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둘이 전부였다. 서로에게 안부 전화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아침 인사를 나누고,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알려줄 사람은 서로 밖에 없었다. 첫 반지하에서 2년을 살았다. 서윤이의 걱정대로 곰팡이며, 벌레가 가득한 곳이었다. 반년이 지나지 않아서 서윤이는 영호가 없어도 바퀴벌레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라에서 나온 지원비는 방의 보증금으로 거의 다 들어가고, 둘은 당장의 생활비를 걱정해야 했다. 영호는 늘 그랬듯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전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오후가 되면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후부터 야간까지는 건당 수당이 나오는 배달 아르바이트가 더 수입이 좋았다. 저녁 배달까지 마치면 거의 9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지만, 영호는 항상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시간이 두 사람이 온전히 만나 함께 밥을 먹고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윤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공부도 해보고, 집안을 정리하기도 하곤 했지만, 작은 집에 일거리는 많지 않았고, 하루 종일 반지하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영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커피숍이었다. 은퇴한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커피숍은 크지 않았지만 제법 단골이 많은 카페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은 서윤이는 첫 면접에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면접이 끝나고 나니 꽉 쥐고 있던 주먹엔 손톱자국이 남고, 땀으로 흥건하기까지 했다.
적당히 자신을 꾸미는 법도 몰랐던 서윤이는 고아원 출신이며, 지금 함께 독립한 영호와 함께 살고 있다는 말까지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았다. 순간 부부의 눈빛이 흔들리던 것을 서윤이는 알지 못했다. 긴장하기도 했고, 타인의 시선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던 버릇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서윤이는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침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8시간의 근무였다. 첫 주는 커피 이름이며, 머신 청소하는 법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팀기에 손을 데이기도 하고, 테이블을 헷갈려 다른 메뉴가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서윤이는 기가 죽어 어깨가 처졌지만, 중년 부부는 처음엔 다들 하는 실수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토닥여 주었다. 다행히도 서윤이는 인복이 있었다. 인복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녀는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2년의 반지하를 벗어나 이사 간 집은 필로티가 있는 2층 빌라였다. 그들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빌라에 지하철 역에서 거리도 있었기에 가격은 쌌다. 반지하 월세방과 5만 원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500에 45만 원의 월세. 그들은 5만 원으로 지상으로 올라왔고, 햇볕까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밝아진 거실만큼 영호와 서윤이는 기운이 났다. 영호는 늘 일을 했다. 도통 쉬는 법도 몰랐다. 배달이 많은 운동경기가 있는 날이나, 궂은 날이면 영호는 마다하지 않고 출근을 했다.
영호는 부지런했고, 서윤이는 알뜰했다. 영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에, 세상에 서로 등을 기댈만한 존재가 단 둘 밖에 없음을 서로 잘 알기에 서윤이는 그 존재를 깨고 싶지 않았다. 서윤이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로 아르바이트를 해나갔고, 일이 끝이 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영호의 저녁을 준비했다. 햇살이 뜨거워지는 여름이면,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에도 느즈막한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서윤에게는 너무도 신기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주황빛의 저무는 부드러운 저녁노을아래 영호와의 저녁 밥상을 차리는 것이 좋았다. 서윤이는 커피를 내리는 것만큼 요리에 재능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영호가 요리 실력이 더 좋았지만 서윤이가 차려주는 저녁을 영호는 싹싹 비워냈다. 하루 종일 몸을 써야 하는 허기짐도 있었겠지만, 영호에게는 서윤이가 가족이었고,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이 본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라 생각했다.
또 5년이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월세로 살지 않는다. 영호는 집주인에게 사정을 부탁해 월세를 전세로 바꾸었다. 보증금 1억 원 5천만 원의 전셋집이 되었다. 7년간 1억 원의 돈을 모았고, 나머지 5천만 원은 은행에 대출을 받았다. 대출 이자를 내고도 한 달에 40만 원을 더 저축할 수 있었다. 영호와 서윤이는 참 알뜰히도 살았고, 흔한 여행 한번 제대로 다녀보지 못했다. 영호가 쉬는 날에는 지하철을 타고 한강에 가는 것이 유일한 여행이며 소풍이었다. 두어 달에 한번 한강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유흥이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여름 어느 날 영호는 한강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반지 삼아 서윤에게 결혼하자 말을 했다. 벌써 함께 살아온 지 7년이 되었지만 그날만큼은 취기 때문인지 상기되어서인지 영호도 서윤이도 모두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윤이는 영호를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둘은 가족이 되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이제 힘을 다하고 조금씩 옷 깃을 여미는 계절이 왔다. 영호는 더 열심히 일했고, 작은 가게를 하나 계약했다. 몇 년 동안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밑천 삼아 배달 전문 치킨 매장을 내기로 했다. 예전부터 인사드리던 치킨집 사장님이 낡은 튀김기를 거저 넘겨주셨다. 영호의 사정을 딱하게 보시며 쉬는 날에는 퇴근길에 치킨 한마디를 턱턱 던져주시던 분이셨다. 주택가 입구의 작은 가게를 오픈했다. 배달 전문이라 홀을 최대한 작게 만들었다. 테이블은 두 개가 고작이었다. 서윤이는 저녁때가 되면 커피숍에서 퇴근을 하고 치킨집으로 일손을 도왔다.
서윤이가 주문을 받고, 가끔 매장의 손님을 서빙하고, 영호가 배달을 나가면 대신 닭을 튀기기도 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내 가게라는 생각에 어깨가 들썩 거렸다.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기만 했다.
- 욱~ 어라... 우욱~-
갑자기 역해진 치킨 냄새에 서윤이는 반신반의하며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선명하게 붉은색 두 줄.
그 두줄이 영호와 서윤이를 떨어질 수 없게 만드는 튼튼한 생명줄 같이 느껴졌다. 퇴근 후 조심스럽게 내민 테스터기를 본 영호는 처음에는 코로나에 걸린 것인 줄 알고 약을 사 오겠다며 나가려 했다.
-... 우리... 아빠 엄마... 된 거야.. 바보야...-
-.. 아.. 아빠? ㄴ ㅐ... 내가?-
그날 영호는 참 많이도 울었다. 보육원에서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하던 부모님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부모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오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혹감, 안타까움, 안도감, 그리움이 차례로 스쳐갔고, 눈이 촉촉해진 서윤이의 얼굴을 마주하며 내가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항상 그리웠던 가족이 완성되는 것 같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영호와 서윤이는 한참을 손을 잡고 울었다. 서로의 눈물에는 사무치듯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조금씩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겨울이 지나고 땅이 말랑해지는 봄이 오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임신부 태가 나는 서윤이었다. 입덧 기간에는 치킨집에 나가지를 못해 미안했다. 영호는 힘든 내색 없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켰고, 이제 거의 지나간 입덧에 조만간 다시 가게에 나가 보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혹시 김영호 씨 아내 되시나요? -
-네.. 제가 영호 씨 아내인데요...? -
한 통의 전화로 7년의 행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