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려서부터 미술 학원엘 다니고 싶었다.
엄마는 피아노 학원을 보냈지만 난 사실 피아노 치는 덴 큰 흥미가 없었다. 미술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팔에 찼던 토시와 앞치마마저도 부러웠다. 근사한 팔레트, 세련된 드로잉북. 모든 게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부를 신청한 것도 그저 옆 짝꿍이 그리는 수채화를 구경하는 게 좋아서였다. 물과 물감이 섞여 다채롭게 빛나는 색의 향연. 아, 거창하게 말하지 말고 그냥, 그 색감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팬톤 색상표를 보면 괜스레 마음이 평온해졌으며 누가 좋아하는 색이 무어냐 물으면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흔히 파란색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난 색상표의 모든 계열의 색을 좋아한다.) 모두가 예쁘고, 모두가 좋아서. 어느 하나 고르는 게 너무나 매정하게 느껴졌으므로.
열두 살부터 만화를 즐겨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색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따라 그리고 흉내 내며 그림을 그리며 사는 ‘나’를 꿈꿨다. 만화가가 되겠다던 나의 야심찬 꿈을 언니가 산산이 짓밟기 전까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재능은 없지만 관심이 많던 지라 교사가 되고 나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색연필, 도화지, 수채화 물감, 붓 등을 사다가 좁은 자취방에서 좋아하는 아이유 노래를 들으며 많이도 그려댔다.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연필 한 번 제대로 쥐지 못했던 나를 벗어던지고 그저 붓 가는 대로 편하게 그리니 제법 괜찮은 취미가 되었다.
학기 초가 되면 담임반 아이를 상담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림을 잘 그리는 녀석들에게는 꼭 따로 부탁을 했다.
- 선생님이, 종업식(졸업식) 때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게 바로 우리 반 애들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서 액자에 주는 거거든? 그거 네가 한 번 해줄래? 대신 완전 비밀! 끝까지 비밀이어야 해!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줍어하면서도 좋아했다. 그리고 나와 덜컥 약속을 하곤 끝내 작품을 완성하여 종업식 때 나와 함께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곤 했다. 순전히 그림이 좋은 아날로그식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아이디 어였달까.
가끔은 아이들 얼굴을 칠판이나 아이패드에 그려준 적이 있다. 아이들 특징을 살려 예쁘게(멋지게) 그려주면 그 순간 몰입하는 아이들이 귀엽고 좋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다. 허투루 관찰하지 않고 제대로 관찰해야만 보이는 것이 담기는 것. 그게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에게 글쓰기만큼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어릴 적 미술 선생님은 무서운 분이셨지만 학교에서 만난 동료로서의 미술선생님은 어딘가 나의 로망을 자극했다. 평범한 교실과 다르게 분리되어 있는 미술실도 멋있고, 그들만의 아우라는 나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고작 교과서와 분필만으로 정체성을 겨우 드러내야 하지만, 그들은 그저 존재자체로 ‘우와!’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남몰래 좋아했다.
H선생님과의 만남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4학년도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나는 H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작은 체구에 야리야리한 이미지와 다르게 똑 부러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유학기제를 운영하는 1학년 부장으로서 우리 학교로 발령받은 H선생님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드려야 했는데 이미 그는 자유학기의 대략적인 시스템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개설할 프로그램의 계획도 얼추 틀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영리하고 야무졌다. 난 그 모습이 신기했다. 나의 예전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못하고 항상 어리바리했던 것 같은데, 하며.
예상대로 그는 베테랑이었다. 1학년 아이들과의 수업에서도 큰 갈등이 없었다. (작년 1학년은 수업 중에 소소한 갈등이 많아 늘 수업 시간에 긴장을 하면서 복도를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아이들은 그를 좋아했고, 그의 수업을 좋아했다. 가끔 미술실을 가면 아이들이 조용히 작품 활동에 열중하는 것을 보며 혼자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우리 학교 시스템 자체가 교사의 업무가 너무 많고 학년 단위의 행사가 많아 같은 학년이 아니고서야 자주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1학년을 가르친 나와 1, 2학년을 가르친 H선생님은 교직원 회의가 아니고서야 만나기가 힘들다는 것.
친해지고 싶고, 소통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뭔가 먼저 다가가서
“샘~~~ 우리 커피 한 잔 할까요?”
하기엔 내가 이제 어린 후배가 거절하기 힘든 꼰대 선배가 된 것 같아 망설이게 됐다. 내가 벌써 햇수로 14년 차이니, 내가 뭘 하자고 하면 거절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못한 채 한 학기가 흘렀다.
