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지나간 자리 (1)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 시절 우리를.

by 안녕

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내가 적어 내려가는 단어 하나와 문장 한 줄이 그 시절을 다 담을 수 없음을 알기에 한 없이 조심스러워지면서도 모든 '억압'을 벗어던지고 정말 솔직하게 그 시절을 서술해지고 싶어지기도 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상황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는 나를, 아니 우리를 위로해주고픈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이렇게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조차 어쩐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쓰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정말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잊어버릴 것 같아서다. 아팠던, 힘들었던, 그래서 사실 '교직'에 더 이상 발 디딜 틈이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던 그 시절, 2020년을 한 번은 적어야 할 것 같아서. 2020년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내 수업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시작한다.




2020년.

고개를 절로 젓게 만드는 그 해를 나는 두 단어로 기억한다. '원격 수업'과 '개학 연기'라는 이 무미건조한 글자들이 감히 그때 우리의 답답함과 불안함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매 순간 실감케 하는 태풍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갓 복직한 어정쩡한 나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무기한 연기되고, 취소되고, 무산되고, 변경되는 상황 속에 그저 던져였을 뿐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3월 2일. 학교가 아닌 집에 있던 나를. 하루 종일 뉴스를 틀고, 교직원 단톡방에 올라오는 갖가지 정보를 계속 확인하던 나를. 이제 겨우 20개월이 됐을까 말까 한 딸내미 기저귀를 갈아주며 동시에 계속 인터넷 검색을 하며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끝없이 찾아보던 나를. 네이버 공문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선생님들 사이에 떠돌 정도였던 그 시절, '정보력'의 부재는 자꾸만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내가 모르는 뉴스들이 떠돌고 떠돌아 내게 도착할 때 즈음엔 또다시 정책이 바뀌어 있었고, 개학은 또 그렇게 2주씩 연기되고 있었다.


4월. 미루고 미루던 개학이 왔어도 아이들을 만날 순 없었다. 전파력이 강한 바이러스는 아이들을 학교에 모이지 못하게 했다. 어느 정도 안정되기 전까진 온라인으로 아이들을 만나라는 교육부의 방침이었다. 교사에게 한 개의 노트북이 동일하게 지급됐고 정보부장님 및 3학년 부장님, 연구부장님은 선생님들을 모집해 다양한 연수를 준비했다. 다행히 우리 학교는 젊은 선생님들이 많아 변화에 금방 익숙해졌고, 그렇게 먼저 배워온 선생님들이 나같이 어쩐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거창한 말로는 연수였지만 사실 알음알음 배워가며 유튜브를 검색해가며 그렇게 함께 공부했다.


나는 꽤나 열등생인 편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과의 온라인 수업을 위해서 평생 배워본 적 없는 프로그램을 꾸역꾸역 배워야만 했다. 복직 전, 수업이 가장 만만하다 생각했던 내가 벌이라도 받듯, 모든 게 어려웠고, 낯설었다. EBS 온라인 클래스, E-학습터, 구글 크래스룸, MEET, ZOOM 등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연수가 개설됐고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배우다 보니 혼돈, 혼란 그 자체였다. 들어도 어려운 용어들, 해봐도 익숙지 않은 프로그램은 자신감을 자꾸 깎아내렸다.


수업이란 모름지기 칠판에 하얀 분필로 판서를 하는 게 정석이라고 생각했던 일개 국어교사에게 구글 클래스룸의 UI는 너무 생소했으며, 줌 화상회의의 지나치게 많은 기능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EBS 온라인 클래스가 그나마 가장 '익숙' 했으나 여긴 서버가 문제였다. 동시에 수십만의 학생들이 접속하면 서버 과부하로 인터넷이 마비가 되었으며 불안한 모범생들은 내게 독촉 메시지를, 헐렁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틈새로 줄줄 빠져나갔다. 어느 하나 완벽하게 되지 않는, 아노미 상태였음이 분명했다.


연습을 더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경험도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출퇴근을 하면서 매일매일 늘어나는 확진자 수를 볼 때면 문득문득 생존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내가 지나쳐 온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면 끊임없이 불안해졌다. 일을 잘하려면 당장 내 건강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다니는 와중에도 온라인 수업은 계속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온라인 수업이 매번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좋은 면도 있었다. 1,00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가득 채워진 고요가 좋았다. 쌤, 쌤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아이도, 친구랑 욕하면서 싸우다 결국 주먹이 나가 씩씩 거리며 학생부로 끌려가는 아이도, 쉬는 시간마다 굳이 교무실 앞에서 '씨X, 존X, 미친X' 같은 단어를 내뱉는 아이들도 없는 학교가, 교실이, 복도가 너무나 좋았다. 아이들과 온라인 수업을 하고 나서 금세 교무실로 돌아와 밀린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쉽게 연수로 보충할 수 있었다. 아이들로 가득 찬 시간의 틈이 벌어지자 묘한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 속에서 복직 첫 해가 이렇게 수월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에서 느끼는 평화. 부끄럽지만 솔직히 그랬다.


그런데 문제는, 5월 27일. 드디어 시작된 등교 개학에서 나타나기 스멀스멀 시작했다.

3, 4, 5월. 총 3개월 동안 비대면으로만 소통한 아이들을 처음 만나던 그날을 어찌 잊을까.

내 이름 석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35명의 아이들이 쏟아내던 눈빛을. 하얀 마스크 뒤 알 수 없는 얼굴들을. 그리고 교탁 앞에 서서 버벅대던 내 첫 수업을.




* 덧붙임: 아주 간단히 쓰고 넘어가려고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결국 이렇게 길어졌네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뒤에 나올 이야기를 쓸 수 없을 것 같아 긴 호흡으로 적어보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제가 근무했던 학교의 경험이고, 제 경험의 아주 일부를 나름 재구성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그 시절, 편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지금도 그때도 현장에서 애쓰시는 동료쌤들, 응원합니다.



Photo by NAS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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