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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양 Nov 17. 2019

오늘도 나는 차를 우린다

내가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내가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기분이 아주 좋을 때도, 내가 기분이 정말 나쁠 때도 차 한 잔이 나를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을 때 차를 마시면, 그 차의 향과 맛에 내가 둘러싸여 마치 나의 일상의 한 장면이 어떤 책 속 한 페이지에 있는 삽화처럼 뚜렷하게 저장이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삽화를 다시 바라보며 그 분위기에만 취해 있지 않고, 하나하나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한 모금 마실 때, 나의 기분을 좋게 해 준 사람에게 감사해하고, 또 한 모금을 마실 때 이렇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또 한 모금을 마시면 차를 마실 수 있음에도 감사하게 된다. 


사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차가 더 생각나기도 한다. 그래서 더 고맙기도 하다. 나 자신 때문에 속상해 울고 싶을 때, 누군가 때문에 너무 화가 났을 때에도 차 한 잔은 나에게 한 발자국 떨어져 그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해 준다. 사실 이때, 차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물을 끓이며 기다리고, 차를 고르며 서성이고, 우러나는 시간을 다시 기다리다 보면, 나 스스로를 기다려 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우러난 차를 찻잔에 담아 첫 모금을 마시면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짜증이 나고, 분노가 차오르고, 화가 솟아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던 것이 우선은 단전까지 내려와 준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걸어, 나 스스로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되면 일단은 성공인 셈이다.  


그렇게 마시고, 마시고, 또 우리고 마신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가 신경 썼던 그 모든 것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어떨 때는 내가 왜 그렇게 그 생각에 사로잡혀 안달이 났었는지 '내가 참 바보 같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일 때도 있었다. 찻잔을 비우며 나도 모르게 내 마음도 함께 비웠던 것 같다. 


마음속에 따뜻한 햇빛이 비추어질 때면 찻잔을 함께 따스하게 채워주고, 마음속에 비가 세차게 몰아치면 그 빗물을 함께 비워준다. 그러고 나서는 꼭 나를 채워 나를 보게 하고, 나를 비워 나를 보게 하는 것이 참 신비하면서도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차를 우리고, 천천히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마신다. 그 빈 찻잔 위로 떠오른 내가 어떤 모습인지, 빈 찻잔 속에 남겨진 나의 모습이 어떤지 가만히 바라봐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차를 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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