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이식하는 나란 엄마
안녕. 우리 딸!
곤히 자는 너와 함께 1시간 정도 자다가 벌떡 일어났어.
공부도 해야 하고, 또 글도 쓰고 싶기 때문이었지. 아니, 사실... 아주 오랫동안 네게 편지 한 통 쓰지 못했잖아. 핑계인 건 맞기는 하는데 정말 뭐랄까 글 쓸 여유가 없었어.
2주 동안 너무 덥고 바쁘고 정신없고. 그래서 집에 와서 널 씻기고 먹이기만 하면 그냥 옆에서 같이 뻗어버리는 통에 하고 싶은 말은 이~~~~~~~만큼 쌓였어도 도저히 그걸 글로 담아낼 여력이 없었어. 너도 알지? 엄마가 퇴근하고 나서부터는 눈을 반쯤 감고 생활하는 거.
2학기에 수업 시수가 2시간 늘어났는데 그게 생각보다 엄청 피곤하더라고. 늘 오후 수업이 없는 편이어서 점심시간 이후에는 조용히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 사춘기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언니 오빠들과 실랑이하다 보면 진이 쏙 빠져. 정신 차리고 시계를 보면 어느덧 퇴근 시간인 경우가 많고.
그러니 엄마가 편지를 자주 못 썼다는 것을 너무 서운해 말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라. 너도 엄마처럼 워킹맘이 되면 지금 이 순간 엄마의 마음을 1000%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때까지는 너그러이. 부디. 알았지?
오늘은 원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정리해서 쓰려고. 대신에 조금 가볍고 말랑한 이야기로 편지를 시작해 볼까 해. 그러니까 너도 오늘만큼은 부담 없이 읽어주길 바라. 아! 네가 지금 이 편지를 읽는 순간에 오늘의 '글감'을 맛있게 먹고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도 그 옆에서 함께 먹고 있음 더 좋고.
딸!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
라면? 맞아. 라면도 좋아하지만 사실 요새는 '김밥'을 더 좋아해. 까만 김에 당근, 계란, 햄, 어묵, 시금치 등을 넣고 돌돌 만 그 김밥 말이야. 그 김밥을 먹으면 진짜 고소한 참기름 향에 흠뻑 빠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래서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아. 김밥을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외할머니 때문이야. 왜냐면, 외할머니는 엄청난 음식 솜씨와 함께 굉장한 책임감을 갖고 계신 분이었거든.
지금이야 김밥 전문점이 많지만 엄마가 어릴 적에 김밥 전문점이라곤 시장 한편에 자리 잡은 할머니 김밥 같은 가게가 전부였어. 당시엔 소풍을 갈 때 김밥을 집에서 싸 오는 것이 국룰이었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여는 순간 화려하고 영롱한 자태의 김밥을 보며 서로 으스대는 게 일종의 문화였지.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때는 반장, 부반장 엄마들이 선생님 도시락까지 챙기곤 했기 때문에 김밥은 그야말로 정성의 상징이었어.
해마다 소풍날이 되면 외할머니는 상상도 못 한 시간에 일어나시곤 했어. 새벽 네 시일까? 아니면 다섯 시일까? 엄마와 이모는 꿈나라에서 한창 뛰어다니는 시간에 일어나 속재료를 손수 만드시곤 했지. 당근, 오이(때로는 시금치), 햄, 어묵, 계란, 단무지 등등. 어느 하나 손이 안 가는 게 없는 재료를 외할머니는 정말 하나하나 썰고, 볶고, 다듬으며 그렇게 준비해 주셨어.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고, 그 냄새에 홀린 듯 일어나 보면 마루 바닥에 신문지 두 어장 핀 채로 이미 세 줄 넘게 김밥을 싸고 있는 외할머니를 볼 수 있었어. 그러면 엄마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헝클어진 머리에 눈곱, 말라붙은 침까지 그대로 둔 채 달려갔지. 그러면 할머니는 꼭 참기름과 맛소금으로 양념된 흰 밥을 동그랗게 말아서 엄마 입에 넣어주곤 했어. 그 고소한 맛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깊이 자리 잡아서 엄마는 김밥을 떠올리면 그저 행복하고 즐거워.
오죽하면 널 임신하고 나서도 그 김밥이 먹고 싶어서 요리를 그토록 싫어하는 엄마가 김밥을 직접 만들었겠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김밥집에서 5,000원, 아니 6,000원이 넘는 김밥을 먹어도 그 맛이 안나는 거 있지. 그런데 집에서 어설프게 만든 김밥에선 그 시절 외할머니가 느껴지는 거 있지? 참. 웃기지? 맛은 형편없었는데 말이야.
무튼,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김밥을 사랑해. 기억나? 지난겨울 방학 때 엄마랑 같이 김밥 만든 거. 네게 앞치마와 모자를 씌우고 우리 같이 김밥을 만들었잖아. 조그만 손으로 조물조물 거리며 김 위에 밥과 계란, 당근, 햄을 얹는 널 보는 것 자체가 행복이더라. 흰쌀밥 주먹밥, 그러니까 엄마가 그 옛날 먹던 주먹밥을 다섯 개나 먹고도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널 보면서 외할머니도 엄마를 이렇게 봤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느껴졌어.
“엄마! 진짜 맛있다.”
“엄마! 정말 맛있어!”
하며 김밥 세 줄은 뚝딱 해치운 네가 어찌나 예쁘던지. 그날 준비하고 치우는 건 무척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너와 김밥을 만드는 순간의 행복 덕분에 힘든 건 금세 잊을 수 있었어.
딸~.
엄마는 욕심쟁이인가 봐.
나의 추억이 너에게도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 내가 김밥을 생각하면 따뜻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처럼 너도 김밥을 보면 엄마가 생각나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참기름, 계란, 당근, 햄, 그리고 주먹밥을 떠올릴 때, ‘아. 나 어렸을 때 우리 엄마랑 같이 김밥 싸고 놀았는데...’하며 입가엔 미소가, 마음속엔 온기가 퍼졌으면 좋겠어.
40년 가까이 인생을 살아보니
행복이란 건 거창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니더라.
아침 출근길에 마시는 커피 한 잔.
퇴근길에 기다리지 않고 눈앞에 도착한 버스.
그리고 마트 할인 시간에 운 좋게 산 값싸고 맛 좋은 초밥과 같은 것들이 쌓일 때 행복이 느껴지더라고.
그러면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에 행복이 담긴다면 우리 딸은 더 자주 행복해질 거 아냐? 엄마가 파파 할머니가 되어도, 아니 네가 파파 할머니가 되어도 김밥은 사라지지 않을 거니까(?) 넌 김밥을 볼 때마다 조금씩 행복해질 수 있는 거잖아? 네가 나이가 들어 인생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취업에 실패해서 오랜 기간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들거나 어쩌면 더 나이가 들어 이제 네 곁에 내가 없을 때, 그런데 내가 생각이 날 때 김밥이- 너를 위로해 줄 수 있는 한 가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작고 보잘것없고 흔하지만
그 안에 우리가 담겨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엄마는 오늘도 김밥을 싸.
무심코 툭툭 썰어내 식판에 담아.
그러면
돌돌돌 말린 김밥 안에
외할머니가 있고, 엄마가 있고, 그리고 네가 보여.
그래서
김밥은 천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