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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 Oct 24. 2022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책을 만들어야 한다면

일본 출판산업이 찾아낸 출판산업의 미래

참고:

1) 이 글은 2018년도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진행으로 다녀온 일본 출판시장 견학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2) 탈고가 이뤄지지 않아 서랍에 넣어뒀는데 생각해볼 부분이 있어 발행하는 것이니 오탈자와 비문은 양해 바랍니다.

3) 당시에는 한국에 작은서점이 증가하던 시기였고 한일간 교류가 원활했습니다.

4) 본문에 있는 링크들은 당시에 모두 연결이 가능한 URL이었지만 지금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링크가 바뀌었더라도 기록으로 남깁니다.



I. 들어가며: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

1. 한국 출판산업의 현재

동네책방이 인기를 끌면서 서울에만 2017년에 450여 개였던 책방이 1년 만에 600여 개까지 증가했다. 레드오션이었던 책방이 블루오션이 되는 사건으로, 최근 출판계에서는 가장 큰 이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출판산업 매출은 해마다 줄어들고, 올해도 연말이 다가오면서 폐점하는 서점이 속속 생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온라인에서 언제든 살 수 있는 책을 굳이 책방에서 사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책 자체를 사는 사람이 갈수록 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은 온라인 서점과 진흥원에서 조사해서 발표하는 '출판산업동향'을 통해 알 수 있다. 학습지나 교과서 등 특정한 분야로 잘라서 보면 판매량이 늘어난 경우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서점의 증가와 다르게 줄어들고 있는 판매량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서점이나 출판업계가 어떻게 유지해 나갈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인기를 끌던 동네책방들도 하나둘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일본 출판산업의 현재

옆 나라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책을 많이 읽는 독서 선진국이다.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지하철에서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도쿄의 경우 역마다 동네마다 대표 서점 하나씩은 반드시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출판산업이 어려운 지금의 일본 출판산업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일본도 인터넷 시작 이후의 출판산업은 하향세를 겪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숍으로 변화해서 눈에 띄는 서점이 있기도 하지만 폐업하는 대형 서점도 늘어나고, 중소형 서점들도 고전하고 있다. 독서 강국이었던 만큼 출판산업에 많은 시스템이 엮여있기 때문에 어쩌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의 혁명에서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출판산업의 구조는 다른 소비재 산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들고(출판사), 유통하고(유통사), 판매하는(서점) 각자의 역할을 통해 책을 순환시킨다. 기본적으로 콘텐츠, 디자인, 제작 퀄리티도 좋아야겠지만 그것을 적재적소에 유통하고, 돋보이도록 판매하는 출판산업의 시스템이 책의 판매율과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다.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은 이러한 출판산업의 시스템에 출판사나 서점보다 유통사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1-1) 유통사

산업화 이후, 일본의 출판 산업은 전체 산업군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할 만큼 계속 성장해왔다. 그러나 최고 매출(2조 6563억 엔)을 찍었던 1996년 이후 인터넷과 모바일의 영향으로 현재는 전체 매출이 반(2015년 1조 5220억 엔)으로 꺾일 만큼 내리막길이다. 이러한 매출의 급감은 우선 잡지의 매출이 줄어든 게 크다. 인터넷, 모바일 미디어의 약진으로 인해 잡지의 매출이 50% 이하로 급감하면서 관련된 유통산업, 출판사, 서점이 줄줄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출판산업 구조와 다르게 유통회사가 서점이나 출판사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급감한 잡지의 매출은 출판산업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일본은 유통회사라고 해서 단순하게 배본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점과 출판사의 대금을 조정하는 금융업의 기능도, 재난과 자연재해에 대한 보험기능도, 때로는 서점의 도산을 방어하고 그 피해를 흡수하여 출판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신용보증회사의 기능도 하고 있다. 이러한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유통사에서 배본은 사업의 근간을 이루는 일이다. 그런데 잡지의 매출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배본해야 하는 일도 줄었다는 뜻이다. 잡지를 배송하면서 신간도 같이 배송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동안 단 한 권이라도 배본하거나 반품할 수 있었지만, 매출이 줄고 잡지의 발간이 줄어든 지금은 그러한 배본 방법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잡지의 매출이 급감해서 생기는 수익률 악화는 유통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오고, 이는 곧 서점과 출판사에도 부담을 주게 되었다.


