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 A. L. Huxley, 《Brave New World》
디스토피아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위협이 꽤나 매혹적인 모양이다. 인류가 지구에서 선점한 제왕적 위치를 제 손으로 직접 무생물에게 바치는 재앙적 미래 전망. 무지로 인한 공포심을 툭툭 건드려 돈 좀 벌어보려는 관련 도서와 전시들이 쏟아진다. 물론, 인간을 무지로부터 구제하려는 선한 의도 역시 전혀 없다고 볼 순 없지만. (누군가의 선의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피해 본다.)
인공지능 시대의 대비책을 제시하겠단 호기로운 제목의 책들이 즐비하지만 읽을 일은 소원하다. 아무'말'도 삼단논법만 따르면 꽤나 설득력을 발휘하듯, 닥치지 않은 미래를 그리는 그 모든 예상이-그 수준의 차이는 실로 다양하여 어느 것은 논리적인 예측일 테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전망'일 수밖에 없기에 그 어떤 신박한 해결책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실제 사용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멋진 신세계》라는 타이틀로 진행되고 있는 서울 사진 축제는 다녀와서 이 글을 쓰려 벼르다 11월의 북프터 글을 올리지 못했는데, 컨디션 난조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 중이라 차일피일 미룰 수 없어 우선 글을 쓰고 다녀오기로 한다.
그 유명한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작 《멋진 신세계》는 경악스러운 미래상이다. 그 어떤 대비책도 없다.
처음 읽었을 때, '두 번은 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린 미래의 질서는 현재의 가치와 상식으로는 저급하고, 어느 모로도 구원할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 읽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웠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또 등장!)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공상과학소설이 우리 시대에 미치는 영향력을 설명하며 헉슬리의 천재성을 찬양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이 책을 펼쳤다.
조지 오웰의 1949년작 《1984》가 비교적 거북하지 않은 이유는 빅브라더의 세상이 멋지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사실을 지각한 인간이 그 세계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고민하는 이가 있고, 이를 적발하려 애쓰는 정부 조직이 있다. 즉, 계몽된 인간의 수가 상당함을 의미한다.
헉슬리의 세계 국가는 보카노프스키 법에 따라 감마, 델타, 엡실론, 알파, 베타 계급으로 인간을 차등적으로 배양하여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인 '공유·균등·안정'의 시대를 구축했다. 난자를 냉각시켜 발육을 억제시키는 방법을 통해 계급별로 필요한 인간을 배양하고 세계 인구를 적절히 조절한다.
"아흔여섯 명의 일란성쌍생아들이 아흔여섯 개의 동일한 기계를 조작하는 거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유, 균등, 안정이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한히 보카노프스키 과정을 지속시킬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머리를 썩이는 저출생이니, 실업률이니 하는 답도 없는 문제는 애초에 발생 가능성이 제로다.
이토록 안정적인 시대라니.
과거의 신분제는 비인간적인 삶으로 불행했던 우리의 혁명으로 철폐됐으나, 헉슬리의 세계 국가에는 혁명을 주도할 불만의 주체가 없다.
"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산소를 조금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일 먼저 침범당하는 기관은 두뇌였다. 다음에는 골격이다. 통상 산소공급량의 70퍼센트만 공급하면 난쟁이가 된다. 70퍼센트 이하로 하면 눈이 없는 괴물이 된다. "그러나 엡실론 계급에게는 인간적인 지성이 필요치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 계급 체제는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지속된다.
이토록 안정적인 시대라니.
모두의 행복한 일생을 위해 개인의 외모, 운명, 선호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구성하는 그 모든 요소가 멋지게 통제된다. 그리하여 만인은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개인의 운명은 멋진 신세계가 멋지게 결정하고, 그리하여 세계는 어떤 문제도 없이 멋지게 유지된다.
이토록 안정적인 시대라니.
모두가 이토록 행복하기만 한 멋진 신세계에 어찌 된 일인지 불행을 경험하는 3인이 등장한다.
우선, 버나드 마르크스. 그는 알파 플러스 계급의 심리학자다. 그러나 버나드의 육체는-아마 태아 배양 과정상의 실수로-알파 계급의 표준치보다 열등하여 감마급의 평균 체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육체적 결함에 의한 열등의식 때문에 그는 쭉 불행하고, 고독하다.
다음으로, 헬름홀츠 왓슨. 알파 플러스 계급의 강사로 지나치게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별나게 월등한 지적능력이 그의 자의식을 과도하게 향상시키는 바람에 고독하다.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자신이 '단독의 개인이라는 자각'을 한다는 공통점을 매개로 우정을 쌓는다. 버나드는 할 수만 있다면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의식을 잊은 채 보통의 알파 플러스 계급이 의례 가지는 사회적 우월성을 자연스레 영위하고 싶다. 헬름홀츠는 자기 연민 그 이상으로 발현되지 못하는 버나드의 자의식을 동정한다.
