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 때가 필요해

더 나은 내 삶을 위해

by 안녕

오전에 옷을 정리했다. 세어보니 3년 만이다. 방을 한 번 옮기면서 정리했는데 그동안 쌓기만 했지 버릴 여유가 없어 미루던 일을, 마음먹은 김에 해치웠다. 이제 취학 아동이 되는 딸아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 덕분이었다. 한참을 버리고 솎아내니 비닐봉지에 한 짐이다. 중고거래를 할까 싶어 모아두던 신발도 모두 처분. 성격 상, 사진을 찍고, 게시글을 올리고, 값을 흥정하는 일이 어렵다. 하지 못할 일은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오랜 시간 동안 배워 온, 삶의 지혜다.



비워진 공간을 보니 새삼스럽다. 3년 동안 이 많은 짐을 끌어안고 살아온 게 대단하다 싶다.



-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 이건 비싸게 주고 산 옷인데.

- 나중에 팔 수도 있으니 일단 쟁여두자.



갖가지 이유로 처분하지 못한 짐들은 쌓이고 쌓여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일하느라 바쁘고, 육아하느라 바쁜 나는, 그 짐을 보는 게 어쩐지 버거워 방치해 버린 것이다. 버리고 나니 방이 환하다. 빛도 더 잘 들어오고 무엇보다 방에 공간이 넉넉히 생긴다. 이 방이 이렇게 넓고 환했다 싶다. 새롭게 생긴 공간에 적당히 귀엽고 예쁜, 그래서 아이가 좋아하는 책상과 의자, 책꽂이를 맞춤으로 넣어주면 딱이다.



커피 한 잔, 타 놓고 컴퓨터를 켜고 글쓰기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 본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사소한 쪽지, 휴지에 적은 일기, 그리고 의미 있는 책...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추억'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이곳저곳에 자리 잡았다. 이건 이래서 버리지 못하고, 저건 저래서 처분하지 못했다. 공간이 부족하면 겹치고 겹쳐서, 쌓고 쌓아서 자리를 만들었다. 아니다 싶은 순간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여 무기력해졌다.



버리니 개운해진다. 마음이 가뿐해지고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용기가 생긴다. 확고한 미니멀리스트는 아니지만 뭔가를 계속 사고 쟁이는 것은 어쩌면 마음속 깊은 '불안'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경계하는 사람이긴 하다.



문득, 지난 나의 관계에 대해 돌이켜 본다.

이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면 애써 부정하며 상대에게 맞추기만 했던 관계들이 많았다. 새로운 직장에서 사귀었으니까,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혹은 그냥 내가 힘들 때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니까. 하는 이유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공허하고 지쳐도 참으며 연락하고 만나며 지냈다.



소중하다 믿었던 사람이 험담을 좋아하면 앞장서서 험담을 해주었다. 그 사람이 A가 싫다고 하면 나는 사실 그렇게 큰 감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A의 싫은 점을 찾아 흉을 보았다. 그러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줄 알았다. 실상 사람의 뒷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리 누군가에 대한 소문이 돌더라도 일단 겪어보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는 성향이면서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 관계의 끝은, 결국.



나이가 들수록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느낀 모임도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과의 모임에 돈까지 엮여 있어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분명 만나고 나면 마음이 이상했다. 오랜만에 만나도 편안한 친구가 있고, 자주 만나도 어려운 친구가 있는데 그 모임은 어쩐지 후자에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들은 자주 보자고, 여행도 가자고,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며 단톡방은 쉴 새 없이 울려대는데 나는 그 엄청난 에너지에 발을 맞출 수 없어 괴로운 적이 많았다. 만남의 대부분은 '회비'를 냈기 때문에 나갔던 의무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익숙하다고 믿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돌이켜 본다. 어쩌면 익숙하는 이유로 정리할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지. 그것이 관계든, 물건이든. 그 어떤 경우에서도 가장 소중한 나를 우선순위로 두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아닐지, 하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가득가득 담긴 옷 봉투 네 개를 버릴 작정이다. 품이야 들겠지만 개운한 마음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다.



더불어, 머지않아 연락 올 '동창 모임'도 일부분은 정리하려고 한다. 그동안 쌓이고 쌓여 곪아 버린 마음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문드러져 버리지 않게.



어느 겨울, 늦은 오후.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사롭고

적당히 산미 가득한 커피 향은 감미롭다.



버린 만큼 채워지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곧 무언가 더 행복한 것으로, 마음 편안한 것으로

채워질 삶이 기대된다.





사진: UnsplashClint McKo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