1-2) 출판사와 서점

잡지 매출이 줄었다고 하지만 단행본의 매출은 사실 크게 변화가 없다. 출판사와 서점이 어려워진 것은 그동안 잡지 매출에 의존해 운영해왔던 출판 순환 구조에 있다. 잡지의 판매 수익으로 단행본의 제작에 투자하던 출판사는 잡지가 판매되지 않자 신간 단행본을 출판할 동력을 잃게 된다. 신간 단행본이 줄어들면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방문율도 떨어진다. 결국 출판 순환 구조가 붕괴되고 만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최근 100평 이하의 작은 서점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러한 출판 순환 구조를 벗어나 가족경영으로 수익을 개선하고, 개인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력을 내세워 살아남기 위함이다. 기존에 대형서점의 미니어처로 운영하는 방법(잡지의 유통과 매출에 의존하는 방법)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 모두 출판산업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독서 강국이었던 일본이 대처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한국의 출판산업도 준비가 필요하다.


II. 본문: 일본 출판 산업과 새로운 변화


1. 책이 없는 서점, 디자인을 하지 않는 북디자인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대형서점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츠타야와 무지북스를 비롯해 일본의 전통 서점도 여러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 새롭게 바뀐 서점들의 인기로 해외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한국에서도 이런 서점들은 많이 소개되어 알려졌다. 새롭게 생겨난 또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통을 이어가는 서점에서 일본 출판산업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1-1) 히비야 센트럴 마켓

최근 가장 파격적인 행보는 대형서점 '유린도有隣堂'서점이다. 유린도 서점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형서점이지만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서점이 필요하게 되었다.

2018년 3월 29일, 책과는 전혀 상관없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나미 타카유키南貴之 http://alpha-tokyo.com'에게 프로듀스를 맡기고 일본의 인기 셰프 '마루야마 치히로丸山智博 https://www.instagram.com/chihiromaruyama'가 디렉션한 식당(一角)이 있는 복합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바로 '히비야 센트럴 마켓'이다.

히비야 센트럴 마켓은 넓은 공간에 하나의 가상 도시를 만들어둔 형태다. 물론 책을 판매하고 있지만 쇼와시대의 레트로 한 간판을 지나 입구를 들어서면 유린도 서점답게 상징적인 책들이 잔뜩 꽂혀있는 빈티지숍 'Library'이 있고, 그 옆으로는 기차역의 키오스크처럼 디자인한 간판과 함께 구마모토의 유명 커피 전문점인 'AND COFFEE ROASTERS', 그리고 가상의 운송회사를 이미지화한 'FreshService'가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루야마 치히로의 식당 '일각(一角)'과 옛날 이발소의 느낌인 '이발사 히비야', 프랑스 재 빈티지 프레임을 모아둔 안경점 'CONVEX'와 시부야의 셀렉트숍 'Graphpaper'도 입점해있습니다. 그밖에 갤러리 공간에서는 기획 전시가 열린다.

히비야 센트럴 마켓이 만들어질 당시, 유린도의 마츠노부 켄타로松信 健太郎 전무이사는 "일본에서 가장 새롭고 멋진 서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유린도 지점을 만들기로 했다. 새로운 서점의 콘셉트를 잡아나가고 있던 시기에 미나미 타카유키의 "지금까지 없던 가게"라는 콘셉트가 마음에 들어 '책이 없더라도 괜찮다'는 조건으로 전체 프로듀스를 맡겼다. 유린도는 "책이란 단지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통해 '정보'와 '오락' 또는 '꿈'을 파는 것"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책이 없다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기에 '서점'을 다시 정의하고 어쩌면 책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서점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책에 대한 고민은 계속 남아있고, 그런 마음을 알게 된 미나미 타카유키가 여전히 책이 있는 공간으로서의 '히비야 센트럴 마켓'을 제안했다.

[유린도 서점 웹사이트 http://www.yurindo.co.jp/ ]

[히비야 센트럴 마켓 사이트 https://hibiya-central-market.jp ]


1-2) HMV&BOOKS HIBIYA COTTAGE

다카라즈카 극장이 있는 도쿄의 히비야 지역은 최근 히비야센트럴마켓이 있는 '도쿄미드타운히비야'를 비롯해 새롭게 오픈한 상점들이 많이 생겼다. 도시를 작정하고 바꿨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대형 쇼핑몰들이 주는 이미지가 무척 화려하다. 도쿄미드타운히비야의 맞은편에는 '히비야챈터Hibiya Chanter'라는 쇼핑몰이 새롭게 리모델링되었다. 쇼핑몰 대부분이 여성들을 위한 숍의 특성에 맞게 3층에는 여성을 위한 서점도 입점했다. "HMV&Books HIBIYA COTTAGE". 도쿄의 여성들이 별장처럼 편안히 쉬면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찾길 바란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여성들에게 공감받을 다양한 표현(이야기 · 말 · 음악 · 영상 · 예술 · 정보)을 위해 '재미', '기쁨', '휴식', '배움', '발견', '성장', '미래'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지역에 어울리는 음반과 DVD 등 영상매체도 같이 판매하고 있다. 서가의 형태는 다른 서점과 비슷하지만 HIBIYA COTTAGE의 특징은 책의 배치에 있다.

