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 일기 (1)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해요

by 안녕

눈을 뜨자마자 직감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음을.

지끈거리며 나를 괴롭히던 편두통도, 쉴 새 없이 구역감을 유발하던 위경련도 모두 가라앉았음을.

무리하면 다시 아플까 겁이 나 오전 내내 가만히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몸 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언제, 그렇게 아팠냐는 듯이. 그렇게 힘들어했던 나를 비웃는 듯이.



방학의 목표는 애초에 "아무것도 안 하기"였다. 1년 간 영혼을 탈탈 털어 일을 해온 터라, 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릴 것 같았다. 12월엔 약을 먹으며 버텨가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할 필요까지 없었던 것도 많았지만, 성격이 그냥 넘기질 못했다. 허투루 하기 싫었고, 애를 쓰고 싶었고, 열심이고 싶었다. 덕분에 자잘한 병을 얻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니 뿌듯했다.



방학이 찾아오는 날까지 제 역할을 다 한 나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싶었다. 부러 아이들에게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애니나 드라마 추천해 줘."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필시, 이유가 있었다. 이번 방학은 무조건 쉴 것이었으니까. 아무것도, 분명 안 할 것이었으니까.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스킵과 로퍼>라는 일본 애니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실은 방학 전부터 조금씩 보던 것이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제일 먼저 생각이 났다. 물론, 기껏해야 설거지할 때, 틈틈이 보는 것뿐이지만 그게 참, 그 자체로도 위안이 된다. 벌써 6화를 향해 달려가는데, 여주가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 좋다. 도쿄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의 잔잔한 성장물이랄까. 좋다.



애니만 볼 수 없어 펼쳐든 것은 <울어봐, 빌어도 좋고>라는 웹소설 단행본이다. 12월 29일에 받아 놓고 계속 못 읽다가 오늘, 읽기 시작했다. 이미 2번은 더 읽고, 웹툰도 2번은 더 본 상태라 내용 자체는 술술, 넘어가는데 문제는 문체다. 절절한 그 마음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해서 몇 번을 멈추고 읽고, 멈추고 읽고 있다. 가슴 아픈 사랑이란 게 무언지 새삼 깨닫는 중.



그러다 가끔은 휴대폰을 열어 카톡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 어제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선생님, 제자들, 친구들의 메시지창을 가만, 가만 곱씹어 본다. 그 속의 나는 언제 아팠는지 가늠도 못하게 밝고, 유쾌하다. 아픔을 숨기고 싶었다기 보단, 대화를 나누는 순간만큼은 안 아프고 싶었던 마음이 구슬프다. 친구에게 실없는 농담이라도 건네볼까 채팅창을 열었다가 몇 번을 닫았다. 이유 없이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이 듦을 느낀다. 물론 나는 그럴 때 나의 지피티를 열지만. :-)



이제는 자야겠다 싶어 책상 앞에 가보니 며칠 전 받은 선물들이 한가득이다. 특히나 내게 다이어리를 선물해 준 녀석의 마음은 하도 고마워 올 한 해는 그 다이어리를 알차게 쓰며 녀석을 그리워하기로 정했다. 두툼한 다이어리는 보기만 해도 값비싼데 제 용돈을 모아 그것을 마련했다 하니, 애틋한 마음이 그지없다.



유난히 책상 위에 많이 놓인 핸드크림은, 악건성인 내 피부를 걱정하는 모든 이의 마음이 보인 탓이다. 아무리 보습을 해도 거칠거칠한 나의 손등은 나보다 다른 이들이 더 관심을 보인다. 태생이 꾸밈에 모자람이 크고, 관심이 없는 주인을 만난 탓에 나의 양손은 겨울마다 부르트기 일쑤이지만, 그들이 있어 그래도 사람 손 모양을 하고 산다. 고마울 따름이다.



자기 전, 서재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최근에 세상에 나온 <미완성 작품-진행 중>을 꺼내어 다시 펼쳐 본다. 군데군데 보이는 내 글의 오타와 편집의 오류가 눈에 띄어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2025년을 그대로 담은 글이라 누구보다 애착이 간다. 더 큰 세상을 만나게 하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만 늘 가득하다. 생각만.




그래서 뭐, 결국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1~2주 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탱자 탱자 놀 생각인데 벌써부터 행복하다. 공문서가 아니라, 품의가 아니라, 생기부가 아니라, 그저 좋아하는 책을, 영화를, 드라마를, 음악을 채울, 그러다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멍 때리고 싶으면 멍, 하게 앉아있을 1월이 기대가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곳에 종종 기록될 이야기는, 그야말로 나의 방탕 일기쯤, 되시겠다. :-) 기대하시라.




그리고 이하, 인증숏 모음!

나의 2026년을 함께할 다이어리와, 나의 거친 손등을 관리해줄 무수히 많은 핸드크림 (사실 3개 더 있다....)


여태껏 만들었던 책 중에서 가장 퀄리티 높게 뽑아낸, 작품! 추천사도 감동스럽기 그지없다. 이래서 내가 글을 계속 쓰지. 이 맛을 잊지 못해서. ㅍ.ㅍ



읽는 동안은 잠시 레일라가 되는 걸로. :-)



추신:


아무 것도 안 한다며....

안 했다며...

거짓말.....(결국 또 글을 쓰고, 사진을 고르고... 하, 나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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