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keeping records for better self
자기소개와 자기 PR시대라는 단어가 익숙해지다 못해 진부해진지 오래지만 자신을 온전히 진실되게 소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남들을 제치고 뽑혀야 하거든.
관심 없는 우주의 세계보다 관심을 기울일수록 모르겠는 개인의 내면이 미지의 세계에 더욱 걸맞는다 생각하는 나의 자기소개는 입을 뗄 때마다 바뀐다. 변화가 아주 미세할 때도 있고, 태세가 완벽히 전환될 때도 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과거에 지껄인 내 소개 따위는 잊혀져있고 변화를 알아차리는 이도 없다.
대학원 진학을 위한 시험은 마무리되었고, 이제 인생을 학교에서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아름답게 조립하여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차례란다. 소개팅에서 취미가 뭐냐,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냐는 질문에 쩔쩔매게 된다.(나보다 30분 정도 늦게 소개팅을 시작한 옆 테이블 사람들의 질문과 답변이 30분 전 우리 쪽 대화와 꼭 같아서 웃음이 삐질삐질 새 나왔다.)
브런치를 열었더니 '작가 프로필을 채우고 독자에게 나를 소개'하라는 알림이 뜬다. (흑.) 무시하고 넘기려는데 작성글이 아닌 텅 비어 있는 작가 소개가 내 페이지의 첫 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아악!)
문득 생의 첫 소개팅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당시 그는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지 싶다. 자신의 매력포인트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짚어줬거든. ‘첫째’, ‘둘째’, ‘셋째’라는 관형사를 사용했고, 한 포인트를 설명할 때마다 애초에 펼친 세 손가락에서 한 손가락씩 접어나갔다. 난 빠르게 그 자리를 접었고.
유능하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게 될까. 이 글을 완성하면 현시점에서의 미지의 범위가 조금은 좁혀지려나... 현시점이라는 조건을 굳이 붙인 이유는 나의 내면이 언제 또 변모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서. 지금의 나를 온전히 소개하는 이 글이 언제든 무용해질 수 있어서.
첫째(관형사, 손가락 자제 요망^^),
저는 독서를 좋아합니다.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려는 노력 때문에 우리의 매일은 대체로 비슷하다. (회사-집-회사-집, 학교-집-학교-집.) 하루하루 살아 내다보면 고민하거나 생각할 여유는 사치다.
잘은 모르지만 너무나 익숙한 나라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필요성도 못 느낄뿐더러 그럴 틈도 없다. 나에게도 이토록 무심한데 남일에 무심하지 않다면 그쪽이 되려 이상하지.
나의 일상과 떨어진 세상살이를 고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독서뿐이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인간과 상황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다. 잠시나마 멈추고 고개 갸웃거리며 생각할 틈이 생긴다. 영화는 직접 템포를 조절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에 뒤진다. 멈춰 서서 고민할 겨를이 없거든.
나라면, 우리라면, 과거의 우리라면, 미래의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비겁한 쪽일까, 용맹한 쪽일까. 어떤 선택을 내리긴 내렸을까. 그저 피해버리진 않았을까.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금의 내가 선택할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를 통해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 꿈꿀 수 있다. '현재의' 나와 '내가 바라는' 나의 차이까지도 알게 된다. 숨이 붙어있다면 끊임없이 마주하게 될 각각의 상황 속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고 싶지 않다는, 후회할 일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는 추상적이기만 한 열망을 실현시키고자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경험상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일과 내가 나아갈 방향이 명확해지는 일에는 꽤나 큰 성취감이 따른다. 그리고 우월감도. 물론 딱히 누가 알아주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안다.
언제나 중요한 건 부모도, 친구도, 애인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다.
지금보다 많이 어릴 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여운이 남을 것 같을 책을, 더 흘러서는 내 생각이나 가치관을 지지하는 책만을 골랐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다. 또, 증명하고 싶었고. 이제는 그저 관심 가는 주제의 책을 읽는다. 내 생각과 궤가 같든 다르든 크게 구애받지 않으려 애쓴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편협한 인간이 될까 두려워서.