일본의 일반적인 단행본 형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형태 외에도 인기 있는 책을 저렴하게 파는 작은 형태의 "문고판"이 있다. 단행본과 같은 디자인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책이 작기 때문에 단순한 겉표지를 디자인하고 제호를 키우는 형태로 새로운 디자인 커버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HIBIYA COTTAGE는 이러한 문고판 단행본들을 분야와 내용에 상관하지 않고 단지 표지 색상만을 이용해 무지개처럼 퍼지는 배열로 한쪽 서가를 꾸몄다. 화장품을 전시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책을 배치하는 것으로 서점에 방문한 독자들의 시선을 끈다.

[HIBIYA COTTAGE 웹사이트 https://www.hmv.co.jp/fl/34/71/1/? ]


1-3) 산세이도

진보초 1-1번지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산세이도"서점은 1881년 창업한 역사 깊은 서점이다. 일본의 "서점대상(本屋大賞, 2004년 설립된 문학상. 그동안의 문학상과는 다르게 작가나 문학가가 참가하지 않고 단지 "신간을 판매하고 있는 서점의 서점인들"이 뽑는다.)"을 만든 사람들 중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전문 서점인인 "우치다 다케시"과장이 영업기획실에 근무하고 있다. "우치다 다케시" 과장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적인 서점이지만 산세이도 역시 책의 판매는 줄어들었기 때문에 잡화를 판매하는 코너가 생겼다. "서점대상"처럼 산세이도 직원이 뽑은 "직원대상"도 책을 팔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카레를 좋아하는 직원이 맡은 카레 코너는 시작할 당시 일본 출판산업에 큰 이슈가 되었다. 평소 "레토르트(식품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살균해서 포장하는 방식) 카레"나 "가루 카레"는 책과 비슷한 크기의 박스에 담겨서 판매되곤 했는데 이를 아이디어로 서가에 카레를 꽂아서 판매하는 방식이다. 당시에 식품분야에서 책의 판매보다 카레의 판매가 높았다.

서점인이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북디자인을 설명하기도 했다. "화려하고 멋진 디자인이 분명 잘 팔리고 있지만 반대로 디자인하지 않은 것 같은 책도 그러한 책들 사이에서 잘 팔리고 있다. 서가에서 책을 배치할 때 전부 화려한 책들로 채우면 오히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화려한 책들 사이에 그런 디자인하지 않은 책을 껴 넣어두면 그것이 더 눈에 띄어 잘 팔린다"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아닌 서점인의 관점에서는 디자인보다는 "콘텐츠가 더 중요"한 책의 본질이 우선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산세이도에서는 책의 표지를 전부 덮어버리는 광고 커버가 있는 책을 판매하고 있다. 매장의 점원이 추천하는 문구를 가득 채운 광고 커버는 출판사에서 마음에 들어 이후 출간될 때 아예 표지로 사용기도 했다. 디자이너가 고민한 디자인보다 직접 책을 판매하는 서점인이 좀 더 책의 본질에 접근했다는 생각이다. 책의 판매에 있어 디자인이 중요한지 마케팅이 중요한지 아니면 정말 콘텐츠 만이 중요한지 고민할 수 있겠지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산세이도는 그러한 부분에서 서점의 역할에 무척 충실한 곳이다.

[산세이도 서점 웹사이트 https://www.books-sanseido.co.jp ]



2. 마케터가 기획하는 책, 편집자가 디자인하는 책, 디자이너가 만드는 책

출판산업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일본이었지만 한동안 그림책의 수요는 꾸준했다. 오히려 그림책을 찾는 성인의 비율이 늘어났다. 성인들도 쉽고 따듯한 내용의 그림책을 많이 보는 것으로 힐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상과는 다르게, 갈 곳을 잃은 정년퇴직자들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손자들을 위해 그림책을 사 갔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책이 왜 팔리는지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마케팅하기도, 책을 만들기도 어려운 시대다.

이런 시대에 마케터가 단지 책을 팔기 위해 마케팅하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따라잡기 어렵다. 마케터/편집자/디자이너가 분야에 막혀있지 않고 많은 대화를 한다면 어떤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2-1) 포레스트출판

그림책의 수요에 대한 재미있는 결론은 포레스트출판フォレスト出版의 "오타 히로시太田 宏"대표가 생각한 그림책이 잘 팔리는 이유다. 경제경영서 전문 출판사의 대표답게 일본 출판산업의 흐름을 파악하고 팔리는 책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을 단편적이지만 그림책을 통해 설명했다.

