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전 30분 - 기록의 시작

by 안녕


“이거, 네가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데?”

봉투 속에는 4년 전 아이들이 만든 시화집이 있었다. 노란 사무용 봉투에 들어있는 150장의 종이. 그 속엔 2021년 중학교 2학년을 가르시던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펼치는 순간, 마치 2021년으로 돌아가 아이들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로나로 한창, 두려움에 떨며 서로 만나 소통하던 그 시절로.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너무 사고를 쳐서 교무실에서 늘 회자되던 아이들이 아니라면,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그때는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가르치고 소통했던 우리였는데, 시간 속에 무뎌진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해마다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만나 애정을 듬뿍 주고 있지만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겨우 4년 전의 기억은 희미하고 흐릿해져 이제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곱씹던 하루를 기록하고 싶어졌다.

아이들에겐 잘 가르치는 선생님보단 저들을 잘 기억하고 기록해 주는 선생님으로 남고 싶어졌다.

가르치며 기록하는, 기록자로서의 삶.


너무 잘난 아이들은 내가 아녀도 많은 곳에 흔적을 남길 터였다.

생활기록부에 성적표에, 각종 수상대장에.


그래서 나는

배경처럼 존재하는 아이들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장 곁에서 묵묵히 돕는 민수

수업 시간에 말없이 판서를 받아 적는 지은

체육대회 때 스탠드에 앉아 누가보든 말든 목소리 터져라 응원하는 기영이.


깊이 알고 싶어 편지를 건넸고

종종 상담을 빙자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무실 앞 작은 공간, '안뜰'은 좋은 피난처가 되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에이드 한 잔, 초콜릿 두어 개면 우리는 충분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늦은 밤이 되면

그날의 일을 이곳저곳에 갈무리했다.

일기장에, 브런치에, 때로는 휴대폰 메모장에.


아이들을 기록하고 싶어 시작한 일은,

다 큰 어른이면서도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하나 마음속에 품고 사는 나를

성장하게 했다.


과거를 바라보는 내게 현재의 소중함을 알려준 것도,

두려움에 멈칫하는 내게 그까짓 거 한 번 도전해 보자고 말해준 것도,

모두 다 아이들이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어른이 뭐 별 건가.

마음속 어린아이를 얼마큼 드러내는지,

그 어린아이를 얼마나 숨길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닌가.


이 글은 14년째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국어 교사의 기록이지만

그 안에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하고 마음의 방안에 숨겨둔

그 시절의 나를 만나는 과정도 될 것이다.


기나긴 여정 끝에

당신도 나처럼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쓰기의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사람의 이야기라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

약간의 허구를 가미했다.



지금부터 이곳에 펼쳐질 이야기는, 어쩌면 당신도 겪었을, 이야기.



아마도. 분명히.




이제, 우리의 30분이 시작된다.


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