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by 안녕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중2 때 시화반 활동을 한 적 있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던 수학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이 한 장을 나눠주며

이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열다섯의 어린 나는

이별도, 사랑도

격정도, 인내도 모르면서

하얀 종이에 나무와

꽃잎을 그려대곤 했다.




분분하게 떨어지던 꽃잎을

하롱하롱 표현하던 나는

어쩐지 그 시가 퍽 마음에 들어

마음속 깊은 곳에

살포시 넣어 둔 기억이 난다.




임용고시를 볼 때에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라는

구절에 쓰인 표현법을 익히는데

급급했지만




어쩐지 나의 마음은

1연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떠나는 사람.




해마다 뜨겁게 아이들을 아끼고 보내던 시절이

벌써 14년 차에 접어든다.




누군가 말하듯

선생님의 사랑은 짝사랑일 수밖에 없는데

사랑하던 아이들이 성장하는 만큼,

세상으로 한 발씩 내딛는 만큼,

나와의 기억이 차츰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에는 동네였던 그들의 세상이

고등학교 때에는 지역으로

대학교 때에는 저 먼 세상으로

넓어지기 때문일 테다.




시간이 흐를수록 넓어지는 녀석들의 세상엔

그저 열다섯, 열넷, 혹은 열여섯에 만난

선생님이 끼어들 자리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때문에 해마다 다가오는 이별을 앞두고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마음을 다해 표현한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듯이

헤어짐이 있어야 만남이 있으니.




그리하여 나는,

이제 마음속 아이들을

모두 보내주려 한다.




깊은 곳에 2025년의 서랍을 하나 만들고

그곳에 차곡차곡 쌓아,

먼 훗날 그들이 문득 나를 기억할 때

멋지게 펴보일 수 있게.




오늘은,

가장 아꼈던 제자 중 한 명을

만난다. 3년 간 한 번도

밥 한 끼 사주지 못한 게 미안해

부르니 좋단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오늘,

약간의 온기로

세상을 녹일 마음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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