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의 끝에서 마주친 불안의 늪
5년 동안은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남들 좋다는 것을 따라 하다 보면 결국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느낀 시간들이었다. 유명한 선생님이 했던 수업을 그대로 따라 하거나 같은 학교 선생님의 수업을 모방하면 무조건 수업이 잘 되고 아이들이 내 수업에 열심히 참여할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주의는 내게 매 순간 패배감을 안겨다 주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을 죽도록 견디지 못하는 나의 고객님들은 엎어져 자거나, 학원 숙제를 하거나, 떠들거나, 딴짓을 하거나, 심지어 소리를 지르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저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45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교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난, 늘 혼자서 고독과 불안을 마주해야만 했다.
무너지고 싶지 않은 열정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살아 움직이는 수업,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수업, 그래서 행복해지는 수업을 하고자 이것저것 시도했고 처참히 실패했다. 한 번은 <중학교 국어 수업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저자가 아이들과 했던 여러 가지 활동 중에서 '수업 일기'라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수업 내용을 들은 후 돌아가며 일기를 쓰고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글쓰기, 발표, 학습까지 모두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당장에 노트를 사 와 들어가는 학급마다 모두 일기를 쓰기로 했다.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너희'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설득하며 4년 인가를 운영했다. 특히나 자부심을 느끼던 방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에 가까웠다.
검열을 받는 일기는 솔직할 수 없으며, 발표를 위해 들어야 하는 수업은 이미 목적을 상실할 수 있음을, 더불어 나 역시 아이들의 일기를 들으며 '쟤는 잘 쓰고 쟤는 너무 성의 없네'라는 가치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4년 차에 깨달았다. 끝끝내 일기 쓰기를 거부한 한 남자아이를 심하게 혼내던 그날, 반 아이들 앞에서 소위 말하는 '쪽팔린 일'을 감내해야 했던 녀석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까짓 일기가 뭐라고. 다른 선생님과는 다른 수업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생각이 들자 죄책감이 들었다. 진심은 때로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운 사건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독서교육에 꽂혀 학급 문고를 운영한 적도 있다. 국어과에서 유명한 송승훈이란 선생님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당장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괜찮다는 청소년 소설 50권 정도를 구매했었다. 아이들에게 유익한 책을 읽히면 좋겠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다 바라면서. 아침 조회 시간 20분 중 10분을 쪼개어 책을 읽게 했다. 학급 문고 관리자를 뽑고 1번부터 50번까지 모두 라벨을 붙이고 대여 장부까지 만들며 열심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학부모님들만 간혹 가다 좋다는 의견을 보내주셨는데, 정작 책을 읽어야만 하는 아이들은 아침 조회 시간마다 썩은 얼굴로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왔다. 그럴 때면 나는 너희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니, 책을 읽어야 다른 공부도 잘할 수 있는데 왜 모르니, 와 같은 말을 당장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아이들을 쳐다봤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3월에 반짝, 하던 학급 문고는 학기 말에 처치 곤란한 짐이 되어버렸다.
한동안 독서 후 그림으로 감상을 표현하는 활동도 유행해 쫓아가 본 적이 있다. 근무했던 학교에서 특히 자주 썼던 방법이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웹툰에 익숙한 아이들이니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한다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색연필, 사인펜을 10세트씩 사비로 사서 학교로 가져오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좋아할 거야, 새로운 색연필과 사인펜이면 기분도 좋을 거야,라고 시작했던 독후 활동은 다행히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그림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주었고 꽤 괜찮은 결과물을 제출하곤 했기 때문이다. 적당히를 모르는 나는 그만 신이 나 대부분의 활동과 수행평가에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각화하기' 따위를 넣었는데 어느 순간 회의감이 느껴졌다. 문득 내가 미술 선생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림을 평가할 '안목'도 없으면서 그림을 그리게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냄비같이 끓어오르던 열정은 수차례의 실패로 식어갔다. 선배 선생님들은 그만하면 됐어, 다들 적당히 해, 뭘 그리 유난이야, 라며 나를 달래주었고, 나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어차피 애들은 국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아무리 모둠활동하고 창의적인 수업을 만들어도 2, 3학년은 지필평가를 봐야 하니까 진도를 나가야만 하잖아. 어차피 애들은 생각하는 과제보다는 떠먹여 주는 주입식 수업을 더 좋아하잖아. (실제로 많은 애들이 쌤, 이거 시험에 나와요? 쌤, 그냥 요약정리해주면 안 돼요?라고 말하곤 했다.)라는 생각이 나를 유혹했다. 그래 평범하게 하자, 내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처럼 그냥 무난하게,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도 돼. 너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 하며 나를 위로하다 결국, 더 이상의 도전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하면 재밌는 수업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더 간편하게 수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6년 차가 되면서부터는 노련함이 더해져 능구렁이처럼 변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수업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아도 아이들 앞에서 썰을 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나보다 잘 몰랐고, 심지어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는 수업도 꽤 했고, 잘 모르는 내용을 얼버무린 수업도 꽤 했다. 임신을 하면서부터는 삶의 중심이 '일'에서 '나'로 옮겨가며 지금보다도 더 간편한 수업을 원했다. 시험을 앞둔 아이들에게 문제집을 풀어주고, 간단한 요약지를 만들어 정답을 적게 하는 수업. 생각을 키우기보다는 정답을 적게 하는 수업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출산을 했고 1년 간, 휴직을 했다.
건방진 소리지만 복직을 앞두고도 수업에 대한 걱정은 크지 않았다. 수업이 다 똑같지 뭐, 적당히 설명해 주면 되지 뭐, 하는 마음이었으니까. 그저 담임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혹은 업무가 너무 힘들지 않을지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그런데 변화를 거부하는 나와는 반대로 세상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팬데믹. 코로나19 바이러스. 그리고 개학 연기. 난생처음 듣는 단어들, 처음 보는 상황은 전 세계를 혼돈과 불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역사상 유래 없는 개학 연기... 2주 후 추이를 보고 판단..."
맘 카페가 뒤집어지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난리난 그때의 나는, 복직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딱 일주일이 지나면, 나는 겨우 돌을 지난 아이의 엄마가 아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8시 뉴스 속 앵커의 불안한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창밖엔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마음은 할 수 없는 긴장감으로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다.
2020년, 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