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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l 27. 2019

47. 선호(選好)에 관한 생각.

7월. 무더위를 느낄 겨를 없이 도서관의 공기는 매섭게 시릴뿐. 왜 냉방 설정온도가 무려 22도까지 떨어져야는지. 두터운 후드에 털 담요를 휘감고 앉아 몸을 부르르 떨어 열기를 만들어본다. 많은 학생들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인데 그런 시원한 옷차림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다. 닭살이 오돌톨.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추위에 대한 그들의 강인함에 숙연해지고 며칠 전 비가 많이 오던 밤 외할머니와의 통화내용이 떠올라 아주 재미있는 기분이 된다. 다짜고짜 나이를 물으시더니 네가 도대체 언제 그렇게 늙어버렸냐셨지. 그러게요 할머니. 제가 어쩌다 도대체 이렇게 늙어버렸을까요. 왜 모든 인간은 앞으로 앞으로 늙을 일 밖에 없는 건지 안타깝고 슬프다.


소녀감성의 동기들은 지나가는 고양이에도 금세 두 볼이 발그레. 사랑스러워 보이려 일부러 그러나 했는데, 아닌 것 같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학부 때의 난 꽤나 그런 척을 일삼았더랬는데.

그저 나보다 투명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진심 어린 감정까지 품는 따스한 사람들이다. 동물을 좋아 않는 나는 두 발짝 물러설 뿐이고. 실은 언제나 두 발짝 물러설 뿐이다. 그 무엇도 그다지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게 없는 쪽인지, 아님 뭘 좋아하긴 하는데 모르는 건지 조차 알 수 없고, 그저 멍청한 쪽일까.


초등학교 2학년때, 모든 여자애들이 한 명의 남자아이를 좋아했다. 빠른 년생인 나는 고작 8살일 뿐이었는데, 누굴 좋아할 수도 있었다니. 돌이켜보면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조숙하다. 시야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조그만 꼬맹이들이 품은 열정적인 연정이란 사뭇 진지했고 급기야는 만인의 연인이 된 그에 관해 그를 사모하는 만인은 교환일기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때도 난 모두가 좋다 하니 좋아 보이고, 좋아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역시나 멍청한 쪽일까. 대략 20년 전, 만인의 연인이던 그와는 인별 친구인데 그는 모르는 그의 전성기는 분명 그 시절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선호를 가지는 일.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오롯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내 선호를 파악하긴 어렵다. 진심을 솎아내어 주변 사람을 따라 좋아하는 일 없이, 자신의 취향과 선호가 확실해지면 더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시간들을 쌓으며 나이를 조금은 덜 헛먹을 수 있겠지.


클래식을 좋아하는 동기가 있다. 나는 그 친구가 음악에 품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 꽤나 감격했는데, 그 대상이 클래식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어느 것에라도 품을 수 있는 이가 현실에, 바로 옆에, 실제 한단 그 사실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학기 초 모두와 함께 벚꽃을 보고 돌아오던 길, 오늘 같은 날 잘 어울리는 곡이라며 Ravel의 La Valse를 차 안에서 조심히 튼 그는, 이후에도 종종 때때에 어울리는 곡을 모두에게 공유해주곤 했다. 나는 Eugen Cicero가 연주하는 재즈 버전의 클래식을 좋아해서 몇 년째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있는데도 크게 관심이나 애정은 없어 그게 무슨 곡인지도 모르다가 아주 가끔 동기의 추천곡이 귀에 익어 들춰보면 그제서야 몇 년을 들어오던 곡 이름을 알게 됐다.

잘하든 못하든 예술을 하면 영혼이 성장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르세요.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세요. 이야기를 하세요.
커트 보니것,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항상 옳은 게 거의 없는데 클래식은 항상 옳다는 그는, 맛없는 음식도 클래식을 들으며 먹으면 맛있고,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음악을 들으면 곧장 차분해지고, 부당하고 힘든 일을 겪어도 음악을 들으면 이겨낼 수 있다 했다.

아,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토록 강인하고 그리하여 틀림없이 아름답다. 무슨 일이 어디서 어떻게 덮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그는 실컷 행복할 수 있지 싶다.


단단한 그가 부러워 어떻게 클래식을 발견했나 냉큼 묻는다. 내심의 갈증인 인생에서 없어선 안될, 평생을 사랑할 요소를 어찌 찾았나에 대한 해답을 기대하며. 아주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좋아했단 다소 맥 빠지는 대답이 돌아온다. 써먹을 수가 없다. 이미 꽤나 늙어버린데다, 순수히 뭘 좋아하는 법을 모른단 말야. 약간의 흥미나 관심에도 곧장 효율성과 경제성부터 따져 들어가는 남루한 마음이 단단히 버티고 선다.


