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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Jun 24. 2019

46. not-enough.

never enough.

한 달에 한 번은 꼭 쓰려 노력하던 이 글을 쓸 시간과 여유가 없을 만큼 꽤 바쁘게 보낸 지난 2개월간 나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 중, 딱히 기록으로 남길만한 특별난 일이 없다.

기말고사는 끝이 났고 긴긴 방학이 시작되었건만, 당장 내일부터 공부해도 부족할 판이라 오늘 중으로 발행할 글의 실마리가 어느 정도는 풀려야 할터인데, 몇 분째 멍청한 표정으로 줄창 멍만.


이마만큼 오래간 기록을 남긴 바 없는데도, 핸드폰에 브런치 글 작성을 위해 남겨둔 메모가 단 한 줄도 없다는 사실은 퍽 생경하다. 내 인생에 대해 나눌 건덕지가 전연 없으므로, 주위에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지내는 내 인생이 얼마나 감사한지로 귀결되는 진부하고도 진실된 기록을 남긴다. 이 또한 결국은 다시 나로 귀결되는데,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러한 사고방식이 나의 치명적인 결점이란 점에는 다툼의 여지가 없다. 경의를 표하려는 위대한 이들은 못된 나로서는 평생을 걸쳐도 헤아리지 못할 깊고 깊은 마음을 품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자신과 타인의 중요성을 동일선상에 두고 결정한다. 이제나 저제나 모든 선택의 끝에선 본인만을 찾는 나 같은 쫌생이와는 격이 다른 인격체.


1.

태초에 내가 났고, 4년이 지난 다음 동생이 났다.

어릴 때 동생은 유별났더랬다. 내가 딱히 그녀가 유별났다 느낀 건 아니고, 어른들 말씀이 그랬다. 내겐 그런 판단 능력이 없던 때다. 불행히도 이마만큼 늙어버린 지금에도 그런 판단력은 터득치 못했는데 삶의 지혜란 그냥 나이만 먹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점은 날로 먹어지는 연령이 자꾸만 부끄러워지는 이유 중 하나다. 그제나 이제나 난 타인을 판단하는 능력도, 타인에 대한 관심도 없다.


어렸던 난 유달리 순했어서(unbelievable.) 동생이 반사적으로 좀 별스러워 보였나 싶기도 한데, 당시 동생은 아주 용한 한의사로부터 '꼴통'이란 공식 진단을 받은 전력도 있었으니 객관적으로도 꽤 부산스럽긴 했지 싶다. 지금은 누가 봐도 디즈니 프린세스처럼 반짝이는 요정 같은 외모의 소유자인 내 동생이지만 어릴 땐 꼭 만화 캐릭터가 현실세계에 툭 튀어나오면 얘 같을 거다 싶었다. 순정만화는 아니고. 아빠 피셜 미래소년 코난의 포비와 꼭 같았다나. 포비는 더우면 배를 훌렁훌렁 내놓고 아파트 단지를 활보하곤 했다. 팔자로 띡띡 그 당찬 걸음을 한 발씩 내딛으며. 웃음 짓지 않을 수 없는 기억의 한 조각.


4살 때 동생이 생겼는데, 4세의 인생에서 그 사건은 꽤나 큰 이벤트 일 수밖에 없을 테지만 서도 내겐 그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동생이 생긴 순간의 기쁨이나, 질투를 떠나 그 어떤 기억도 별로 없다. 왤까?


나는, 관심이 없었다. 엄마 피셜 난 동생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누구들처럼 막내에게 질투를 느끼지도, 큰 애정을 품지도 않았으니 기억에 남는 일이 없는 것일 테지. 사람이 사회성을 획득해나가며 성격은 차차 변하지만 본질적인 성향은 이렇게나 요지부동이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저 나로 사고하던 사(四) 세였고, 지금도 그저 나로만 사고하는 서른이다.


달라진 건 이제 그런 내가 탐탁지 않다는 점 정도이려나. 그저 나를 기준으로만 살고 싶지는 않아졌다. 그럼에도 정말 중요한 기로에선 본성은 여지없이 발휘되어 크게 거스를 수 없단 점은 두고두고 아쉽다. (이 또한 그저 자기변명인듯싶다.) 동생 이야기하려다 또 내 본성으로 빠지는 여지없음은 이 글에서도 발휘 중인데, 동생의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평생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동생에 대해 많은 걸 안다고 자부하진 못하겠다. 나처럼 그저 단순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한층, 아니 다층적으로 고차원 적인 존재다.

 

사고 회로가 본인 단 한 명에 그치는 것 아니라, 다수를 기준으로 운동한단 점에서 그녀는 이미 태생적으로 나보다 복잡하고, 현명하고, 성숙한 존재다. 나는 그저 4년간 그녀보다 더 많은 밥을 축냈을 뿐 ㅎㅎ.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때, 그리하여 부모님 모두 각자 인생에서 아주 고된 시간을 견디고 있을 때, 그들에게 평생을 사랑받고 보호받아온 나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했나. 나는 그때도 오직 내게 생긴 별것 아닌 생채기에만 온전히 집중했을 뿐이고, 감히 타인이라 구분 지을 수 없는 부모님이나 동생이 겪고 있었을 슬픔이나 고통은 짐작도 않았고, 당연히 그랬을 게 뻔한 일인데도 그들이 힘들 거란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조차 못했다.


이렇게 짧디 짧고 모지란 내가 그렇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때, 동생은 모두를 생각한다. 그래서 나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감정을 떠안은 채 몇 년을 보냈을 것이고, 나는 그녀가 어떻게 그 시간들을 지내왔는지 가늠할 수 없고, 그 당시 그들에 대한 기억은 또 다시 없다. 그저 나 자신은 견딜만했단 점만 기억할 뿐.