책을 읽다 일상과는 다소 먼 세상을 10분 정도 떠올리고, 어느 날엔 20분 정도 생각하다 또 하루는 60분 정도 고민한다. 그렇게 책을, 아니 더 정확히는 책을 읽고 사색하는 내 모습을, 그리하여 책을 읽기 전과는 꽤나 다른 마음가짐을 먹게 된 나를 좋아하게 된다. ‘현재의'나와 '내가 바라는'나 사이의 줄어든 간극만큼 차오르는 자존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모름지기 독서를 하자. 더 많은 삶을, 다양한 시간대에 걸쳐 살 수 있는데 현실에만 갇혀있는 건 너무 아쉽잖아. 라고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나에게 누군가 너의 그 사지 멀쩡한 몸뚱이도 그렇게 가만히만 두면 안타깝지 않냐고 혼낼 것만 같다.
연령별 추천 도서라기 보단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도서(좋아하는 영화 제목의 패러디)
- 초등학생: 창가의 토토.
- 중학생: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진주 귀고리 소녀.
- 고등학생: 아홉 살 인생. 연금술사.
- 20대: 데미안(데미안이 부담스럽다면 헤세를 읽는 아침). 유토피아. 막다른 골목의 추억. 인간실격.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진보와 빈곤. 사피엔스.
둘째,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있는 과거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내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 유념하는 일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대단한 위인이 아닌 이상 혹은 나를 극도로 증오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은 이상 본인의 과거 따위 남들은 관심 없다.
고등학생 때,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잠깐 따돌림을 당했다. 곧 다시 모두 친하게 지냈는데, 나의 따돌림을 주도했던 친구는 몇 번이고 이간질시켰고 이런 일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난 내가 당한 자잘한 해코지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다. 유치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눈뜨고 못 볼 기록. 별일도 아닌걸 무슨 단죄하듯 깨알만 한 글씨로 요목 조목 새겨 넣은 꼴이 라니. 치기 어린 분노는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으로 남아있다. (방랑 18 즈음의 패기^^). 어렸다.
요즘은 타인의 잘못으로 데스노트를 채우기보단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다. 머릿속 생각들은 몇 시간만 지나도 생생하게 떠올리기 쉽지 않아서. 번뜩 떠오른 생각은 일반적으로 완결성을 결여한다. 붙잡고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렇게 긴 시간 공들여 찾은 의미라도 어딘가 써두지 않으면 금세 기억에서 잊힌다.
쓰기의 가장 큰 매력은 완결성이다. 모든 생각이 의미 있는 결론으로 도출되는 건 아니지만, 쓰지 않으면 어떤 생각도 의미 있게 마무리되기 어렵다.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도는 생각들이 논리 정연하게 곧바로 입 밖으로 흘러나올 리 만무하다.
한번 뱉은 말은 절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진리는 항시 유념하고 사는 편이 좋다. 개인의 재앙은 대부분 입에서 비롯되므로.(자연재앙 다음으로 무시무시한 주둥아리 재앙.)
그리하여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생각을 단어로 구체화시켜 점검해야 한다. 한마디로 기승전결이 필요한데, 글로 적어 내려 가지 않는 한 어렵다.
이런 준비는 애인과 싸울 때도 퍽 유용한데 실제로 양해를 구해 메모장을 펼친 채 싸운 적도 있다.(무적이 된다.)
남자 친구를 코너에 몰수록 묘하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지만 상대방이 숨 막혀 도망칠 수 있다는 부작용을 유의해야 한다.(참고로 난 거의 매번 차인다>.<)
참 많은 과거의 남자들에게 이름을 각인한 메모장을 선물했는데, 그 누구도 세장 이상 사용하지 못했다. 아마 기록하지 않아도 모든 걸 기억할 만큼 똑똑했거나, 기록할 만큼 의미 있는 고민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거나, 별 생각이 없었거나.
나의 과거와 독서로 점철된 생각들을 붙잡고 늘어지는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시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멈추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애쓰며 지나온 나의 시간이, 나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더 의미를 가질 것 같다.
그렇게 의미를 지니게 된 과거의 기록을 딛고 때로는 한 계단 더 오르며 성장하고, 때로는 한 계단 더 아래로 떨어져 방황하며, 계속해서 '내가 바라는' 나에게로 나아가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 것.
고민 없는 하루를 보내지 말 것.
그리하여 부끄럼 없는 매일을 쌓아 떳떳한 삶을 이루어내길.
쓰고 나니 소개라기보다 그저 독서 권장하는 꼰대의 기나긴 일장연설. 소개팅에 써먹을 이야기는 1도 없네.
저는 독서를 좋아하고요, 일기를 가장한 데스노트도 종종 씁니다. (밥맛. 아니, 있던 밥맛도 떨어질 맛.)
역시, 진실된 소개는 입밖에 내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소개팅은 접고,
책이나 읽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