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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 도서관, 그리고 공연

by 안녕

사랑하는 유니,


창밖엔 어느덧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어. 덩굴 속에 숨어있던 장미꽃은 제 색을 선명히 드러내며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아니 이미 왔음을 알리고 있지. 우리는 산책 가는 길에, 때로는 병원 갔다 오는 버스 안에서 장미를 보며


"여름이 왔어!"


를 외치곤 했어. 그래, 여름이야. 벌써, 여름인 거야.


지금 막 잠이 든 너를 뒤로 하고 서재로 나온 엄마는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곤 네게 편지를 적기로 해.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사실 설거지도 안 했지만) 그래도 오늘의 감정과 생각을 지금 적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사람이 하는 생각이란 불완전한 것이어서 인간은 기록을 시작했잖아. 그 기록이 남고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고. 너와 나의 삶이 후대에 전해질 리 없지만 몇 달 후의 너에겐 전해질 것이 분명하니, 기록을 좋아하는 엄마는 너를 위해, 나를 위해 기록을 해보도록 한다!


우리의 요 며칠은 뜨거웠고, 차가웠고, 서늘했고 뭉클했지?


#. 8주간의 노력이 빛을 발한

뮤지컬 데뷔 축하해. 어떤 종류의 공연이든 처음이라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뮤지컬 배우가 꿈인 네가 생판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8주간 수업을 들으며 대본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연습한 후, 정식 무대에 오른 경험은 네게 큰 영감이 되어 네 마음 곳곳에 새겨질 것이라 믿어.


그저 토요일 1시부터 3시까지 네 수업을 밖에서 기다릴 뿐인 게 다였던 엄마도 그곳에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며 성장했거든. 그러니 2시간 동안 열심히 배우고 깨달은 너는, 얼마나 많이 느끼고 담았을까.


그 마음이 어제의 무대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어. 누구보다 반짝였던 나의 별이, 글쎄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잠깐 도착해 여행 중인 느낌이랄까. 20명의 아이들 중에 너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겠지?


뿌듯했어. 그리고 고마웠어. 이런 마음을 느끼게 해 주어서. 이럴 때 보면 엄마라는 걸 하길 참 잘했어.


축하해. 앞으로 네가 살아나갈 삶을 응원할게. :-)


#. 별이 네 곁에!?

다이소에서 우연히 별 접기 종이를 발견했어. 소싯적에 종이접기를 꽤나 잘하던 엄마는 사실 2년 전에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별 접기를 한 적이 있어. 옛날 생각나고 좋았는데, 요새 아이들은 별 접기 같은 걸 잘 모르는 눈치더라고.


무튼, 그 종이를 오랜만에 다시 보니 좋아서 1,000원을 들여 사 왔더랬지?


난생처음 보는 별 접기가 너는 너무 신기했나 봐.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만들어 보기를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어. 그거 사실 섬세하게 접어야 하는 거라서 쉽지가 않거든.


별사탕 같다며 먹으려고 하는 네 모습을 보며 엄마는 옛 생각에 잠겼어. 중학생 때, 겨울 방학을 앞두고 이거 많이 접었거든. 유리병 하나 사서 가득 담아 집에 두곤 했던 것 같아. 혹은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선물을 주려고 준비 중인 친구들을 도와주기도 했고.


그런 추억을 네게도 줄 수 있어서 기쁜데, 같이 만들려면 적어도 6년은 흘러야 할 것 같아.


#. 따뜻한 말은 어디로?

그래, 솔직히 말할게. 요새 우리는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을 건네고 속절없이 후회하며 사과하기를 반복해. 오늘 엄마가 진지하게 물었지.


"유니야. 요새 엄마한테 왜 그렇게 짜증을 내?"


진짜 궁금했어. 그런데 넌,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라.


근데 신기한 건 엄마도 마찬가지야. 나도 네가 하는 말이 어떨 때에는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나. 너는 여덟 살에 사춘기가 왔다고 말하는데 난 뭐지? 난 어른인데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건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 몇 번이고 벼락같이 화를 내고 후회하고, 자는 너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그 이상한 행동을 왜 반복하는 걸까.


엄마를 들여다볼 시간이 조금은 필요한 것 같아. 말은 오래도록 남아서 그 사람을 형성하는 양분이 되거든. 좋은 말을 반복해 들으면 긍정적인 마음이, 나쁜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 부정적인 마음이 드는 거라고 엄마는 믿어.


그러니 엄마의 말이 더 날 세워지기 전에 나를 들여다볼게.

그 답을 찾는다면,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자.



쓰다 보니 길어졌어.

원래는 짧고 굵게 쓰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아쉽다.


우리 서로에게 짜증도 내고 힘들었지만

오늘 그 더운, 29도의 날씨에 카트 끌고 도서관 가서 9권의 책을 빌린 것도 좋았고

마트 가서 소시지를 사 온 것도 좋았으며

너와 함께 메가 커피에 가서 음료를 산 것도 좋았어.


하루하루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겨서, 행복했어.


나가기 싫다면서 엄마 혼자 가라고 했던 네가 엄마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


"엄마와 추억을 쌓고 싶은데 나가기는 귀찮아서 고민이야."


이미 엄마와의 시간이 추억이 된다는 것을 전제한 네 말에

힘을 얻고, 다시금 엄마로서 행복을 채워.


누구보다 뜨겁게 한 주를 보낸 너를 응원해.

푹 자고, 좋은 꿈 꾸고,

우리 내일부터 4일 동안 엄마와 함께 가는

등굣길에


언제나처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엉뚱한 생각을 뻗어 나가며

그렇게 살아가자.


그게 우리 스타일이잖아?


그럼 이제 엄마 진짜 일 하러 갈게.


2025년 6월 8일 (일)

너를 사랑하는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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