동생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 개개인은 결코 지금처럼 행복한 하루하루를 영위할 할 수 없었을 것임을 확신한다. 물론 나는 나만 생각하는 메마른 인격이니 그 나름의 범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지금의 행복과는 비교도 안될터. 그녀는 그녀에게 아마도 가장 소중한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운명을 이렇게나 행복하게 가꾸었다. 동생은 여태껏 끊임없이 본인의 시간과, 마음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다. 아빠를 살뜰히 챙기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리고, 엄마와 나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모두에 대해 그마만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일 테다. 그녀의 탄생은 우리 가족 모두의 인생을, 운명을, 형용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완벽하게 완벽한 그 어떤 것으로 탈 바꿔놓았다.


주어진 24시간, 그 모든 시간을 오롯이 나에게 쓰면서 그 마저도 부족해 잠을 줄여나가는 나는 마냥 철부지고.


이렇게 여러모로 부족한 난데, 평생 동안 정이 들어버린 인간인지라 사랑해 마지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생에게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태어났더니 나란 인간이 떡하니 언니라고 버티고 있는 걸 뭐. 내가 그녀에게 주는 사랑이, 그녀가 나에게 주는 사랑에 항상 뒤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분명 이기적인 내가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최대치를 동생에게 품고 있다. 내 그릇이 그녀보다 작아 나의 최대치가 그녀에게 못 미칠 따름이라 부끄러운 마음이다. 내가 나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되는 숭고한 마음을 품게 될 그릇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런 원대한 희망은 평생의 끝 그즈음에서나 가능성을 논해볼 수 있을 것 같고,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어도 내가 나 자신과 동생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길. 그리하여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생각하는 만큼 동생을 위하길.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진심으로 그런 언니가 되어주고 싶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사랑받아 마땅하나 나의 우주를 기준으로 두자면, 그중 누구보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을 단 한 사람 꼽으라면 내 동생일 것이므로.


나는 내가 죽고 그녀가 살 수 있다면 꽤나 큰 고민 없이 퍽 기꺼이 죽겠는데, 이 또한 그저 이기적인 마음에 기인한 것이란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 없이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말 그녀를 나만큼 생각한다면 아마 나는 기꺼이 죽지 못해야 할 것인데 말이야. 그녀가 나 없이 견뎌낼 시간들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선뜻 결정할 수 없어야 한다.

부지런히 나이 먹는 만큼, 부지런히 성숙해지길.

그리하여 아름다운 동생에 버금가는 떳떳한 언니가 되어줄 수 있길.


2.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으려나. 아마 힘들지 싶다. 모든 어머니가 위대하다지만 우리 엄마라서가 아니라 우리 엄마는 퍽 특별한 엄마다. 언제나, 모두나가 부러워들 하는 그런 엄마.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아름답고, 현명한데, 헌신적이고, 강인하며, 재미있고, 긍정적인 한편, 나를 믿어준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사랑할수록 그의 인생을 그의 손에만 온전히 맡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더 좋은 선택을 내리게끔 끼어들고 싶지 않을 리 없다. 더군다나 몇십 년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사랑해 마지않는 몇십 년이나 어린 자식에게 그 모든 선택을 직접 내리게끔 하는 일이란 얼마나 본능에 거스르는 일일지. 자식은 없지만, 동생을 떠올려보면 그 일이 참 이 세상 어떤 일보다 어려울 것이라 어렴풋 느낄 수 있다.


엄마도 동생과 마찬가지. 그녀의 사고 회로도 우리 모두를 기본값으로 하여 운영된다. 그들로서는 영 손해 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만 오로지 나를 기본값으로 한다. 정말이지 틀려먹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들의 혈육인 나만이 왜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건지. 그 점이 두고두고 아쉽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는 내가 아닌 동생에게 터놓는데 그건 아마 동생은 가족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인 반면 나는 나를 중심에 놓고 나아가는 사람이라 그럴 것이다. 점점 더 가족의 중요성을 깨우쳐가고는 있는데, 애초에 깨우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그렇게 본인만큼이나 소중해지는 사람이 자연스레 생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들과 태어날 때부터 끊어질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인연을 맺게 된 사실에. 아무리 용을 써도 부족하지만 나 또한 점점 더 그들의 아름다움에 가까워지길.


나는 (아마) 꽤 괜찮은 사람인데 그 누구라도 나만큼 모두에게 사랑받고, 원하는 것을 다 하며 살았다면 아무리 못해도 나만큼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딘가 뒤틀리거나 모두를 불편케 하는 사람들이 살면서 겪었던 결핍이나 부족함을 나 또한 겪었다면 나는 더하면 더 했지 그 모든 부조리를 딛고 아름다운 사람은커녕 지금의 나 정도로도 거듭나지 못했을게 뻔하다.


그리하여 그러한 결핍이나 부당함이 점점 줄기를 바라고 조금 더 많은 이가, 가능하다면 모두가, 나만큼 행복했음 한다. 그런 일을 하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의 일부를 '사용'하며 살고프다. '기여'한다는 표현은 가히 나란 사람을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느낌이 들어 '사용'으로 부리나케 고쳐본다. 내가 사는 사회가 조금 더 아름답길, 또 나라는 사람의 인생이 가치 있길 희망하는 그저 그런 이기적인 마음에 불과하므로.


나의 기막힌 운빨에 축배를. 나 역시 그들에게 받는 사랑을 꼭 되갚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나아가 이런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가득 넘치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을 잃지 않길, 그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보내길.

(결국 또 내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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