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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Oct 29. 2018

공돈의 유혹, free money haven

한 권, 그 후: 보편기본소득 Universal Basic Income

방글라데시의 현재는 우리가 이미 극복한 디스토피아라면,

'나도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알겠느냐~'는 노랫말을 비웃어 넘길 기술 혁명의 시대는 다가오는 어둠이다. 나조차 모르는 나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인공지능의 출현. 기술을 끝없이 개발하는 이유가 인류의 더 나은 삶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기술이라는 것이 또 만들어 놓고 보면 생각지도 않은 문제를 양산하는데, 창조주인 인간의 예측 범위를 왕왕 벗어날 뿐 아니라 은근슬쩍 대중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우리를 위하는 척 가식 떨며 점차 주인의 운신의 폭과 자유의 범위를 침범할 것 만 같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조성되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거짓말처럼 기적 같은 정책이 고안되어 이를 실현할 돈이 마법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다수의 유권자가 각자의 이익보다는 보편적 공익을 위해 합심하여 이런 조치에 한 표를 던진다면 만사 무슨 문제겠냐만은. 그 같은 해피 엔딩은 픽션에만 존재할 뿐, 논픽션 세상은 그렇게 빙다리 핫바지처럼 설렁설렁 맞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영화에서 처럼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온라인 게임으로 도피한다던지, 로봇과 3차 세계 대전을 치른다던지, 로봇의 채찍을 견디며 비인간적인 박해를 견뎌야 하는 디스토피아의 도래는 소원하다. 물론, 이런 영화가 과도한 상상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퍽 다행이 아닐 수 없다.


SF 영화 속 설정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을 게 (아마) 거의 확실한 미래의 우리는 너무나 효율적으로 신속히 운영되는 세상 속에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각자의 삶을 딱히 열정적으로 이겨낼 이유도 없고, 의지는 더욱 없어 무미건조히 그저 주어진 수명을 때우다 죽어나갈 수는 있다.


문제는 대다수의 인간이 더 이상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한 문제는 다수의 대중이 돈벌이가 가능한 선택받은 소수의 착취 대상마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봉건시대의 선택받은 자는 다수의 노동력이 필요했고, 전쟁의 시대엔 아무리 못해도 총알받이를 할 인력 역시 필요는 했다. 산업화 이후 시장에서 개인의 영향력은 거대 기업에 비할바 아니었으나 어찌 됐든 우리는 소비자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만든 물건을 사줄 '사람'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서서히 착취당하는 역할마저 잃게 된다. 인간이 기업의 물건을 사지 않아도 기업은 수익을 창출한다. 인공지능이 사용하면 그만이다. 경제 성장의 톱니바퀴에서 인간의 입지는 쏜쌀같이 종적을 감추고 있다.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4차 산업혁명은 그야말로 완전한 자유시대의 도래요 축복이지만,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를 근간으로 건립된 세계의 구성원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다. 변화의 공을 던지는 주체는 인간인데 그 공이 어디로 어떻게 날아갈지는 그 어떤 인간도 장담하지 못한다. 확실한 건 인간이 변화의 공을 이미 던졌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


과거의 러다이트 운동을 현명하다 여기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유래 없이 촘촘한 통신망의 세계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에 휩싸여 우리야 말로 주변의 기계를 다 때려 부수고 싶어 질지 모른다. 과거처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낙관론은 무책임하다. 혹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인력으로 거듭나도록 교육시키면 된다는 의견도 가혹하다. 인공지능도 거듭 빠르게 발전할 테고, 인간의 역할은 그에 발맞추어 빠르게 줄어들 테고, 그새 무용해진 인간들은 또 교육받지 않으면 영원히 무용해진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는데, 그 경향은 불행히도 나이를 먹을수록 더하다. 그리하여 죽는 순간까지 격변의 인생을 버틸 근력을 가지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한 호모 사피엔스는 괴롭다.


당장 코앞으로 도래한 이 미지의 기술은 다시금 보편기본소득제(UBI, Universal Basic Income) 논의에 불을 당기고 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본소득은 국가가 모두에게 권리로서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돈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보편기본소득제는 정부가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들과 기업들에 세금을 물려서 그 돈을 모든 개인에게 기본 필요를 충당할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빈곤층에는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할 테고,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구상이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보편기본소득의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두 주요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할 일이 사라지고, '삶의 의미'를 잃게 되면서 약물과 포르노 소비가 증가하고 현실감각을 상실해 모두가 미쳐갑니다.

2. 사람들은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단순 반복 업무에 얽매일 필요가 사라져 창의력, 기업가 정신이 증대되고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포브스, 보편기본소득: 로봇의 노예 혹은 진정한 자유.


