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생일엔가.
늘 살뜰히 챙겨주던 친구 H의 선물이었다.
회색빛 몸체에 이름 석자를 아로새긴 만년필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손 글씨는 더욱 사랑하는
나에게 꼭 들어맞는 선물이었다.
흰 종이에 자유자재로
좋은 글귀, 생각들을 적으며
한 시절을 함께 했다.
잉크가 바닥을 보여 나오지 않을 때까지,
굳어버린 잉크를 따뜻한 물에
녹이면서까지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시절들이었다.
삶이 바빠
손글씨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들이
쌓여가는 만큼,
나의 만년필은
서재 한편 연필꽂이에서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굳어갔다.
삼백 원, 천 원짜리 볼펜을
쥐고 아무렇게나 휘갈기며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내게
잉크를 녹이고,
펜을 잡는 위치를 길들여야 하는
만년필은 번거롭고 귀찮은 것이었다.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굳이?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오래도록 잊고 지냈다.
그동안 나는 무척이나 바쁘고
힘들고 애쓰는 하루들을 보냈고
시간의 겹은 쌓이고 쌓여
5년이라는 견고한 틀을 만들어 버렸다.
문득, 다시금 그 만년필이 떠오른 것은
"멋진 펜이 없는데요."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의 소중한 D선생님의 책에
꾹꾹 눌러 담고 싶은 싸인을,
그러니까 그 싸인을 쓸 펜이 없다는 것이었다.
"멋진 펜은 선생님이 가져갈게."
툭 던져놓고 바로 만년필을 찾았다.
해가 뜬 낮에도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 달처럼,
그 자리에서 몇 년을 가만히
있던 녀석을 들고
제이와 D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온몸을 휘감았다.
따뜻한 물에 펜촉을 담그니
조금씩 잉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좋아 가만히 바라보니
그건 마치, 한 편의 수묵화, 같았다.
제이는 웃으며 펜을 쥐었고
D선생님은 그 모습을
옅은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어쩐지
마음이 벅차올랐다.
거침없이 번져가던
검은 잉크가 지나간 자리엔
또렷한 이름 석 자가 남았다.
모두의 마음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제 역할을 다 하고,
제 쓰임을 다한 만년필을
그대로 두는 것은 너무 매정한 처사였다.
오래된 잉크를 다시금 펜촉에 밀어 넣고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니
사각사각, 사각.
서걱서걱, 서걱.
소리로 화답하는 듯했다.
거친 종이에 한 번,
보드라운 종이에 또 한 번,
매일 쓰는 다이어리에 한 번.
그렇게 몇 번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녀석은 다시금 나의 것이 되었다.
잊고 있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 다가와
나에게 다시 담겼다.
만년필을 꺼냈다.
오랫동안 묵혀둔,
시간을 녹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