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57.수미상관의

by 성준

p 183-184 <김은경,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


뚜껑을 덮으나 안 덮으나 내용물은 냄비 안에서 잘 익겠지만
뚜껑을 덮어야만 더 깊게 우러나는 요리가 있거든요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종종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내가 살아온 날들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보통 우리는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고 살지 못한다. 때로는 불의에 굴복하기도 하고, 정의에 눈을 돌리기도 하며, 권력과 돈에 무릎 꿇기도 한다. 이런 이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아낀다던가, 혼자 속으로 삭이기도 한다.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런 말들이 우리 안에 흔적으로 남기도 한다. 때때로 외면했던 일들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상처가 되기도 하며, 그때 전달하지 못했던 진심에 지나간 날들을 아쉬워하곤 한다. 그런 말들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우리 안에서 천천히 우러나기도 하고, 발효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썩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때때로 꺼내어 돌아보고 쏟아내고는 한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문제와 직면해 싸우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다른 형태의 기록으로 남기기도 한다.


개개인에 따라 옳고 그름이 같은 수 없기에 단 하나의 방법을 추천할 수 없지만, 나를 되돌아보면 나는 다른 형태의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원한다. 내가 경험하고, 내 안에서 상처가 되었던, 추억이 되었던, 혹은 이정표가 되었던 그 어떤 것들이 내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고, 다른 형태의 무언가로 변하기를 원한다. 그저 잊고 살거나, 혼자 괴로워하지 않고, 다른 형태의 생산품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상처나 추억을 마냥 소비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경험들이 재료가 되어 새로운 생산품으로 탄생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의 경험으로 타인이 소비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되기를 원한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을 쓰기 위해 인생을 돌아볼 때는 적절한 시기가 필요하다. 내가 겪은 모든 경험들이 글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꺼내야만 할 때가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픔과 아픔들은 너무 날카롭다. 그 날카로운 감정들이 생동감이 있는 글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날카로움만 남겨져 글을 쓰는 동안의 나도, 글을 읽는 누군가도 다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적절한 숙성일지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평범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개인적인 특별한 경험도,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한 두 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경험들도, 내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숙성되는지에 따라 새로운 향과 맛을 풍길 수 있을지 모른다. 강렬한 향의 위스키가 오크통을 만나 부드러운 풍미로 거듭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글감은 그저 날카롭고, 짙은 향의 그것들만은 아닐 수도 있다.


같은 어려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같은 즐거움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각자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차이로 타인과의 다름을 깨닫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이 아닌 나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감정을 보듬어주고, 숙성시키는 것이다. 같은 식재료가 셰프의 손에서는 다른 음식이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지난날의 삶은 바꿀 수 없는 재료들이다.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설 수 없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들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글을 써야 한다. 아팠던 기억, 부끄러웠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이 때로는 생긴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닌 우리의 속에서 변형되고,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방법이 나를 돌아보고, 나의 인생을 다듬는 방식이 될 것이다.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아픔을 통해서 나에게 남겨진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들. 행복함을 오롯이 느끼며, 동시에 나의 행복을 나눠줄 방법을 찾는 것, 그 행복에 감사하는 법. 나를 상처 주었던 사람을 저주하는 동시에 그를 가엾이 여길 수 있는 법들을 우리는 찾아야 할지 모른다.


글을 쓰기 위해 인생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글감을 찾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 경험을 글감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적절한 시간과 노력을 통해, 해체하고 숙성시키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숙성된 글감으로 탄생한 나의 글은 글로서의 생명력을 가지는 동시에 내가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표가 되어 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것은 인생을 돌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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