언뜻 보수정당의 극심한 반대를 예상하지만 미국에서 보편기본소득제는 이미 초당적 지지를 얻고 있다. 심지어 슈퍼리치들을 중심으로 해당 제도의 필요성이 적극 제기되고 있다. 보편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도, 정책도 없다. 물론 윤리적인 죄책감도 상당 부분 사라진다. 모두를 위한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번다는 이유로 사회적 불평등에 도덕적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 또 보편기본소득은 능력 만능주의 시스템에도 잘 들어맞는다. 모두를 보편적으로 지원하면 삼엄한 경쟁의 우승자들-초거액자산가-은 그들의 감각적 능력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믿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보편기본소득을 두 팔 들어 환영한다. 그들의 부(富)가 본인의 특별한 능력에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라는 이야기에 철석같이 들어맞기에.'

(더 뉴요커, 보편기본소득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인가?)


많은 이들이 보편기본소득제 도입의 정당성, 그리고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지지하는 배경은 각기 다른만큼 지급될 소득의 수준, 속도, 재정 마련 방안 등에 대한 합의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거저먹어본 역사가 없고, 그런 사례는 미래에도 영원히 없을 것이 자명하다. 노예제, 신분제, 인종차별, 성차별을 해소하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진정 보편적으로 누리기 위한 싸움은 길고 힘들었다. 물론, 세계의 일부는 여전히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방글라데시만 해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시 모두가 차별 없이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라고 설명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기본소득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 세대는 또다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분명 그럴 것이다.


여전히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다수의 나라들은 고기술 산업을 영위하는 국가에 저임금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느려도 착실히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AI는 틀림없이 저임금 노동자에게 보다 신속하고 확실하게 절망을 선사할 텐데, 선진국이 더 이상 이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지기 전에 부디 이들 국가가 고기술 산업 체제로 전환되길 간절히 바란다. 자국의 보호로 회귀하는 세계 추세를 미루어볼 때 유발 하라리 교수의 아래 예언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아마존과 구글이 미국 내 사업을 대가로 납부한 세금이 펜실베이니아의 실직 광부와 뉴욕의 실직 택시기사를 위한 급료나 무료 서비스 지급에 쓰이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뒷간 같은 국가들'이라 부른 나라의 실직 국민을 지원하기 위해 이 세금을 송금하는 데에도 과연 미국의 유권자들이 동의할까? 그럴 거라고 믿느니 차라리 산타클로스와 부활절 토끼가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믿는 편이 낫다.'


이 고구마 백개를 우유 없이 꾸역꾸역 먹은 것 같은 답답한 미래전망.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나아가야 할 길은 공교롭게도「유토피아」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가로지르는, 그리하여 16세기와 21세기를 가로지르는 공통의 축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 자만에 대한 경계.

용감하면 무식하다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굉장히 복잡해짐에 따라 별 의미 없던 내 행동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일례로 내가 투자한 기업이 환경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오염시키는 일들이 만연하다. '사실을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도와 무관하게 잘못된 일에 연루될 수 있다.'


'민족과 종교, 문화 간의 긴장이 악화되는 원인은 나의 민족, 나의 종교, 나의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며, 따라서 나의 이익이 다른 누구의 이익이나 전체 인류의 이익보다 앞서야 한다는 자만심 때문이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토피아」는 다음과 같이 자만심을 정의한다. '자만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으로 자신의 장점을 측정합니다. 만약 자기가 경멸하면서 군림할 비참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만은 자기를 여신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여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만의 행운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대조될 때 비로소 눈부시게 빛나며, 자만의 부는 다른 사람들의 빈곤을 고통스럽고 애타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토머스 모어 선생도, 유발 하라리 선생도 자만이라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같지만 그저 다른 나라에 산다는 이유로 우리가 얼마나 잔인하고 철저하게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자만이 얼마나 부끄러운 감정인지 호소력 짙게 논변한다.


결국에는 여태 그랬듯, 다시 믿을 건 인간의 협력과 공감능력뿐인가 보다.


국내 현안 해결이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직면할 문제는 전 지구적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총체적 난국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당장에 기후 문제만 떠올려도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우리끼리 아무리 난리를 쳐도 희뿌연 하늘이 개일 턱이 없다. 중국과 인접 국가들이 다 함께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거침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지구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진정으로 윤택하게 만들길 진심으로 바란다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들이미는 역지사지 카드.

'뒷간 같은 국가들'을 나 몰라라 한다면, 조만간 내가 사는 동네 역시 '뒷간 같은' 동네라 명명되어 소외되고 버려지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다시 한번 들이미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카드.


자본시장에서 safe haven은 금, 미국 국채, 미 달러 등의 안전자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역시 투자할 여력이 있는 소수의 자산가가 누리는 haven(안식처)에 불과하다.


다음 시대는 만인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free money(공돈)를 보장받는 만인의 haven이길.


+ 오늘 아침 신문을 읽다, 어젯밤에 발행한 이 글과 유사한 기고가 있어 반갑고 뿌듯한 마음에 공유.

그리고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을 끝으로 정말 이 기나긴 글을 기필코 마무리하겠습니다.

맑은 가을의 아침을 열기에 참 좋은 곡이라 생각하지만 왜 벌써 겨울이죠?

♪Eugene Ciero 연주의 Tchaikovsky: Chanson Napolitaine.


참고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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