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법 봄이 오고 있다.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침저녁의 바람에서, 땅의 단단함에서, 나무 끝에 걸린 봉우리에서 봄이 오고 있는 것을 실감한다. 봄의 땅은 조금 더 폭신해진다. 겨우내 얼고 단단했던 땅이 서서히 풀리면서 말랑한 속살을 드러내는 것 같다. 도심에서는 느껴보기 어려운 경험이다. 우리는 항상 단단한 아스팔트만 밟고 살아온다. 단단한 지면만을 밟아서 마음도 단단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수인은 처음으로 말랑말랑한 땅의 폭신함을 느끼며 봄이 오는 것을 알아챘다. 폭신한 땅을 느끼려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첫걸음마를 하는 아기가 된 것 같았다. 아이의 첫걸음은 폭신한 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단단한 지면에 두 발로 우뚝 서야 할 텐데. 내딛는 첫걸음이 봄이 오는 폭신한 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원래 땅이 이렇게 폭신폭신한 거야?"
"응 봄이 오니까 땅이 좀 녹아 가는 거야. 조금 더 녹으면 이제 진흙밭도 된다고, 그럼 걷는 것도 힘들어. 어머니가 그게 싫다고 다니는 길은 좀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버지가 여기 길을 다 벽돌로 깔아 두셨대. 그 옛날에. "
"아 나는 원래 과수원이 다 이런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그나저나 나 이런 폭신 거리는 땅 처음 밟아봐. 기분도 뭔가 말랑해지는데? 일루 와봐 여기 여기"
"어? 그러네. 나도 오랜만이다 이런 폭신한 땅"
둘은 나란히 걸었다. 괜히 폭신 거리는 땅을 골라 걷다 보니 어느덧 과수원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경사진 곳도 있어 약간 긴장해 걸어야 하지만, 땅이 부드러워서인지 기분 좋은 산책길이 되었다. 이런 땅을 밟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인 듯싶었다.
"오빠 오늘 손님은 또 어떤 사람일까? 나 이제 완전 기대하잖아. 예전에 아르바이트할 때는 손님이 오던 말던 아니 손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뭐 나야 알바생이니까.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 민박집에 손님이 오면, 꼭 집에 누굴 초대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니까. "
"음 보자 일단 예약자 이름은 이서윤인데... 여성인 거 같아. 그 외에는 나도 모르지.. 우리 준비는 다 되었지? 잘 챙긴 것 같긴 한데... 이것도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는 것 같아. 우리 이거 천직인 거 아냐? "
"뭐가 이리 신났데? 암튼 혹시 모르니까. 잘 좀 챙겨봐.. 보스턴백 아저씨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잘 살고 계신가 모르겠네?"
"아.. 안 그래도 가방 태워버리고.. 문자 보내드렸거든.. 잘 처리드렸다고.. 언제든 놀러 오시라고.. 그랬더니 고맙다고 하셔.. 그리고 아저씨 글 쓰는 거 시작하셨데.. 글 나오면 보내주신다고 하시네?"
"뭐야? 그런 일 있으면 빨랑 빨랑 보고를 해야 할거 아냐.. 나도 동업자거든? 나를 너무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거 아냐? 내가 뭐 청소부야? "
수인은 일부러 과장되게 삐진 척했다. 그 역정에 해진이 허둥지둥 변명을 하며 수인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인이 해진을 한 방 먹이려 달려들자. 해진을 언덕 위로 뛰어오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따라 오를 재간이 없어 수인이 멈춰 소리쳤다.
"너~ 오빠 조심해! 내가 지켜본다~~"
보통 이곳에 오늘 손님은 빨리 오지 않는다. 지역에 교통이 편리한 것도 아니고 기차역에서 이곳까지 대중교통은 있지만 운행 편수도 많지 않다. 그래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물론 손님이 요청할 때에만 그렇다. 그렇게 손님을 픽업하고 들어오면 저녁 식사 시간쯤 된다. 그런데 오늘은 픽업 서비스를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녁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저 연락을 해 볼까 하다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시간은 오후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진즉 저녁식사는 끝이 났고, 말끔하게 뒷정리까지 마쳤다.
"오빠 내가 전화해 볼게. "
"으.. 응 그럴래? "
"... 네? "
"안녕하세요 여기 민박집인데요 이서윤 님 이신가요? 혹시 언제 입실 가능하실까 여쭤보려고요.."
"아.. 이제 버스 터미널 도착했어요..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지 아세요?... 아니에요. 버스 내려서 택시 탈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기사님께 왕암 해진 과수원으로 가달라고 하시면 돼요"
"...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에 표정이 없었다. 수인은 여행온 사람 목소리가 너무 차분하다며. 조금 걱정하는 듯했다. 외진 곳의 숙박시설의 문제점인가?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다. 아.. 그러고 보면 주인들도 딱히 멀쩡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탓인가? 해진은 이번엔 속으로 걱정을 했다. 행여 입 밖으로 나오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속으로면 되뇌었다. 수인이도 이런 날 왔었지... 하며
1시간쯤 지나 택시가 한 대 들어왔다. 20대 초반의 여인은 단출한 짐 하나를 가지고 왔다. 과수원이 언덕에 있어 이번에도 해진이 손님의 짐을 들었다. 손님은 마다하지 않고 해진에게 짐을 맡겼다. 수인의 말대로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아파 보이거나,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20대 초반의 생기가 없는 것만 빼면, 어느 여행자 같았다.
"식사는 하셨을까요? 주변에 식당이 없어서 원하시면 간단하게 준비해 드릴 수 있어요.."
"저...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쉬었으면... 해요.. 저녁은 괜찮아요"
"네. 그럼 방은 안쪽의 큰방을 쓰시면 돼요. 저희는 별채에 숙소가 있으니 필요하시면 거실과 방에 호출 버튼을 누르시면 돼요. 그럼 편히 쉬세요 "
간단히 고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은 방으로 들어갔다. 해진은 숙소에 누웠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게 다 보스턴 백 아저씨 때문이다. 손님이 오면 기쁘기도 하면서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혹시 이거 PTSD인 건가 싶었다. 걱정이 되면서도 지금은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기에 해진은 잠을 청했다. 무슨 일 이 생기면 잠귀 밝은 수인이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옆방에서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잠귀가 밝은 게 맞는지 걱정된다. 그래도 일단 수인을 믿어보기로
"흑...... 흑... 흑..."
해진이 걱정에 뒤척이다 잠에 빠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본채의 가장 안쪽 방에서 옅은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깜깜한 밤 여인의 흐느낌은 계절을 앞선 소쩍새의 울음소리처럼 구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