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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Mar 12. 2024

10년 숙성비법 상처 극복기 3

상처는 사고가 아니다. 적금이다.

나의 상처에 대해 간략하게 적으면 마치 상처들이 한 번에 사고처럼 다가온 것처럼 보인다. 교통사고가 나듯 한 번의 커다란 충격에 무너져 버린 듯 보인다. 그러나 나의 상처는 강 하류 삼각주 마냥 천천히 천천히 확장되어 갔다. 작은 상처들이 아물만하면 또 다른 상처가 그 자리를 덮어버리고, 또 나아질 만하면 다른 상처들이 그 근처에 맴돌다 기회를 봐서 재빠르게 자리 잡는다. 그래서 겉보기엔 늘 한결같아 보일지도 몰랐다. 그저 조금 우울한 듯, 조금 기운이 없는 듯, 조금 피곤한 듯 보였는지 몰랐다. 


30대의 생활은 상처 하나에 나자빠지기엔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도 생겨난다. 보통의 30대는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된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이벤트들이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때이다. 30대의 삶은 우리 인생 중 가장 치열하면서 정신없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이벤트 하나하나가 주마등시 스쳐갈 만한 임팩트 있는 일들 뿐이다. 


그런 시기에 상처는 좀처럼 그 힘을 내기는 힘들다. 웬만한 감기엔 무리해서 일을 할 수 있듯, 작은 마음의 상처 하나쯤은 동반해 살아가는 게 무슨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잘 감당하면서 살아간다. 또는 적절히 감추고, 때로는 회복하면서, 때로는 상처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의 대미지는 적금을 넣듯 차곡차곡 한 켠에 벽돌로 남는다. 


나는 방송국의 피디였다. 골프를 전문적으로 중계하고 방송하는 곳에서 제작 PD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꿈은 드라마 피디였지만, 6명의 최종 면접원 중에 2명 안에 들지 못한 까닭에 물 먹었다. 마침 자회사에서 탈락자를 대상으로 간단한 면접만으로 채용을 진행한다고 연락이 왔고, 정말 원했던 콘텐츠는 아니었지만, 방송국을 꿈꾸던 내가 간단히 고사할 자리도 아니었다. 즐겁게 일을 했다. 주말도 없이, 전국 산으로 섬으로 골프장을 돌면서 경기를 중계하고, 해외 골프 대회를 중계하고 뉴스를 만들고 때로는 뉴스에 출연도 했었다. 


매주 골프 단신을 찾아 돌아다니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급하게 메이크업도 받고, 출연도 하고, 또 재방송을 편집하고, 하루 15시간씩 근무하던 그 시절. 

지금으로부터 15년 정도 지난 듯. 




나의 방송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을 하면서, 지금처럼의 생활에서는 일과 삶을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케이블 방송의 급여와 복리 후생에 대한 불만들. 미래에 대한 불안함. 그런 것들 아래엔 되지 못한 드라마 피디에 대한 아쉬움이 깔려 있었다. 


마침 학교 선배의 이직 제안. 당시 핫하게 떠오르던 소셜커머스 스타트업의 콘텐츠 팀으로의 이직을 제안했다. 스타트업의 열풍에 젊은 회사, 앞으로 더 성장하리라는 기대감, 연봉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팀장급으로의 위치. 나는 생기 있는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이직은 순조로웠고, 회사는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성장하고 커져갔다. 지금은 쿠팡이 소셜머커스의 대명사이지만, 당시만 해도 쿠팡, 티켓몬스터, 위메프 나중에 그루폰까지 춘추 전국 시대에 가까웠다. 하루, 한 주, 한 달별로 사이트의 점유율과 그래프가 달라졌고, 우리는 웃기도 때론 울기도 했다. 스타트업의 최대 장점이 자유로움이라면, 반대 역시 자유로움이기도 하다. 자리를 잡아 나가는 스타트업은 하루아침에 조직이 신설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첫 출산을 하면서 24시간이 넘게 분만실에 있었다. 유도제와 무통 주사를 3번을 맞고도 문이 다 열리지 않았다. 제왕절개를 하느냐 고민하면서 하루를 꼬박 보냈고, 아이는 26시간 만에 무사히 태어났다. 출산 휴가를 다녀온 사이 우리 팀은 모두 권고사직을 당했다. 팀이 공중분해가 된 것이다. 팀장 급에 있던 나와 몇 명만이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팀원을 잃은 패잔병은 새 부서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다. 회사에 대한 불신과 눈칫밥, 아직 꺾이지 않은 자존심에 분노와 실망만 가득했다. 내가 회사를 버릴지언정 회사가 날 버리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조가 되기로 결심했다. 


첫 아이는 태어났고, 나의 팀은 공중 분해되었으며, 나는 이직 11개월 만에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새로 이직할 직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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