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1년씩 느린 사람

by 안녕

남들보다 빠르진 못해도 똑같은 속도이길 바랐는데 어쩐지 나는 1년씩은 느린 사람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대학.

한 학기는 언니가 모아둔 돈으로 한 학기는 아빠가 아는 아저씨가 빌려준 돈으로 그렇게 꾸역꾸역 1년을 다니곤 2학년으로 올라갈 돈이 융통이 되지 않아 바로 휴학을 했다. 친구들에겐 "세상 경험 좀 하고 싶다."라고 둘러댄 채. 종이에 적힌 휴학원을 손에 꼭 쥐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꽤 더웠다.


반수를 하겠다 마음먹고 산 EBS 문제집이 라면 받침으로 쓰일 즈음, 꼭 1년 간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내 또래의 손님들을 응대할 때면 그게 그렇게도 속상했다. 지하 2층에 있던 영화관에서 일하다 보면 하루의 흐름도 볼 수 없었다. 꼭 그 시절 내 마음과 닮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도통 앞길이 안 보였다. 그동안 내 꿈은 '작가'였다가, '기자'였다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학생기자 활동을 하며 원고료를 받아보기도 했고, 80만 원을 내고 방송작가협회 교육원도 다녀보았다. 비드라마반 수강생인 동안, 꿈에 그리던 여의도에 있었지만, 6개월 동안 나보다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자 몸이 아팠다.


하고 싶은 것은 잘 못하고, 해야 하는 것은 하기 싫은 그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건 임용고시.


늦어도 너무 늦었다. 다른 친구들은 늦어도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하는 걸, 나는 마지막 학기에 겨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졸업까지 해 아무런 소속이 없는 상태는 불안감만 주었다. 노량진 갈 자신이 없어 독서실에서 인강만 들으며, 용돈이 필요해 과외를 하며 공부하니, 시간은 부족했고 마음은 잡히지 않았다.


그즈음, 교육원에서 강의를 들었던 작가님께 전화가 왔었다. "막내 작가 자리가 하나 있는데 해볼래?" 순간 엄청 고민했다.

원하던 작가의 길. 좋아하는 다큐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라니. 잊지 않고 연락해준 게 고마웠지만, 뭐 하나 진득하게 끝낸 적 없는 내가 임용고시 마저 중도 포기하기엔

학원비다, 교재비다 들인 돈이 백만 원 가까이 되었다.


"저 공부하려고요."

"그것도 힘들 텐데... 힘내요."

응원해 준 작가님의 목소리는 한동안 큰 여운으로 남았다.


첫해는 당연히 불합격.

시험을 보던 날은 비가 많이 왔다. 문제를 풀면서 이번 해는 틀렸다,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니 고생했다며 안아주던 엄마와 언니는, 나를 위해 시킨 탕수육을 먹으면서 같이 울었다. 당장 취업을 해서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할 상황인데도, 한 번 잔소리하지 않고 뒷바라지 해준 가족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임용고시는 꼭 2년이 걸렸다. 3차 시험 후, 최종 합격자 확인을 하는데, 그렇게 손이 떨릴 수가 없었다. "축하합니다."로 시작한 내용을 보고 바로 전화를 했던 것 같다. 일을 하던 엄마도, 아빠도, 평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언니도, 모두 울먹였다. 막내딸까지 취업 완료. 고생 끝.


합격은 했지만 거의 꼴찌였다. 동기들이 하나둘씩 발령을 받는 동안 나는 뭐라도 하자 싶어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원, 학교, 그리고 교육청 등을 돌며 조금씩 돈을 모았다. 그렇게 1년을 기다리니 겨우 발령이 났다. 남들보다 2년은 늦게 합격하고, 남들보다 1년 늦게 발령받았으니 도합 3년이 늦은 시작이었다.




늘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살았다. 중학교 때 공부의 원동력은 라이벌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쟤는 꼭 이긴다.'라고 마음먹고 시작한 공부는 훨씬 집중이 잘 됐다. 그렇게 수년간 체화된 '비교의식', '경쟁의식'은 자꾸만 나를 불안하게 했다.


'넌 대학에서 1년 반이나 휴학하고 뭘 했냐?'

'그러게 애초에 임용고시 공부했으면 좀 좋아?'

'시험 붙으면 뭘 해? 다른 동기들은 벌써 발령받아 일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늦었다', '뒤쳐진 사람이다'라는 마음들이 소극적인 나를 움직였다.

휴학 후, 2학년으로 복학했을 때에도 한시가 아까워 정말 열심히 살았다. 스타벅스, 학교 도서관,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봉사활동과 같은 각종 활동도 쉬지 않고 했다. 특히 스타벅스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오면 새벽 1시였는데, 그때부터 학교 과제를 하기 시작해 밤을 새운 적도 많다.


발령받고도 그랬다. 내 동기들은 이미 1년을 먼저 시작한 일.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첫 해는 내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가 끊길 만큼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방학엔 모여서 대청소를 했고, 분당에 있는 '한국 잡월드'를 데려가기도 했다. 한 번은 상담을 원하는 아이들이 있어 본가에 있다가 무조건 달려갔다. 본가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편도 2시간 30분이었다.


주목할만한 건, 어느 순간부터는 과거와 다르게 그저 '나'를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의 비교, 옆 반 선생님과의 경쟁이 아니라, 순순히 나를 위한 노력들로 채워진 시간들은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풍요롭게 했다.




몇 년 전부터 '브런치'라는 게 있다고 글 쓰는 게 좋으면 한 번 해보라고 했지만 겁이 났다. 그러다 올해, 문득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 시작한 브런치다.

작가 신청을 하면서도 걱정이 많았는데 한 번에 붙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몇 개월 동안 해보니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구독자부터 라이킷, 댓글 수까지 비교하려면 끝도 없이 비교할 구석이 많았다.


브런치. 나에게 너무 매력적인 공간을 역시나, 남들보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면서도 자꾸 비교하는 나를 발견했다. 수차례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만 실패. 그러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거다.

"아! 나는 남들보다 적어도 1년씩은 늦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말이다.


몇 해 전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연설을 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요지는 "자신은 한 번에 성공한 적이 없다. 대학도 재수했고, 대선도 재수를 했다. 하지만, 재수를 하면 꼭 좋은 결과가 났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그렇다. 살아온 삶의 흔적이 그렇다. 한 번을 앞서 나간 적이 없다. 인생의 중요한 마디마다 하나씩 뒤로 밀렸다. 예전엔 그 자체가 열등감을 느끼게 했지만, 살아온 흔적을 보니 그것이 동력이 되어 내 삶이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다. 브런치도 그렇게 보면, 분명히 잘 될 것이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나는 내년엔 내가 그리는 목표를 이룰 것이다.


꼭 1년씩 늦었지만, 분명히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사람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꼬박 3일을 아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