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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 발이 걸렸어요

미련을 정리하는 법

by 성준

은교 씨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요

그림자에 발이 걸렸어요 -황정은 <백의 그림자> 중에서


무엇에 미련을 두어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거렸을까? 형태도 없는 그림자, 실체 없는 그리움에 나의 행동이 지배되어 버린 형태. 걸려버린 발걸음


고즈넉한 밤, 그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 못 드는 그런 경험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과 속상함에 눈물짓는 기억들. 무엇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했던 마음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이별을 고하면서도 돌아서는 발걸음에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노려보고 또 쓰다듬고,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를 수십 번을 고민하는 그런 상처들까지도 모두 미련일지 모른다. 이룰 수 없었던, 혹은 미숙했던 어느 시절에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감정들이 두고두고 딱쟁이로 남아 그 그림자에서마저 발이 걸리게 되는지 모른다. `


본래 미련이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을 말한다. 단어 자체로도 무언가 끈적거림이 있다. 억지로 떼어낸 스티커의 끈적임 같은 것들. 시간이 지나 먼지가 붙어 더 지저분해지고 잘 떼어지지도 않는 흔적 같은 것들 그런 느낌이 잔뜩 낀 단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미련이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마음들이라면, 우리가 미숙했던 어렸던 때의 그 감정과 기억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미련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렸기에, 미숙했기에, 이기적이었기에 우리는 미련으로 남게 될 많은 실수를 했는지 모른다.

당시에 최선이라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을 우리는 시간과 함께 다른 기억으로 저장하고는 한다. 때로는 후회로 남기도하고 때로는 추억으로 되뇌기도 한다.


최선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에 배신당하거나, 혹 보지 못했던 진실과 감춰둔 욕망에 다른 형태의 결과를 남기곤 한다. 그 모든 파편들이 미련이라는 형태로 곳곳에 흔적을 남기다. 비가 오면 무릎이 시리듯, 온몸 구석구석 남은 파편은 특정한 환경에 처할 때 문득 되살아난다. 눈으로, 귀로, 향기로 툭 하고 터지고는 한다. 의도해서가 아닌 조건 반사와 같은 기억들이다.


미련을 감당하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숙제가 될 수도 있다. 미련이란 태생이 정리하지 못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녀석이다.


하나의 기억과 인연이 끝이 나고, 그 결과에 대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삶을 살아온 결과가 미련이라는 파편조각으로 남은 셈이다. 미련에 가장 결핍되어 있는 요소는 마무리다. 인연이 끝이 났다는 마무리. 그 인연이 나에게 어떠한 기억과 추억을 남겼는지에 대한 마무리. 그리고 끝이 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다짐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연은 둘이 노력해야 이루어질 수 있지만, 헤어짐은 어느 한쪽의 정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남겨진 자에게 미련으로 남을지 모를지언정, 인연은 끝이 났고, 돌이킬 수 없다. 인정하기에는 잔인한 진실이 우리를 끝까지 놓지 못하게 만든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한다면,

다시 한번 더 다가간다면,

내가 부족했기에


라며 자신을 탓하지만, 선택은 나에게 있지 않다. 나의 노력만으로 결정될 수 없는 부분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는 노력이 미련이 된다. 시기에 맞지 않는 노력이 집착이 된다. 그저 욕심일 뿐이다.


미련은 내버려 둘 수록 이자를 쌓는다. 점점 꺼내 볼수록 실체가 생긴다. 그림자에 내 발걸음이 걸리듯 실체를 낳는다. 미련은 그렇다.


미련은 추억과 다르다. 추억은 미련에 마무리를 더한 결과다. 인연이 끝이 났다는 마무리. 다시 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마무리를 더해 깨끗이 떼어낸 스티커와 같다. 깨끗이 떨어진 스티커는 예쁜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다. 끈적임에 먼지가 붙는 찢어진 스티커와는 다르다. 미련을 추억으로 혼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분명 둘은 너무도 다른 위치에 있다.


때로 우리는 미련에 발목을 잡혀 삶을 보낸다. 미련에다 추억이라는 가짜 이름을 붙이고는 그 시절에 기대어 살거나, 그 시절을 찬양하곤 한다. 분명한 것은 그럴수록 지금과 미래의 삶은 갉아먹는 일이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모든 일에 끝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내가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들 모두 그와 같다. 어린 시절에 키웠던 교문 앞의 노란 병아리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도, 나를 유난히 아껴주셨던 할아버지도 그리고 내 동생도 모두 내 곁을 떠났고, 나는 받아 드렸다.


모든 것들을 나의 노력으로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하나의 이야기 인지도 모른다. 내 곁에 다가오고, 내 곁을 떠나가는 인연들을 우리는 내 마음껏 할 수 없다.


다가오는 인연에 잠시 곁을 내어주고, 떠나는 인연에 말끔히 자리를 쓸어 내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억지로 자리에 앉혀 둘 수 없고, 떠나간 그림자를 묶어 둘 수도 없는 것이다.


때때로 그림자에 발이 걸릴 수는 있다. 우리는 때론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림자에 발이 묶이면 안 된다. 미련은 그림자와 같아 실체가 없다. 그것에 실체를 쥐어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지금에 대한 불만, 놓아주지 못하는 욕심, 되돌릴 수 있을 거란 착각 이런 감정들이 모여 벌어지는 일이다.


미련에 집착을 빼고, 마무리를 더하면 그것이 추억이 된다.

그 추억은 지난날의 경험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담백하게 정리된 추억은 지금의 삶을 빛내 줄 향수가 된다.

은은하게, 도도하게 나의 삶과 경험에 빛을 더한다. 추억은 경험이 되고, 내일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같은 경험으로 누군가에게는 미련이 되고, 누군가에겐 추억이 된다.

어떤 향기를 남길 것인가는 어떤 방식으로 내 곁을 내어주고, 떠난 자리를 정리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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