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대화가 길어져서였을까? 아침 해가 한참 올랐는데도 기척이 없다. 깨워볼까 하다 어제의 늦은 밤 대화가 떠올라 그냥 두었지만 영 개운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들어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해진의 마음은 떠오르는 태양만큼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은 진즉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는 끓여놓은 국이 졸아들어 간을 새로 봐야 할 정도다. 나의 불안함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수인도 기척 없는 안채가 걱정돼서일까 내 옆에 서 있지만 시선은 안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빠 별일 없겠지? 어제 분위기 나쁘지 않았지?"
".. 별일 없을 거야. 어제 늦게까지 이야기하시는 것 같던데.. 그래서 그냥 좀 늦게 일어나시는 거겠지."
"...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냐? 나 무서워.."
해진의 아버지는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태풍에 사과를 떨구어 낙과가 되던 날 해진의 아버지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셨다. 그 아침을 아직 잊지 못한다. 지나간 태풍에 환하게 뽀얀 모습을 내밀던 태양을...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시렸지만 햇살만큼은 오늘처럼 밝았다. 그리고 날카로웠다.
"오빠? 괜찮아? 갑자기 웬 땀이야?"
"…. 아... 아냐... 괜찮아.."
해진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맺혔다. 피부는 차가워지고, 창백해졌는데 이마는 송글 식은땀이 솟았다.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다. 가슴속 깊이에서 그날 아침이 자꾸 계속된다. 오늘 같은 날의 아주 평범한 아침이었는데.. 해진은 평범한 아침이 어느샌가 무서워졌다.
더 기다릴 수 없다 느낀 해진은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당 한가운데서 한숨을 몰아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해진도 모르게 두 손은 깍지를 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이제 손님들을 부르자. 하나. 두울 속으로 숫자를 세던 해진은 발걸음을 돌렸다. 무슨 영문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수인 곁으로 다가갔다.
"왜? 오빠 왜 그냥 왔어?"
"신발이 없어. 두 사람 다 신발이 없어. "
"어? 그럼... 어디 산책이라도 가신 거야?"
"아마... 그럴 거야.. 괜찮은 거 같아."
산자락 밑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아까부터 간간이 들려온 소리였지만 방안의 손님이 걱정되어 애써 무시했건만 아무래도 그곳이 힌트인 듯싶었다.
"이제 다 되었어요 이제 괜찮으실 거예요"
"아침부터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두 남녀가 보인다. 해진은 문득 맥이 탁 풀리는 듯 긴장이 풀렸다. 그래도 아무 일 없다는데 만족하며 천천히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어나셨네요. 어제 그냥 올라왔더니 차에 배터리가 나갔어요. 다행히 긴급출동이 된다고 해서요. "
"아침부터 어디를 가시려고요?"
"아~ 아내가 어제 너무 민폐를 끼쳤다고 아침을 좀 만들어보고 싶다고 나가려 했는데 이 사달이 났네요. 이거 참. 허허허"
사내는 해진의 맘도 모른 체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옆에는 그의 아내가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몰랐는데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걸로 봐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분명했다. 눈물은 좋다. 흘러내린 눈물을 타고 사연도 감정도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해진은 눈물에 힘을 믿는다. 문득 해진이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었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았을 때 애써 참아왔다. 눈물마저 흘리면 해진은 무너질 것만 같은 강박에 애써 애써 참아왔었다.
그런 해진의 눈에서 속절없이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당황한 해진은 몸을 돌려 고개를 들고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보려 했지만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수인이 놀라 뛰어내려온다. 남자도 해진을 모습을 보고는 당황해 어찌할 바 모르며 해진에게 다가온다.
남자의 손이 해진의 어깨에 닿는 순간 해진은 아침 내내 그를 괴롭혔던 그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요... 아무 일도 없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는 중천 위로 떠오른 햇살에 해진의 눈물이 반짝거리며 빛이 난다. 아까와는 다르게 포근한 햇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