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추억이 있고

by 안녕


안녕! 나의 사랑스러운 딸.

오늘 아침에 유치원 가기 싫다며 떼 부리는 너를 잘 달래 보내 놓고 집 치우고 빨래하고 당장 내일부터 시작될 학교 일을 정리하고 나니 벌써 네가 하원할 때가 됐네. 조 30분만 지나도 조용하고 한가로운 이 거실은 네 목소리로 가득 차오르겠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면서도 두렵다. 아마 너도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내 마음을 200% 알게 될 거야. 하원의 기쁨과 슬픔을. ㅎㅎ


무튼 엄마는 오늘 마지막 휴가가 왠지 아까워서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그것도 무려 6,000원이나 하는)을 마셨어. 평소라면 절대 나가서 먹지 않을 집순이 엄마지만 오늘은 마지막이었잖아. 그래서 특별히 힘을 좀 줘 봤지! 오늘 간 카페는 너랑 아빠랑도 함께 갔던 곳인데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고? “ 하는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여태껏 마셨던 커피 중 단연 최고의 커피를 만들어 내는 곳이었어. 아직까지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내어주는 곳을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왠지 오늘은 더 행복함을 느꼈던 것 같아.


벌써 세 번째 편지네. 오늘은 어떤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할까 하다가 문득 어제 우리 셋이서 땀 뻘뻘 흘리며 갔던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시장! 네가 자주 가지 못하는, 그래서 어쩐지 갈 때마다 살짝 낯섦을 느끼는 그 시장말이야.


사실 어제는 배신이었어. 여름 날씨가 워낙 예측 불가이긴 하지만 우리 함께 갔던 도쿄보다는 덥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오후 5시 30분. 아니 거의 저녁을 바라보는 늦은 시간엔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햇살도 비교적 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게 웬 걸. 너무 덥더라고. 긴 청바지를 입은 엄마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아직 여름은 여름인가 봐. 정말.


우리 집은 시장과 거리가 꽤 있는 편이야. 집에서 30분이나 40분을 걸어가야지만 시장이 나오는 그런 위치. 사실 엄마는 꿈쩍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네가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땐, 유모차 끌고 시장 가는 게 싫었어. 이왕 가는 거면 자동차 타고 편하게 가는 마트가 더 좋았거든. 수유실도 잘 되어 있고 또 무엇보다도 시원하거나 따뜻하고 편리하잖아. 그런데 요새는 다시 시장이 조금씩 재미가 있더라고.


엄마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살던 동네에는 지금 같은 대형 마트가 하나도 없었어. 기껏해야 있는 게 자그마한 슈퍼였고 그 슈퍼가 닫으면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상설 시장을 매일 가야 했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너의 외할머니는 매일 같이 시장을 가던 분이었는데 항상 엄마를 데리고 갔어. 아마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데려가신 것 같았는데 엄마를 너무나 좋아했던 엄마는 그 시간이 참 좋았지. 엄마의 팔짱을 끼고 시장으로 걸어가던 그 길이 말이야.


늘 가던 시장의 초입엔 항상 전을 파는 집이 있었어. 노랗고 빨간 알록달록한 색의 전을 보면 군침이 돌았지. 또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생선가게도 있었어. 엄청 오랜 단골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입학하고 나서 처음 알았던 거야. 그 집이 내 친구의 집이었다는 걸. 그 이후엔 엄마가 더 그 집에서 고등어든, 갈치든 샀었던 것 같아. 난 어쩐지 그 집에 갈 때마다 친구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게 쑥스러웠지만 말이지. 그 친구는 지금 뭘 할까? 엄마처럼 결혼해서 애를 낳고 살고 있을까?


여러 가지 가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가게가 하나 있어. 엄마가 순두부를 좋아해서 외할머니가 항상 자주 가던 순두부 가게가 있었거든? 그런데 말이 가게지 그냥 노점이었어. 아주 큰 빨간 대야에 순두부를 잔뜩 담아 놓고 비닐봉지에 담아 파는 그런 곳. 엄마가 가면 꼭 1,000원, 2,000원씩 순두부를 샀는데 머리가 아주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듬뿍듬뿍 두부를 담아 주시곤 했지. 대화 한 번 안 한 할머니였지만 그래도 뭔가 좋았어.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그 순두부 가게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거야. 처음엔 며칠 쉬시나 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이주일이 지나도 오시질 않네? 그 할머니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나오셨던 분이거든. 어느 날 외할머니에게 물어보니(그러니까 엄마의 엄마) 아마도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받은 충격이 꽤 커. 그저 손님일 뿐이었지만 친밀하게 느꼈던 분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거든.


그 이후로 어떻게 됐냐고? 그 자리에 있던 순두부 가게는 사라지고 다시 어떤 가게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아. 또, 어느 순간부터 단단한 팩에 담긴 순두부를 사 먹기 시작하기도 했고. 왜 그런 거 있잖아. CJ나 풀무원 같은 데서 만드는 그런 순두부. ^^ 그래도 가끔은 순두부찌개를 먹을 때마다 투명한 봉지에 가득 담아주던 그 할머니 집 순두부가 많이 그리워. 어린 시절 매일 찾아가며 켜켜이 쌓았던 그 추억까지.


어린 시절에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갔던 그 경험들 때문일까? 엄마는 어디를 가도 시장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 할머니들이 쪼그려 앉아 나물 파시는 것, 과일 가게의 우렁찬 호객 소리, 그리고 갓 튀겨 나온 튀김의 매혹적인 냄새까지. 시장은 언제나 눈과 마음이 즐거워. 해외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야. 어디든 시장은 한 번씩은 들러보려고 해. 사람이 살아오면서 어떤 공간에 담긴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무척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아. 엄마에겐 시장이 그런 곳이야.


딸. 나는 네가 나처럼 어떤 공간에 대해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능하면 그 공간이 나와 함께 했던, 그래서 소소한 추억이 쌓이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곳에서 산 물건을 보면 그때의 기억에 잠시나마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야.


그러니 우리 앞으로는 손 꼭 잡고 자주 돌아다니자.

시장도 가고, 마트도 가고, 어디든 가서 우리 가족의 추억을, 일상을 곳곳에 새기자.

엄마가 지금 외할머니랑 떨어져 살아도 그 시절의 추억으로 하루를 행복하게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너도 언젠간 함께하지 못할 엄마와의 추억을 곳곳에 새길 수 있게.


뭐? 꽈배기 사 먹어도 되느냐고?

그건, 당연하지.

그 맛에 시장 가는 건데. ^^



2023.8.16.(수)

- 시장을 함께 가고싶은 엄마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