마지막으로, 문명이 미치지 않는 보호구역에서 자연적인 방법에 의하여 태어난 존이 있다.
존은 베타 계급인 린다와 버나드의 상사인 토마스의 아들이다. 오래전 린다는 토마스와 보호구역 근처로 여행을 왔고, 산책을 하다 절벽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다쳤다. 그녀는 교육받은 대로 확실히 피임했으나 무슨 영문인지 임신했고, 그렇게 인디언 부족이 거주하는 보호구역에서 백인의 잘생긴 존이 태어났다.
문명의 상식에 의하면 출산은 철저하게 수치스럽고 경멸스러운 부도덕의 상징이라 입에 담는 것도 불순하다. 해서, 린다는 보호구역에 정착한다.
한편 모두가 만나고 싶어 하는 희귀한 야만인-이지만 잘생긴-존과 함께 돌아온 버나드는 존 영접권을 빌미로 의기양양해져 평생 받은 설욕과 굴욕을 보상받으려 발버둥 친다. 관심 구걸에 가깝다.
세계 국가의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는 자신을 단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독특하고 개별적인 인격체로 인식하는 3인을 퇴출시킨다.
그리하여 고독하고 불행한 자는 온데간데없고, 그리하여 세계는 어떤 문제도 없이 멋지게 유지된다.
세계 국가는 앞으로도 쭉 태평천하다.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 않는 세계 국가에서 호기심 충족을 위한 구경거리로 그 존재를 인정받는, 현재의 우리를 상징하는 존은 고통받는다.
가족 간의 사랑, 순결, 일부일처제를 신봉하는 존은 이 모든 것을 조롱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와 권리를 마지막으로 행사한다.
얇은 책인데도 헉슬리가 구현한 세계 국가의 가치관과 운영 메커니즘을 소개하려니 인용이 많아져 내용 소개가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다.(주요 스토리 라인은 거의 요약 않았다.)
셰익스피어를 잘 안다면 존의 내면을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로만 기억하는 본인의 경우에도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아 그 당시 레오는 정말 레전설. 사진 첨부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니 알고 나면 더 풍부한 감상문을 남길 수 있을 테지만.(이미 충분히 길어 여기까지 읽는 사람도 아마 나뿐일 텐데, 더 길어지면 나조차도 힘들다.)
《멋진 신세계》를 구글링 하면 헉슬리가 인용한 셰익스피어 이야기 속 인물들을 통해 존을 분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뭣도 모르는 본인이 존을 단순히 일축하자면, 어제의 인간-즉, 현재의 우리-이 고귀하다 믿는 가치-'신',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를 여전히 받드는 괴짜 정도가 될 것이다.
끔찍하여 소름 끼치기까지 하는 세계관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비위에 거슬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신경 쓰인 내용은 언어와 어휘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나타난 에피소드다.
존은 어머니인 린다와 성관계를 가지는 포페가 싫다. 우연히 읽게 된 《햄릿》의 문장과 언어가 가진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런 강렬한 언어가 머릿속에 들어오면서부터 존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전에 없이 깊어지고, 그 종류도 전에 없이 확대된다.
아니, 기름때 묻은 침대의 땀냄새
진동하는 속에서 폭싹 썩은 오물에 잠겨
더러운 돼지와 달콤한 이야기와
욕정을 나누다니... 《햄릿》 3막 4장 중에서
야릇한 언어가 그의 의식 속을 휘감았다. 천둥소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언어들은 진동했다. 겨우 반밖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린다에 대해서도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주문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린다와 포페에 관하여.
그런데 이제까지 그는 포페를 진실한 의미에서 증오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꼈다. 그가 얼마나 그를 증오하는지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를 증오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어휘가 있었다.
또한 그 어휘가 그의 증오를 보다 현실적인 실체로 만들었고 심지어 포페를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 형상화시켰다.
언어를 익힘으로써 진정한 감정을 느끼게 된 존을 보며 최근, 너도 나도 새삼스레 젠더 평등의 관점에서 언어의 문제를 열렬히 논하는 까닭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래는 성평등 언어 사전의 내용이다.
- 총각은 처녀작을 만들 수 없나? 처음을 뜻하는 의미로 '처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성차별이다.
- 남직원, 남교수, 남비서, 남의사 같은 호칭은 없다. 직업 가진 여성에게 '여'라는 성별을 표시하는 것은 성차별이다.
- 사회문제인 '저출산' 또한 인구문제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린다는 이유로 '저출생'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
- 남편 집안은 '시댁'으로 높여 칭하고, 아내 집안은 '처가'로 낮혀 칭한다.
- 아빠는 유모차를 끌 수 없는 걸까? 어미 모(母)를 사용하는 대신 아이 아(兒)를 사용하여 유아차라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정말 별 뜻 없이 사용해온 어휘가 왜 그런 표현을 가진 건지,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나니 생활 전반 곳곳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던 젠더 차별이 일순 도드라진다.
