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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과 영호

by 성준

탁탁탁탁

부드럽게 리드미컬한 도마 소리에 서윤은 잠에서 깨었다. 제법 해가 떠올라 창을 통해 볼을 간지르고 있었다. '아침이구나' 잠이 깨며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후각이 살아났다. 문 밖에서 제법 근사한 요리가 준비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는 손으로 가지런히 모아 질끈 묶었다. 시장기를 느껴 밖으로 나가볼까 하다 어젯밤에 늦도록 울었던 기억에 다시 한번 거울을 보았다. 이런 눈이 퉁퉁 부었다. 역대급으로


서윤은 밖으로 나가고픈 생각이 식어버렸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쬐기로 했다. 제법 따스하다. 어제 울었던 울음에 머리가 멍하다.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느끼는데 드르륵드르륵 핸드그라인더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커피 향... 아.. 더는 못 참겠다.


".. 아.. 안녕하세요"

"아고 혹시 시끄러웠나 봐요? 혹시 시끄러워 일어나셨나요?"

"아니에요.. 저... 커피가.. 커피 향이 나서요..."

"아~ 지금 커피 내리고 있어요. 저기 식탁에 잠시 앉아 계시겠어요? 아침은 지금 준비할까요? 아니면 천천히 드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지금 먹을게요. 근데 커피 먼저 부탁드려요 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남자는 핸드드립으로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갓 갈아낸 원두에서 고소하고 기분 좋은 향이 오른다. 커피 향만으로도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커피를 보고 있으니 괜히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서윤은 커피를 받아 들고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입에 머금은 향이 기분 좋게 잠을 깨워주었고, 멍했던 머리도 한 결 맑어진 것도 같다. 영호는 이런 내게 카페인 중독이라 놀려댔지만, 그래도 아침의 커피는 서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또 주책없이 생각이 난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고는 집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에 도착해 아무 생각 없이 방에 들어왔기에 어떤 공간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식사도 거르곤 했다. 요리를 하는 남자는 꽤나 익숙한 듯 아침 준비를 해 나갔다. 이미 앉혀 놓은 밥솥에서는 뜨거운 김이 오르기 시작했고, 준비한 육수에 된장과, 두부와, 냉이를 넣고는 보글보글 끓이고 있었다. 예쁘게도 말고 있는 저 계란말이를 보니 또 영호 생각이 난다. 영호는 계란말이를 참 잘 만들었다.




"영호야. 서윤이랑 원장님께 가봐 찾으셔"

영호는 그날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형들이 그랬고, 누나들이 그랬다. 원장님이 부르시면 어두운 낯빛으로 돌아왔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고 원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다시 보지 못했다. 영호는 대학을 꿈꾸어도 보았지만, 현실 앞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어다. 학업대신 당장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수능을 준비할 무렵부터 영호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 치킨집, 배달 알바등 몸과 시간이 되는 한 모든 일을 하려 했다. 제법 돈도 모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그런 정도의 돈일지 몰라도 영호에게는 억만금 같은 무게였다. 어쩌면 오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호야, 서윤아. 너희들도 이제 만 18세가 넘었어. 이제 독립을 해야 할 나이야. 더 이상 나라에서 지원을 해줄 수가 없단다. 독립을 하면 너희 앞으로 각각 500만 원이 나올 거야. 이제부터 내 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해. 그 돈은 절대로 쉽게 써서는 안 되는 돈이야. 너희들이 사회에 나가면 더 이상 우리가 도와줄 수가 없단다. 너희들 스스로 챙겨야 해. "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영호와 서윤이에게 원장님은 엄마와 같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는 못했지만, 영화나 소설처럼 악덕한 고아원장을 만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영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때 원장님이 학교로 찾아와서 선생님께 화를 내고 자신을 감싸주었다. 영호는 그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원장님은 앞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방법을 천천히 설명해 주셨지만, 영호는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다음 주에 원을 나가야 한다는 것. 앞으로 스스로 방세를 내고, 먹고 자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영호야 우리 어디에서 살까? "

"우리?"

"응 우리 같이 살아야지. 이제 와서 너 혼자 살겠다고? "

"아? 어.. 그래 그렇지.."

동갑내기 서윤이는 항상 영호를 쫓아다녔다. 같은 나이지만 서윤이는 영호를 오빠처럼 따랐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마들이 놀릴라치면 서윤이는 영호 뒤에 숨었고, 영호가 나서 화를 내고 아이들과 주먹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면 서윤이는 엉엉 울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다친 영호에게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영호도 그런 서윤이가 귀찮거나 싫지 않았다. 자신에게 기대는 서윤이가 있기에 영호는 조금 더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디디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왠지 자신이 서윤이를 지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집부터 구하자"

"그럼 방도 꾸며보자, 침대도 사고 소파도 사고. 냄비랑 그릇이랑 사는 거야? 난 지하는 싫은데... 우리 돈으로는 반지하도 쉽지 않겠지? 그래도 볕은 잘 들었으면 좋겠는데. 바퀴벌레도 많으려나? 나 벌레 싫어하니까. 영호가 다 잡아줘야 해?"


서윤이가 철없이 떠는 모습에 어이없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아무렴 어때? 어떻게든 되겠지. 미리 걱정해 봐야 답이 있는 것도 아닌걸 뭐 '


서윤이의 철 모르는 농담이 전염되었는지 영호도 수다에 참여했다. 커튼보다는 블라인드가 낫네. 소파는 돈이 없으니 패브릭으로 사자고 거들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7년을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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