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hamalg Sep 02. 2018

39. 살 찌우는 계절.

올해 못 다온 비가 며칠 상간에 죄 몰아 내리는 듯하더니 금요일부터 하늘이 꽤나 가을스럽다. 광화문에서 쫀쫀한 베이글에 시나몬 맛 크림치즈를 담뿍 담뿍 올려 커피랑 먹고 싶다. 한강에서 맥주도 한잔. 멀리멀리 드라이브도. 여행도. 머릿속이 약간 아니 꽤나 복잡해야 할 것만 같은데. 그저 잔잔하기만.


예상치 못했는데 어쩌면 제주도로, 부산으로, 전주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입학설명회에서 해외유학 10년, 직장경력 5년의 여자 사람은 어디서도 딱히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물론 시험 점수도 애매하다. 학점은 더하다.)


학교들은 최근 공개된 변호사시험 합격률로 곤욕을 치른 기색이 역력했고, 모 교수님은 변호사가 돼서 사회적 약자를 돕든, 사회적 강자를 돕든 그건 당신 알바 아니라는 말씀도 했다. 중요한 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인데 유학생들, 특히나 중고등학교마저 해외에서 지낸 학생들이 잘하는 꼴을 못 봤다가 골자였다. 자기소개서를 픽션으로 쓰든 논픽션으로 쓰든 하등 상관없다고.


현실적으로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당당한 결과주의에 뜨악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법조인을 배출하는 것이 물론 가장 중요할 테지만 그 의도의 선악은 '알바 아니게' 만드는 시스템의 횡포. '훌륭한' 법조인 양성에는 큰 관심이 없다. 교수님이 선발하실 정량이 뛰어난 학생들의 의도가 부디 선하길. 아니 적어도 악하지는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길. 어쩌면 요즘 세상 들썩이는 사법개혁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되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 그곳이 어디든지.


간만에 언니들과 술 한잔 했다. 세명이 동시에 솔로였던 적이 과거에 또 있었던가? 아마 없었지 싶다. 들어버린 나이만큼 쌓여버린 남자 이야기는 끝없다. 과거 이야기, 19금 이야기, 절대로 다시는 현재가 될 리 없다 믿었던 과거의 망령이 현재에 침투한 해프닝, 19금 이야기, 소개팅 이야기, 19금 이야기. 금지, 금지, 금지. 점차 낮아지는 볼륨.


와중에 내가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슬렸다. 누군가 내게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굉장히 짜증 날 것 같다. 마치 세상 다 산 사람마냥 어떤 풍파에도 거뜬한 척, 다 아는 척 나불대는 꼴사나운 인간의 문장이 왜 내 입에서 주절주절 나오는 거지.


자기방어다. 그래. 이건 자기방어다.

우리 셋을 지나간 다양한 남자들 각각의 비검함에 치를 떨며 열변을 토하던 나 또한 다를 바 없다. 비겁함은 내 입을 거쳐 나와 언니들의 귀에 쏙쏙 박히는 중이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믿어야 아무렇지 않게 지날 수 있을 뿐이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최면을 걸어야지 원치 않은 결과도 큰 타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결과에 대해 끝없이 꿈틀대는 욕망과 욕심을 애써 숨겨본다. 썩 잘 숨겨지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언니들에게, 친구에게, 동생에게, 엄마에게 나불나불 감춰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마저.


언젠가 모두 떠나고 혼자가 된다 해도. 더 많이, 더 자주, 일반적인 개념의 성공과는 멀어진다 해도.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대도 실망도 않으려고. 그닥 강인하지 못한 나의 의지가 결과에 발목 잡혀 주저앉을까 겁이 나서 밑밥 까는 중.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지킬 방법이 비겁한 눈가림 말고는 떠오르지 않아. 남들에게도 떠벌려야만 완벽히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성숙해지면 입 좀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몇 개월 전 인터넷으로 직구 한 흰 블라우스가 몸에 딱 맞는다. 분명 너무 컸었는데. 그동안은 입지 못해 속상했는데, 막상 딱 맞으니 묘하게 기분이 상한다.


가을에는 대하도 먹어야 한다. 냉동실에 있는 패밀리 사이즈 통에 그득 든 아몬드 봉봉, 뉴욕 치즈케이크, 체리쥬빌레, 레인보우샤베트도 해치워야 한다. 블라우스는 두 번 다시 커서 못 입을 일 없이 잘 입을 듯하다. 포실포실 살이 찌는 계절. 남자 친구가 없을 때엔 항상 살이 빠졌는데 이번엔 남자 친구와 헤어지니 살이 차오른다.


항상 시끄러운 잡생각으로 머리가 웅웅 거릴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크게 복잡할일이 없다. 답이 거의 정해져 버렸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뭐든 하지 않기보단 해 버리는 쪽으로. 먹자. 읽자. 쓰자. 가자. 하자.


예외는 하나. 사랑만큼은 조심 또 조심.


-끝.-

매거진의 이전글 38. 독서와 기록, 그렇게 앞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