 다음에 가지 뭐 신경 쓰지 마 -
-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더 신경 쓰이는 거 몰라? 왜 무슨 일 있어? -
- 아니야 특별한 일 있는 건 아냐. 나중에 시간 되면 가지 뭐 -
힘들 거라 생각했다. 아이 셋을 오롯이 보려면 힘들다. 집에서 애들만 돌보는 것도 힘이 드는데 일까지 한다면 손이 모자란다. 당연히 그럴 거다.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다. 와이프라면 내가 없어도 아이 셋 돌보는 것도 가능할 거라 믿었다. 와이프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고, 나 스스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일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일쯤은 와이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 고향에 간다고 했지? 오늘부터 3일 동안 스케줄 조정했어. 다녀와. 바람 좀 쐬고 와 사람이 너무 쳐져 있지만 말고. 당신 우리 집 가장이야. 도착하면 전화하고 -
미팅이 있다고 새벽같이 나간 와이프가 내 여행을 허락했다. 나는 거실이며 화장실 앞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세탁기에 돌리고, 아이들 방을 정리했다. 아침 먹은 식탁을 정리하고
거실에 한바탕 벌여놓은 장난감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릇과 접시를 식기세척기에 넣어 가장 긴 코스로 돌려놓고, 큰 냄비들을 설거지했다. 설거지까지 끝나니 드럼 세탁기에 빨래가 되었다. 소재별로 널어야 할 옷들은 따로 빼어 베란다에 널고, 나머지는 건조기에 넣어 돌렸다.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한바탕 비우고 나니 오전 시간이 지나간다. 깨끗해진 싱크대를 다시 어지럽히기 싫어 점심은 건너고 간단한 옷가지를 쌌다. 그래봐야 옷가지 두어 벌이 전부다. 짐이 많아도 부담스럽다.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식탁도 한 번 쓸어보고, 아이들 방의 침대 베개도 한번 토닥여 폭신하게 만들고, 침구도 깔끔하게 당겨 펴 두었다. 어느 정도 되었다. 완벽한 집이다.
마지막으로 조명이 켜진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단출한 가방을 손에 들고 몇 걸음 나가니 천천히 닫힌 현관문이 잠긴다
'철커덕'
유난히 크고 또렷하게 복도에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잘 잠겼겠지....
잘 잠겼겠지....
자. 이제 어디로 갈까? 숙소를 잡자.
그새 꺼진 복도 센서등은 핸드폰을 밝게 빛나게 했고, 예약 어플의 홈 화면이 반짝인다.
고향 지명을 넣고 검색하니 New 표시와 함께 과수원 위 단층 숙소 사진이 보인다.
[민. 박. 집]
이름도 그냥 민박집이란다. 글자 사이사이에 마침표를 찍어둔 것이 의미가 있어서일까? 문장의 줄임말일까 궁금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래.. 여기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