나 또한 그런 차별을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성차별적 언어와 어휘들을 평생 거리낌 없이 써왔다.
얼마 전, 엄마는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위해 상담원과 통화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상담원을 자연스레 "언니"라 칭했다. 문득, 남자 상담원을 "오빠"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서비스업 종사자가 가장 선호하는 호칭은 언니도, 이모도, 아줌마도, 삼촌도, 아저씨도 아닌 '저기요'였다.
'처녀(女) 작'이니, '유모(母) 차'니 하는 단어들은 그저 예전부터 써오던 말에 불과하고, 여성을 차별하려는 속내는 전혀 없다고 치부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여태 아무 문제없이 잘들 지냈는데 왜 이제 와서 난리냐며, 왜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냐며 못마땅할 수도 있다.
어떠한 언어도 익히지 못한 인간이 사고하는 생각은 원초적 본능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 개인의 가치관, 이러한 다수의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 공동체의 질서 역시 그 언어의 한계에 필연적으로 구속된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국어로만 사고할 수 있을 뿐이고, 고로 우리의 사고는 한국어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여성이 일반적으로 더 많은 양의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불균형한 사회에 큰 특이성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방관해왔단 사실을 인정한다.(독박 육아, 독박 살림은 문제라 여겼지만.)
남성이 일반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책임지는 불균형한 사회 역시 그러려니 여겨왔단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미안해 모두들!)
분노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 그제야 포페를 진정으로 증오할 수 있게 된 존을 떠올리며 '어휘의 마력'이 이토록 '강렬'하단 사실을 되새긴다.
진정한 젠더 평등을 위해 ‘자나 깨나 입조심’을 되새긴다.
성평등 언어를 구사하면서, 진정으로 성평등적인 사고를 하게되길.
그리하여 조금씩, 천천히라도 좋으니 젠더 갈등이 확실히 사라지길.
돌고 돌아 드디어 본론이자 결론.
제군들의 생활을 감정적으로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 여하한 수고도 아낀 적이 없었다-될 수 있는 한 어떤 감정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포드님의 은혜로 세상은 태평천하로소이다.
'불쾌감을 안겨주는 것이면 참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제거'해 버리는 참 멋진 신세계가 더욱더 편안한 생활, 더욱더 안락한 삶을 꿈꾸는 우리의 종착지가 되진 않을까 괜스레 불쾌하다.
어떤 감정도 갖지 못한 채 단지 세계 국가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
그렇게 불행이 통째로 박멸되었을 때, 불행의 반대인 행복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헉슬리의 세계 국가에서 통용되는 행복은 지금의 우리가 느끼고, 바라고, 목표하는 행복과는 현저히 다른 그 무언가일 것이다. 아마 원초적인 본능의 충족, 그저 쾌락에 불과하지 않을까?
불행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기쁨으로 가슴 벅차 눈물 흘릴 일 역시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하여 '신',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하는 존과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세계의 태평천하를 위해 필요한 요건들을 끝없는 세뇌탓에 마치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 진심으로 믿는다. 일생을 내가 아닌 그저 사회의 일원으로서만 살아야 하는 헉슬리의 미래는 싫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게 확실히 결정되어있는 미래보다, 되려 모든 게 불확실한 《어제의 세계》를 바란다.
이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 비로소 나도, 시련은 사람을 자극하고, 박해는 사람을 굳세게 만들며, 고독으로 파괴당하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사람을 드높여 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의 모든 본질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식도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직 자신의 운명을 통해 배우는 것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 모든 권리를 가질 때 인간은 비로소 존엄할 수 있다.
모두가 존엄한 삶을 사는 사회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는 되려 《어제의 세계》를 바란다.
1, 2차 세계 대전 전, 슈테판 츠바이크가 꿈꾸던-전 인류가 어떠한 구분도, 차별도 없이 자유를 향유하는-세계를 꿈꾼다.
우리는 아직 만인이 그 모든 권리를 완벽히 누리는 세계를 이루지 못했으나, 그러한 사회가 정의롭다는 데에는 뜻을 함께한다.(내심의 의사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그런 척을 한다는 건 다수가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방증이다.)
과거와 같이 이기심 때문에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세계를 경계하는 한편(세계 대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의 결정권을 사수하여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는 그저 단순한 공상으로 영원히 남겨야 한다.
바라는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 모든 것을 자유로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마땅히 누리는 오늘의 시대가 옳은 방향으로 향해있다 믿고 싶다.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는 종종, 그리고 자주 불행하지만, 적어도 때때로 소소하게는 확실히 행복하다.
점차 더 많은 이들이,
종국에는 만인이,
소소할지언정 확실히 더 자주, 행복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