한동안 그림책이 베스트셀러였다면 최근 일본의 최근 베스트셀러는 비즈니스 서적이었다가 이제는 건강관리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것도 <건강관리 식사방법>이나 <하루 1분 인생 변화>, <읽기만 해도 시력이 좋아지는 책> 등 민간요법 책이 많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타 히로시 대표는 두 가지 질문에서 결론을 찾아내었다.

첫 번째 질문. "정년 퇴직자들이 갈 곳이 어디인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갈 곳을 이른 정년퇴직자들은 돈이 안 드는 곳을 찾아간다. 1위는 도서관, 2위는 극장, 3위는 스포츠, 그리고 마지막 4위가 서점이다. 앞서 그림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이 서점에서 자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는 아끼는 손자를 위해 어린이 그림책을 사 갔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 "이러한 정년퇴직자들은 어떤 것을 궁금해할까?" 1위는 역시 건강. 그리고 2위가 돈, 3위가 장래에 대한 불안이다. 1위가 건강인 이유는 바로 이어서 나온 2위 돈 때문이다. 건강해야 병원비가 들지 않고, 그래야 고령화 사회에서 자녀들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한편 병원비가 많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의료보험비가 많이 든다는 뜻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의료보험의 비효율성 때문에 민간요법을 장려하고, 건강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출판사가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건강관리 식사방법> 같은 민간요법 책은 잘 팔리게 된다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설명이다.

이처럼 책을 판다는 것은 다양한 정보의 파악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수요를 예측하는 것도 필요하다. 좋은 책을 만든다고 해도 독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서점에서 책을 발견할 수 없다면 결국 책은 팔리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서 마케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새로운 수요를 찾아내고, 적절한 책을 공급하는 것은 좋은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포레스트출판 웹사이트 https://www.forestpub.co.jp ]


2-2) 쇼분샤

마케터가 다양한 정보를 통합해 책을 기획하기 위해 편집자와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면, 편집자는 좋은 책을 디자인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대화를 해야 한다. 쇼분샤晶文社의 '사이토 노리타카齊藤典貴' 편집장은 한국/일본을 통틀어 그동안 만나본 어느 편집자보다 열린 마인드의 편집인이다. 사이토 편집장이 들려준 쇼분샤의 책 만들기는 편집자가 디자이너와 같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쇼분샤는 소규모의 출판사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1960년부터 지금까지 문학/철학 등 인문서적을 만들고 있는 인기 있는 출판사다. 지금까지 나온 책이 3100권 이상으로 연 50권 이상 출간하고 있다. 1964년 대형 출판사에 밀리지 않기 위해 기획한 "웨스턴 3부작"의 디자인을 시작으로, 디자이너 한 사람에게 출판사의 디자인을 맡기고 있다. 바로 디자이너 "히라노 코가平野甲賀"이다. 30년 가까이 한 회사의 디자인을 한 사람이 맡아서 해온 것은 일본에서는 무척 드문 일이다. 그만큼 쇼분샤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히라노 코가는 80세가 된 얼마 전까지도 쇼분샤의 디자인을 해왔다니 그의 에너지도, 쇼분샤의 신뢰도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쇼분샤도 히라노 코가의 은퇴를 앞두고 다음 디자이너를 고민해야 했고, 요즘은 믿을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으면서 여러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있다.

쇼분샤에서 편집자의 역할에 대해 사이토 편집장은 다음과 같이 압축한다. "편집자의 의향을 디자이너의 영역까지 침범하면 안 된다." 쇼분샤에서 있었던 예를 들면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글씨의 크기를 키워달라는 요청을 한 것을 보고 "그것은 디자이너의 영역이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라고 했다. 글씨의 크기는 결국 가독성을 높여달라는 뜻으로 한 의견이고, 그 방법이 글씨를 키우는 것일지 다른 디자인을 할 것인지는 디자이너의 몫이란 뜻이다.

사이토 편집장은 디자인 시안이 잘못 나오는 것도 결국 편집자의 탓으로 말한다. 책의 콘셉트를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신뢰하는 것만큼 까다로운 기준으로 디자이너를 고르기 때문에 가능한 마인드일 것이다.

