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에 확실히 날이 선선해졌어.
바람이 조금은 시원해졌고 내리쬐는 햇빛도 심하지 않더라. 오늘 우리는 아빠 머리카락 자르러 가는 길에 함께하면서 미용실 구경을 했고, 커피숍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산책을 했어.
한 번 걷기로 마음먹으면 최소 1시간은 뚜벅뚜벅 걷는 엄마 아빠를 익히 아는 너는 놀이터에 가자고 했고, 우린 흔쾌히 수락했어. 어차피 왕복 2시간을 걸릴 산책. 너에겐 지루할 수 있으니 미리 선물을 주는 게 낫겠다 싶었거든.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많은 가족들이 이미 놀이터에 나와서 놀고 있더라.
너와 내가 '방방이 놀이터'라고 부르는 그곳엔 아담한 크기의 트램펄린이 두 개나 있고, 미끄럼틀, 그네도 여러 개 있어 늘 인기가 많잖아.
은근히 기대했던 유치원 친구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해 질 녘 햇빛을 머금은 놀이터의 풍경은 퍽 아름다웠어. 너 보다 언니뻘 되어 보이는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이 저들끼리 술래잡기를 하고,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바닥에 그냥 주저앉아 깔깔 거리며 노는 모습. 더위를 피하러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한가로운 모습, 그리고 멀찌감치 놀고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느 아빠의 모습. 그런 그림 같은 풍경에 우리 가족도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지. 참, 좋았어. 암. 좋고 말고.
어쩐지 또래가 없어 머쓱한 너는 언니들이 술래잡기를 하는 것을 보곤 그게 부러웠나 봐. 갑자기 내게 다가와 술래잡기를 하자고 제안했어. 첫 번째 술래는 가위바위보에서 진 너였고. ^^
엄마, 아빠 이제 숨어!
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무려 40까지 세어 내린 너는 나와 아빠를 찾기 시작하더라. 넓고 사람 많은 놀이터지만 혹시 몰라 너를 몰래 지켜보던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했어. 혹시, 혹시 우리가 안 보인다고 울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많이 컸더라. 짜식.
엄마, 어딨어~. 아빠 어딨어~ 하면서도 울지 않고 우리를 찾더라고.
낯선 할아버지가 (아마도 네가 귀여워서 물어봤을 테지만) 네 나이를 물어 와서 무서움을 느꼈을 수도 있음에도 울지 않더라고.
그거 알아? 네가 술래일 때 말이야. 사실은 일부러 들키려고 많이 움직였어. 제대로 숨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다가 엄마를 못 찾으면 펑펑 울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아마 아빠도 같은 생각이었나 봐. 둘 다 다른 곳에 숨었었는데 거의 동시에 밖으로 튀어나온 것 있지? 말도 안 했는데 서로 통했던 것 같아. 이런 게 부모 마음인 건가?
암튼, 그 큰 놀이터를 뛰고 또 뛰며 우리는 한참을 놀았어.
네 얼굴에,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흐르고 등에 땀이 주르륵 흐를 때까지.
함께 방방이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그네도 타며 우리는 그렇게 한 시간을 가까이 놀았지.
근데 솔직히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재밌었어. 요새 그렇게 생각 없이 즐겁게 뛰며 논 적이 거의 없었거든.
엄마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숨바꼭질 같은 걸 하겠어.
그런데 너무 재밌는 거야. 너랑 뛰고, 잡고 하는 것들이 말이야.
예전에 네가 어릴 때는 놀이터를 나와도 솔직히 재미없었거든. 너는 놀이터에 무척 소극적이었고 그네도 미끄럼틀도 전부 싫어하면서도 다른 친구들이 노는 것만 계속 구경했단 말이야. 엄마는 그네도 좋아하고 미끄럼틀도 좋아하는데 네가 안 좋아하니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니 얼마나 지루하겠어. 그땐 솔직히 5분이 50분같이 느껴졌어. 지루하고 재미없고.
근데 이제 네가 여섯 살이 되고 크니까 놀이터가 너무 재밌어.
네가 엄마랑 놀자고 제안하는 놀이도 재밌고 그렇게 같이 뛰고 노는 게 되게 신나. 달리기 시합을 하다 멈추면 둘 다 똑같이 숨이 차 헉헉 거리는 것도 한 바탕 신나게 놀고 슈퍼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손에 들고 집에 와서 쉬는 것도 엄청 좋아.
집에서는 엄마가 집안일할 때 매일 TV 밖에 틀어주질 않잖아. 진짜 많이 보면 하루에 4시간도 넘는 시간을 TV 앞에 그냥 앉아만 있기도 하잖아.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자주 그러잖아. 그런데 일단 나가면 너는 숨이 차도록 달리고 또 달리면서 즐겁게 놀잖아. 엄마는 그 모습을 보는 게 무척 행복해. 이젠 힘도 세 져서 엄마 손을 잡고 같이 뛰자고 이끄는 널 보면, 아주 어릴 때가 생각나 괜히 마음이 뭉클해.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그 시간이 머릿속에 콕 박혀 잊히지가 않아 좋아.
너와 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쌓인 거잖아. 언젠가 네가 내 나이가 되어 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 왔을 때 오늘을 기억할 수 있을 거잖아. 엄마는 그런 시간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 너무 좋거든. 그게 추억이고, 그 추억이 삶을 버티는 힘이 된다고 믿거든.
그래서 요새는 시간만 되면 자주 나가고 싶어.
아마 날이 조금 더 선선해지면 나는 유치원 하원 길에 매일 같이 방방이 놀이터를 갈 거야. 아마도. 그럼 해 질 녘 집에 가는 길에 네 손엔 맛깔난 과자가 꼭 하나는 들려 있을 거고. 우리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을 거야.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우리가 가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
너도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며
오늘의 편지는 마칠게.
우리 꼭 꿈속에서 만나. 그 때는 엄마가 술래가 되어
너를 단숨에 찾아 볼래!
2023. 8. 26. (토)
사랑을 담아, 엄마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