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이야기: 사진 한 장에서 길어 올린 소설 한 편
경찰서 구석 검은 방에 두 남자가 책상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있다. 그중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핸드폰 녹화버튼을 누르고 입을 뗀다.
“2025년 10월 4일 18시 28분 조사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조사관 제이슨 파커입니다.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진술하시는 내용은 기록 및 영상으로 남겨지며, 진술을 거부하실 권리가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진술은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귀하의 이름과 나이, 소속을 말씀해 주시죠.”
“주드 윌리엄, 41세, 현재는 무소속입니다.”
“쓰읍.. 그러면 과거에는 소속이 있으셨나요?”
“군인 장교였습니다.”
“음.. 가족관계는요?”
“아내와 아들 각각 한 명 있습니다.”
“나이는요?”
“아내는 39세, 아들은 8세입니다.”
“흠.. 네 좋습니다 윌리엄 씨. 그러면 고성방가 및 폭행 사건에 관련해서 질문하겠습니다.”
“크흠, 말이 이상하네요.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정당방위라고요.”
“네, 경위가 어떻게 되시죠?”
“아뇨, 말 돌리지 마시고요. 그 사람이 먼저 때려서 그런 거라고요.”
“그분과는 어떤 관계이시죠?”
“관계는 무슨 관계, 생판 남입니다. 남.”
“그분이 뭐라고 하셨죠?”
“요새 참 일이 안 풀려서 공원에서 술이나 한 잔 까고 있었는데, 갑자기 불쑥 와서는 제가 군인 망신 다 시킨다느니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제가 군인 망신이라뇨? 이거 보세요, 이거, 여기 쇄골에 총알 자국 보이시죠? 이게 제가 아프간 가서 맞은 겁니다.”
“.. 그곳에서의 일을 더 말씀해 주시죠.”
“뭐 전쟁터 얘기가 거기서 거기죠. 의기양양하게 사막을 건너고 있는데, 탕! 하더니 픽! 하고 옆에 있던 내 동료가 쓰러지지 뭡니까. 그 녀석은 저와 입대부터 같이 동고동락하던 사이였는데.. 쨌든 그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서 멍하니 서 있는데 우리 소대장님이 제 머리를 확 낚아채서 바닥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탕! 그 흔적은 여기, 제 쇄골에 남았죠.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모래바람이 들이닥쳐서 안전하게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 뒤로는 어떻게 됐죠?”
“하.. 그 뒤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죠. 집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여는데 아내가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더군요. 제 아들은 그 남자 어깨 위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자를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봤고요. 그런 화목한 가정의 얼굴이 저를 발견하더니 싹 굳었습니다. 저는 그 자식들을 무시하고 냉장고에서 술 한 병을 꺼내 뒤도 안 돌아보고 공원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고 있고요.”
“음.. 평소에 술을 많이 드시나요?”
“예? 별로 안 먹습니다. 돈도 없는데 뭘”
“그런가요.. 그러면.. 일단 이걸로 2025년 10월 4일 19시 52분, 조사 마칩니다.”
“이걸로 끝이요?”
“네 윌리엄 씨. 조사는 끝났습니다.”
“가면 되는 겁니까?”
“네.. 근데 혹시 술 한잔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 술이야 언제나 좋죠. 당신이 사는 거요?”
“그러죠.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로 갑시다.”
경찰서를 나와 10분 걸었을까.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술집 앞으로 도착했다. ‘덜거덕, 덜거덕.. 하하하’ 테이블은 모두 차있고 마침 바 두 자리가 남아있다. 제이슨과 주드는 그 자리를 차지한다. 바텐더는 그 둘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제이슨이 먼저 입을 뗀다.
“뭐 드실 거예요?”
“맥주, 2잔”
“그러면 저는 버번으로 하죠.”
“음, 그래.”
“그나저나.. 가족들과는 아직.. 그런.. 관계인가요?”
“그렇지.. 뭐.. 연락이 없어. 그래서 공원에 나와 있던 거야. 그 공원, 아내랑 아들이랑 자주 갔었거든.”
“아직 뵌 적은 한 번도 없고요?”
“그래,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어.”
“제가 찾아 드릴게요.”
“뭐라고?”
“찾아 드린다고요. 아내랑 아들. 그리고 그 남자”
“...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꽤 궁금해서요. 뒷이야기가.”
“....... 하... 미안하네. 옛날에 그 모습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괜찮습니다. 훌훌 털어놓아 보시죠”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 나에게 엉기던 귀여운 아들.. 여름에는 파릇파릇한 풀잎들이, 겨울에는 소복하게 쌓인 눈이 보이던 그 공원.. 내게 주말이란 그런 것이었어. 직업 때문에 가족들을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 달콤했던..”
“저도 가족이 있어서 그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그래, 가족.. 가족이라는 것은 참..”
“아내분 이름은 기억나세요?”
“글로리아. 글로리아 세인트 삭스. 켄터키 출신이고 25살쯤 나와 연애를 시작해서 그대로 결혼까지 이어졌지.”
