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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백을 가져온 남자 7

by 성준

해진은 아침의 일이 스스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제 늦은 밤 아내가 찾아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남자를 걱정해서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왔고, 남자도 나쁜 생각을 먹었던 듯했지만 다행히도 둘이서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보이며, 서로 두 손을 꼬옥 잡는 모습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오늘 아침엔 햇살도 화창하고, 모든 게 잘 풀릴 거라 믿었던 아침이었는데 왜 그렇게도 불안함을 느꼈는지 해진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버지가 떠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민박집을 준비하느라 바빠서였는지, 몸을 혹사해서인지 그동안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씩씩해졌다고 믿었는데, 해진은 너무도 의외의 순간에 가슴속에 방패가 무너짐을 느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요? 오늘 퇴실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이야기가 많긴 한데.. 집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네요, 어제 급하게 장모님이 와주셨는데 더 민폐를 끼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저 혼자 여기 일정대로 있을 수도 없네요.. 다음에 가족끼리 함께 오고 싶네요."


"괜찮습니다. 제가 민박을 하면서 생각했던 게.. 민박집을 떠나실 때, 좀 홀가분한 기분이 되시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가슴에 짐 하나라도 덜어놓고 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그런 느낌이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


"네 맞아요. 저 그동안 가슴속에 쌓아두고 있던 많은 것들은 여기 덜어 두고 갑니다. 이 사람이 여기까지 달려와 준 게 크긴 했지만,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거 같아요. 게다가 어제 불멍 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제 속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것 같아요. 솔직히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홀가분해요.. 너무 꽁꽁 숨겨놓고만 살아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아침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니에요 호스트가 우셔서 놀라긴 했지만, 그럴 수 있다 생각해요. 아마 어떤 생각이 떠오르신 건지도 모르지요 전 괜찮습니다. 그럼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오겠습니다. "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영준은 아내와 화해를 하고, 그날 퇴실을 했다. 가족과 다시 온다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잠시 생각에 빠졌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어제의 소동 때문인지 오늘아침의 에피소드 때문인지 영준은 나머지 방값도 환불받지 않고 떠났다. 이틀 치의 평안을 얻고 간다며 사람 좋은 미소로 환불마저 거절하고 떠났다. 초창기라 하루의 숙박비가 아쉬운 차에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해진은 영준 부부를 떠나보내고, 방을 정리했다. 하루 밤의 늦은 취침으로 방안은 별로 어지럽혀 있지 않았다. 침구를 정리하는데 이불장 안내 보스턴 백이 그대로 있는게 아닌가.. 해진은 손님이 두고 가신 게 아닌가 싶어 어서 전화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으셨을 테니. 가방을 내려 마루로 나가려는 순간 가방 밑에 있던 봉투가 툭 떨어진다.


"수인아 오늘 불멍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

"응?? 왜 아까 손님이 오늘까지 예약이라 오늘은 손님도 없는데? 왜~? 나랑 뭐 할 이야기라도 있으신가? 흐흐"

"그게... 좀... 태워야 할 물건이 생겨서.."

"그 가방은 뭐야?


"먼저 죄송합니다. 이 가방을 없애주세요. 큰 폐를 끼칠 뻔했습니다. 다행히 다시 한번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가면 안 될 것 같아 부탁드립니다. 나머지 숙박비로 수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급하게 휘갈겨 쓴 메모다. 보스턴 백안에는 별다른 짐은 없었다. 한구석에 새로 산 듯한 빳빳한 로프 한 다발이 고이 담겨 있는 것 말고는. 해진은 그제야 환불받지 않았던 숙박비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왜 그리도 불안했는지, 왜 그렇게 아버지가 생각이 났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마터면 민박집을 열자마자 문을 닫을 뻔했다. 본인만 생각한 것 같은 남자의 행동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인사를 나눌 때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홀가분하다고. 무언가 내려놓고 간다고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래 액땜했다 치자.. 내가 사람 하나 살렸다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헐... 우리 민박집 문 닫을 뻔했네? 열자마자?"

"헐... 나도 그 생각했는데.. 그래도 마무리는 잘 되었으니 뭐.. 좋게 생각하자고.. 오늘 불멍 하는 김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 어때?"

"치.. 그래 오래간만에 그러자. 암튼 다 잘 되어서 다행이다. 이거 액땜이라 생각하고 잘 넘기자고"


해진은 문득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이 과수원도, 저기 저 방도, 나무를 패던 도끼도, 불멍도 어느 곳하나 아버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오늘따라 더 애틋해 보인다. 아마도 오늘 아침의 그 불안함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는 감정은 몸이 먼저 느껴버린지도 모른다.


봄이 오고 있다.

이제 사과나무에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가 가지치기를 할 때 해진은 이해되지 않았다. 멀쩡한 가지를 자르는 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몰랐다. 불필요하게 뻗어버린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 햇빛도, 공기순환도 훨씬 도움이 되어 나무의 성장을 돕고 수확량도 많아진다고 하셨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해진은 민박집을 하는 것이 스스로를 가지치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뻗어버린 감정의 가지를 예쁘게 쳐내고, 잘라내고 있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또 아버지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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