강인하고 용감한 그는 선호에 확신을 갖고자 청소년 시절 그 모든 장르의 음악에 심취하는 시간을 충분히 또 충실히 보냈다. 대학 졸업 후 2년의 인생을 평생을 고민하고 한편으론 염원해온 예술활동에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렇게 희열을, 또 심연의 나락을 오간 끝에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인생이 더 풍부해진 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해보겠단 소결을 내렸단다.


어쨌든 지금의 그는 클래식이 (그에게만큼은) 정답이라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오랜 고민 끝에 몸소 괴로움과 희열을 겪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밀하게 쌓았기에 그 어떤 대가와도 기죽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단 말에 경외심이.

그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관해 이토록 부끄럼 없이 떳떳한 인간이라니. 그리고 곧 부러움이, 또 곧장 부끄러움이. 얼굴이 화끈하다.


작년 말부터,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라는 책에 빠져있는데, 문학과 음악, 미술 그리고 세계대전 前의 세계인 '어제의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한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과 공식적인 업적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사적인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글 덕에 '선천적인 성향'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 자신이 당대에 영향력 있는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 역시 열렬한 사랑의 마음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 우리는 모두 우리들을 그 날개에 태우고 있는 우리 시대를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럽을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철도원들이 그들의 동지들을 가축처럼 전선으로 실어 보내느니 차라리 철로를 폭파하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식들과 남편들을 인간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마신의 제물로 바치는 것을 거절할 부인들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유럽의 정신적인 힘과 도덕적인 힘은 최후의 순간에는 승리를 알리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했다. 우리들 공통의 이상주의, 진보에 기초를 둔 우리의 낙관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공통의 위험을 판단하지 못하게 했고 경시하게 했다.'


적어도, 본인에게 중요한 그 어떤 것만큼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선호를 가지는 것.


무언가를 이토록 사랑하는 마음을 우러러보는 까닭은 이것이 그들의 탁월한 감수성에 대한 징표라는 생각에서다. 많은 이들의 눈에 사소하게만 비칠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열렬한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보지 않는 세계의 곳곳에 발을 멈추고 시야를 내줄테지 싶어.

슈테판 츠바이크의 탁월히도 예민한 감수성은 그에게 성공을,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부조리와 비이성에 철저한 비통함을 그리하여 곱절의 내적 고통을 동시에 일으켰다. 사랑의 능력을 가진 모든 이가 세계를 향해 감수성을 발동시키진 않겠으나, 자신과 무관한 일에 절절히 아파하는 모든 이의 감수성이 두터울 거란 점에는 퍽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머나먼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문학가 슈테판 츠바이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윤동주만 떠올려도 그렇다.


그 모든 일에 절로 공감하는 예민한 감수성. 본인의 일에만 몰두 않고 주변을, 더 나아가 이 사회, 나라, 세계, 인류를 넘어 동물들의 안위에 마음이 동하는 것.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아름다운 내심.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황현산「밤이 선생이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팠다.

인생을 살아냄에 있어 꽤나 떳떳한 지표가 될 거라 퍽 뿌듯하고 자랑스런 마음으로 믿어왔는데  똑같은 인생을 살았데도 그릇 크기에 따라 누군가는 후회하고, 누군가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었다 만족할 수도 있단 단순한 사실에 아차. 자신의 그릇이 꽤나 크다 자만했던 듯싶다. 이토록 높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켰다면 하늘에 우러러도 한점 부끄럼 없을 수 있다 생각한 그 오만이야말로 본인의 미천한 그릇을 여실히 방증하고, 나는 또 부끄럽다.


그리하여 사람의 그릇이란 타고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으로 자꾸만 귀결된다. 타고나길 자신만을 사랑하는 인간인 듯하여 자꾸만, 자꾸만, 부끄럽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기에, 그릇이 고작 자신만을 겨우 담는 크기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내가 행하는 그 모든 친절과 선행은 그저 내 배를 채우기 위함임을. 누군가의 끔찍한 고통이 언제나 나의 보잘것없는 사생활보다 뒷전이 되고 마는 나의 미천한 감수성에 기도 안찬다. 쯧쯧.


그래서 자꾸만 부끄럽기만 하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프다.

다른 곳의 일에도 쉽사리 저려오는 마음을 품고 싶다.

나뿐 아니라 타인을, 사회를, 세계를, 인류를 넘어 동물까지 품는 그릇을.


나보다 고작 3일 먼저 태어난 클래식을 좋아하는 동기는 여지껏 무려 1,000시간을 봉사활동에 썼다. 고작 3일 늦게 태어난 나는 몇 번 기웃거리다 만통에 남을 돕는 일에는 지난 평생간 24시간도 채 쓰지 않은채 혼자 잘먹고 잘살았다. 남을 위해 쓰는 시간을 희생이라 치부한 것이 분명하고, 인색하고 메말랐다.


동기는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만큼 마음속 깊이 행복해지는 일도 없다 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와,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염원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여기 있다.  나는 어쩌면 질투하는지도 모르겠다. 옹색한 그릇은 어쩔 수가 없다.


또다시,

자꾸만, 자꾸만 부끄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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