“외모적인 특이사항은 없나요?”
“가장 최근 기억으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빨간 장발에 오른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어. 키는 대략 170cm 정도. 가장 좋아하는 색은 노란색이었어. 아마 지금은 여기, 뉴욕에 살고 있겠지.”
“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그때 바텐더가 이마에 땀 한 방울을 닦으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메뉴를 묻자 두 사람은 정해두었던 대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내 맥주 2잔과 버번위스키 한 잔이 그들 앞에 내어졌다. 이번에도 대화를 시작한 건 제이슨이었다.
“술맛이 어떠세요?”
“쓰지. 고소하고. 시원하고.”
“이유가 있나요? 쓰면서 고소하면서 시원한 이유가.”
“... 나는 가족을 사랑한 건 맞지만, 헌신적이지는 못했어. 그래서 그런 거지.”
“사랑한다는 게 충분히 헌신적인 거죠.”
“아니야.. 난 놀이공원 대신 집 앞 공원에만 아들을 데려간 걸 항상 후회해. 그것도 가끔이었다고.”
“그게 어디예요. 저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매번 주말에 자기만 하는데.”
“........ 그런 위로라도 받으니 고맙네.. 참 고마워...”
밤은 깊어져만 갔지만, 제이슨과 주드는 앉아있던 사람 중 가장 마지막으로 바를 떠났고 남은 자리엔 흰 거품만 남은 유리잔 2개와 한 입 마신듯한 버번 한 잔이 있었다. 제이슨은 주드에게 집에서 묵고 가라고 말했지만, 주드는 그저 공원으로 향했다. 제이슨의 아내는 진한 술 냄새와 함께 평소보다 더 깊은 포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은 다가왔다.
다음날, 제이슨은 출근하자마자 컴퓨터에서 켄터키 출신 39세 빨간 장발에 오른쪽 눈 아래에 점이 있는 글로리아를 찾고 있었다. 그 결과 조건에 맞는 글로리아는 총 13명이었다. 그들은 온 뉴욕에 퍼져있었고 제이슨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차에 올라탔다. 먼저 뉴욕 시내를 돌았지만 4번째 글로리아 부인까지 모두 허탕이었다. 그는 1번의 어리둥절한 표정과 3번의 짜증 섞인 표정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리고 5번째 글로리아 부인은 뉴욕 외가에 살고 있었다.
‘똑똑’
“안에 계십니까?”
“누구세요..?”
“저는 경찰관 제이슨 파커입니다.”
“네.. 그런데요?”
“혹시 부인 성함이 글로리아 맞나요?”
“네, 글로리아 삭스요.”
“음.. 혹시 실례되지만 전남편분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네? 전남편이요?...... 주드요. 주드 윌리엄.”
“아.. 저는.. 어.. 윌리엄 씨의.. 친구입니다.”
“친구요? 그 정도 나이는 아니신 것 같은데. 그나저나 그 사람 얘기는 왜 꺼내시는 거죠?”
“어제 윌리엄 씨를 만났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얘기를 모두 들었죠.”
“그러면 아실 텐데요. 그 사람이 무슨 사람인지?”
“네, 아주 가족에 헌신적인 사람이더군요.”
“.. 네? 그게 무슨 헛소리시죠?”
“헛소리요?”
“네. 헛소리요.”
“제가 누누이 윌리엄 씨는 아프간 참전 군인이시고 댁께서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워서..”
“네?! 뭐라고요? 바람이요?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확히 말씀을 해주시면..”
“그래요 그러죠. 어느 날 그이가 아프간 파병에서 돌아왔어요. 상반신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요. 쇄골에 총알을 맞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뒤로 매일, 매일, 온종일 술만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는 냉장고에 술이 없는 날에는 저와 제 아들을 폭행까지 했다고요.”
“..........”
“저도 당최 이해가 안 됐어요. 그 헌신적이고 완벽하던 남편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병원에 데려 가려고 하면 맞고, 집에 있으면 맞고... 안 맞는 때가 없었어요. 그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리고 그이는 제 부탁으로 접근금지 명령만 내려지고 끝났죠. 후속조치로 제 전담 경찰관이 배치되었고 그와 얘기하다 보니 참 잘 맞았어요. 그래서 그와 재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윌리엄이 이 사실을 알았는지 집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면서 소리쳤어요. 딴 놈이랑 바람났느냐고 말이에요. 다행이게도 마침 남편이 있었고 그 뒤로 여기 뉴욕 시외로 온 거죠.”
“진짜.. 인가요?”
“그래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의사 말로는 코르사코프라는 거래요.”
“그게 뭐죠?”
“알코올 중독 때문에 비타민 B가 부족해지고 뇌가 손상돼서 기억이 사라지는 거죠. 마치 타버린 필름처럼. 그리고 그 기억은 임의로 채우는 거예요. 당신에게 말했던 것 같이 말이에요.”
“.........”
“이제 이해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