그에게 한 번 더 반한 순간이 있다. 그건 바로 학기말이다. 자유학기제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기 때문에 과제 수행 정도에 따라 모든 성적을 서술형으로 기록해 준다. 어디에? 생활기록부에. 그런데 이 생활기록부가 법정 장부이면서 평생 사라지지 않기에 우리는 항상 학기말에 생활기록부를 꼼꼼히 점검한다. 오탈자와 비문(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문장 따위)을 검토하는데 이게 미칠 노릇이다. 한 반에 20명씩 다섯 반. 그러면 100명. 그 100명이 1학기에 이수한 프로그램이 최소 5개. 그러니까 총 500개 가까이 되는 서술형 평가 기록을 점검하는 것이다. 누가? 학년부장이자 자유학기제 담당인 내가.
그 작업이 고단하고 싫어 1학년이 싫었는데, 다시 하게 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내게 H 선생님은 그저 ‘빛’이었다. 왜냐고? 일단 글이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번역투는 하나도 없었으며 문장은 깔끔했다. 무엇보다 오탈자가 없었다. 한두 개 나올 법한 오탈자가 없으니 글을 읽고 점검하는 것이 무척 쉬었다. 1반부터 5반까지 읽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3년 동안 자유학기제 서술형 평가를 검토하면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했던 순간이랄까. 고마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엔 H선생님이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혼자 속으로 무척 많이 감사 인사를 표현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역시 쌤은 빛, 쌤은 천사... (나는 주접을 잘 떠는 것 같다. 참...)
그리고 올해가 되었다. 작년보다 힘들어 보이는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이렇다 할 기회가 없어 늘 바라만 보았다. 내가 보아도 유난히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이러다가 저 사람 쓰러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아마 작년과 전혀 다른 아이들의 기질, 성향 때문에 힘든 것 같았다. 내가 안다. 지금 2학년 아이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는지. 한 곳으로 수렴되지 않고 여러 곳으로 발산되는 아이들을 아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그저 식당에서 만날 때면
“힘내요 쌤.”
“괜찮아요? 내가 뭐 도울 게 없어요?”
하며 말을 건넬 뿐이었다. 그러면 그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괜찮아요. 부장님.”이라고만 말했다. (이럴 땐 내가 부장님인 게 싫다. 부장님이란 단어에서 주는 묘한 거리감. ㅠ.ㅠ 부장 싫다. 선생님이고 싶어.)
그는 내면이 강한 사람. 그가 학교 복도에 게시한 수많은 작품을 보면 얼마나 따뜻한 감성을 지닌 외유내강형의 사람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지난 금요일, 대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던 때의 일이다. 다른 것은 다 준비했는데 마지막 슬라이드를 채울 것을 찾지 못했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너무 평범하고 뭔가 우리 학교 선생님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찾고 찾던 순간. 그가 게시판에 만들어 놓은 작품을 보게 되었다. 급식실 가는 길에 종종 보던 작품. 볼 때마다 시가 좋아서 곱씹던 작품인데 그것을 대토론회 때 사용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시각적으로도 예쁘고 내용도 좋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연락해 물으니
- 사용해도 좋지요. 제가 더 감사하지요!
라며 답이 돌아온다. 정말 그는 천사일지도. 나는 단박에 그 사진을 PPT 슬라이드에 넣어 자료를 완성했다. 현장에서는 그 시를 낭송하며 참석한 모든 이에게 울림을 주었다(고 믿고 싶다. 나란 인간은... 감동과 울림이 없으면 너무 슬픈 인간이니까...)
그이 덕분이다. 그 시를 골라 그런 작품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시를 몰랐을 터이고 그렇다면 그 울림도 감동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손이 닿는 곳마다 색색이 피어나는 그이만의 감성이 나는 참 좋다. 부러우면서도 좋다. 그래서 난, 그이와 더 친해지고 싶다.
내가 지나간 자리엔 글로, 그가 지나간 자리엔 그림으로 가득 채운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친구 사귀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 어쩌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J는 친구가 없.... (ㅎㅎㅎ) 먼저, H선생님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은밀히 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야지. 그리곤 말할 테다.
선생님! 저 사실 선생님이랑 엄청 친해지고 싶어요.
저 나쁜 사람(부장)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랑도 놀아주세요.
하고. :-)
그럼 그이는 아마도 허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짓겠지.
나는 그때 얼른 S와 J를 데리고 와서 아재개그를 선보이며 매력을 발산해야겠다.
그러면, 친구가, 될 수 있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