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hamalg Oct 26. 2018

40. 브라우니는 커피와 함께.


쌉쌀한 마무리 없이 마냥 달콤하기만 한 디저트에 언제부턴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초콜릿 케이크에 곁들일 음료로 아이스초코나 핫초코만을 고집하던 불과 몇 년 전의 내가 존경스럽다. 한국에서 아이스초코는 그저 초코우유지만 호주는 초코우유에 아이스크림을 둥둥 띄우고 그 위에 휘핑크림과 초코시럽까지 끼얹어 준다. 꽤나 최근까지 커피는 그저 탄맛 나는 시커먼 음료였다. 커피의 도시인 멜버른에서 8년을 살면서도 마셔볼 생각조차 않던 과거가 이제서야 아쉽다.


당시에는 초콜릿에 대한 나름의 철학과 자부심이 있었다. 다이어트 걱정을 하며 밥을 먹을 바엔 초콜릿을 먹는 편이 이롭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지금의 뜨악스러운 저질 체력은 수없이 많은 끼니를 초콜릿으로 때운 탓일지도 모른다. 또 아이스초코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아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띄워 준다면 그 집은 문제가 심각했다. 초콜릿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카페라며 폄하하곤 했는데.

아! 갑자기 또 떠올랐다. 그 당시 나의 이상형은 밥 대신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 정말 웃기다. 진짜 웃긴 애네 ㅎㅎㅎ 그보다 더 신기한 건 그럴 수 있다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본인 이상형도 마침 딱 그거라던 사람이 기억이나 웃음이 난다. 다들 잘 지내시죠? 오겡끼데스까아~^^)

그립다. 멜버른도, 초콜릿도, 뻔질나게 다니던 학교 근처 카페들도, 입에 대지도 못했던 커피 조차. 아무 생각 없이 잘만 살아지던 그때의 나와 그런 자신을 전혀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던 내가. 정말 멜버른에 가고 싶다. (빠리보다 더!) 선선한 가을바람 쐬며 대학 친구들과 마신 와인의 여운이 길어지는 듯싶다.


왜 몇 년 전에 써 내려간 일기나, 고민들을 나중에 읽으면 사뭇 진지한 폼을 잡고 썼을 어렸던 내가 떠올라 풉하고 웃음 터질 때처럼 지금 이 글도 불과 몇 시간이 지나면 나의 비웃음을 살 것같다.


순간의 즐거움이 과연 의미 있을까라는 고민이 드는 요즘이다. 즐거움이라는 가치가 내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큰 걸까? 또 그렇다고 즐겁지 않은 일에 시간을 쓰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싶기도 하다.


지금은 함께 즐겁지만 그 관계가 지속될 가망은 없을 때.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많이 웃고, 많이 먹지만 다음날까지 피로가 영 가시질 않을 때. 전날의 그 웃음 끊이질 않던 시간들이 모두 일순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기억력이 감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웃고 떠들던 전날의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즐거웠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잘 가늠이 안 간다. 그저 기계적으로 웃고 떠들었단 방증일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확실히 더 사람을 가리게 된다.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앞으로도 안부가 궁금하고 간간히 얼굴 보며 지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와 함께 할 때 행복한지, 지겨운지, 여기서 이 사람과 멍 때릴 바엔 차라리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지, 점점 더 명확해진다. 일이며, 연애며 나를 찾는 사람도 많고 바쁠 때엔 함께 하는 상대가 누군지에 따라 그 시간의 만족도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유가 없을 때엔 간만에 생기는 잠깐의 틈 마저 나태로이 보내질 못하고 그저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해줄 사람을 찾아 일정을 빡빡히 채웠다.


요즘의 베스트셀러들은 순간을 즐기라는, 우리 모두 충분히 애썼다는, 인내는 뒤로 하라는 토닥거림이 주를 이룬다. 나는 저런 위로를 받을 만큼 삶에 지치진 않은 것 같다. 아직은 더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뿐이고 앞으로도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싶다. 내가 떳떳하게 위로를 받을만큼 최선의 최선을 다해본 인생 영역은 인간관계뿐이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내가 자포자기의 심정을 느끼는 유일한 영역.


친구가 몇 없어 남자 없이는 못 살겠던 이유를 꼽아보면 혼자 방문하기 애매한 카페의 초콜릿 케이크를 못 먹게 된다던지, 바쁜 일상에 숨통 틔워줄 여유시간을 아무것도 안 하며 허송세월 하는 게 끔찍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관계는 항시 즐거울 수 없고, 어느 순간부터 즐거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저 꾸역꾸역 견디는 관계. 어떤 이와의 관계는 영영 보지 않게 된 지금이 되려 평온하다.


초콜릿 케이크는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와 먹거나, 커플 틈바구니에서 당당히 혼자 먹으면 그뿐이다. 그 편이 훨씬 더 의미 있다고 이제야 정말 진심으로 그리 느낀다.


커피를 다 마신 후로 한입도 먹지 못해 남은 브라우니를 포장해간다. 내일 혼자 집에서 캡슐 커피 한잔 내리고 달콤함으로 찝찌름 해진 입을 헹구며 먹어야지. 남은 브라우니를 해치우려면 두 잔의 커피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내 시간을 함께 했음 한다. 가족, 같이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 마음 따뜻해지는 친구들, 그리고 나 자신. 나의 시간이 최대한의 의미를 확보할 최선의 방법.


꼭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라도, 미래에 함께 추억할일 없더라도, 그저 나의 기억에 얼마 동안은 남을 정도의 즐거움이라면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나의 시간들이 조금이라도 더 의미있길 바라는 마음에 기억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나의 여러 요소 중 이 부분만큼은 퍽 만족스럽다.


오래도록 기억해서,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하루를 만들고자, 나는 오늘도 쓴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