최근 쇼분샤는 한국 문학 중에 선별하여 시리즈를 만들었다. "한국 문학의 선물" 시리즈로 한강의 <희랍어의 시간>,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등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한다. 쿠온출판사(CUON)에서 이미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는 시리즈로 한강의 <채식주의자> 등을 출판했기 때문에 쇼분샤로서는 한국문학끼리 싸우지(?) 않도록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디자인이 겹치지 않도록 이미 한국문학시리즈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피해서 디자인을 의뢰할 텐데 사이토 편집장의 선택은 달랐다. 같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면 오히려 디자이너가 그러한 차이를 주면서도 한국문학을 잘 살려서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란다.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는 에피소드다.

[쇼분샤 웹사이트 https://www.shobunsha.co.jp]


2-3) 분페이긴자

"요리후지 분페이寄藤文平"는 앞서 쇼분샤의 사이토 편집장이 선택한 디자이너다. 그의 스튜디오 "분페이 긴자文平銀座"는 우리가 알던 기존 회사와는 다른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있다. 직원이 없고 각각 다른 계약을 했기 때문에 같이 일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튜디오의 가구 배치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때그때 일에 맞춰서 적당한 위치로 책상을 옮겨가면서 일한다. 요리후지분페이도 마찬가지로 책상이 따로 정해지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 할 때는 각도가 조정되는 화판 같은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할 경우 또 다른 책상으로 옮겨가서 일을 하고 있다. 직원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운영방법이다.

분페이 옆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스즈키 지카고鈴木千佳子"씨도 한동안은 요리후지분페이의 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몇 년 전부터 독립해서 일하고 있다. 분페이긴자에서 나오는 디자인을 보면 '요리후지분페이+스즈키지카고'가 쓰여있는 책들이 있는데, 서로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을 분담해서 작업하고 이름을 같이 넣는 것이다.

스즈키씨의 작업은 손으로 직접 만든 느낌이 많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출간된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口笛を吹きながら本を賣る 柴田信,最終授業>의 원서 디자인도 스즈키 씨의 작품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쓰지 않고 모든 요소를 직접 만든 판화로 찍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컴퓨터가 낼 수 없는 손맛이 디자인에서도 바로 느껴진다.(이 책의 편집자는 앞서 소개한 쇼분샤의 "사이토 노리타카", 저자는 출판 저널리스트 "이시바시 다케후미"다)


요리후지분페이의 작업방법은 무척 치밀한 계획을 통해 큰 그림부터 완성된 그림까지 점층적으로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자신이 읽은 책의 한 단원을 명함 크기의 종이로 요약해서 글과 그림으로 담아둔 뒤에 여러 장을 모아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둔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면서 생각이 날 때마다 확대해가며 살펴볼 수 있어서 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함 묶음으로 된 원고 더미가 여러 개 만들어진 뒤에 이것을 커다란 종이에 펼쳐두듯 자신의 머리로 필터링해서 그려나간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이 콘텐츠를 이해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도 그림 속에 담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부분을 챕터별로 정리해서 책으로 완성하게 된다.

콘텐츠를 시각화하는 방법은 디자이너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분페이의 방법이 꼭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외국어 단어 외우듯 명함에 콘텐츠를 옮기고 다시 넓은 종이로 옮기는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작업 방법을 이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자신이 필요해서 만든 콘텐츠를 책으로 출간하는 것은 그 과정이 어렵지만 어려운 출판시장에서 그 노력을 발견하는 독자를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앞서 얘기했듯이 최근 '쇼분샤'에서는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시리즈 책이 나왔다. 기존 문학과 다르게 기하학적 선으로 그려진 일러스트로 디자인된 시리즈는 최근 분페이가 작업한 것이다. 하나의 시안만 만드는 분페이의 작업 스타일 때문에 떠오르는 감각으로만 작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스케치를 보면 완성단계까지 여러 번 고민한 흔적이 있다. 시안을 여러 개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 가지 시안의 완성도를 계속해서 높여가고, 그 과정을 편집자와 고민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방법이다. 편집자와 디자이너 간의 신뢰가 뒷받침되었을 때 그리고 편집자가 자신의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디자이너의 감각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페이 긴자 웹사이트 http://www.bunpei.com ]


III. 맺으며: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책을 만들어야 한다면

일본은 65세 이상의 인구비율, 즉 고령화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단순히 고령 인구가 늘어났다기보다는 노인들은 장수하고, 출산율이 떨어져 청년층이 감소했다. 2-30대 청년층은 그 나이에 맞게 최신 정보의 습득이 빠른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책을 읽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한편 노인들은 변화를 미쳐 따라가지 못해 여전히 독서인구로 남아있다.

출판산업에서 독자가 감소했다는 것은 전체 독서인구를 말하는 것이지만 세세하게 살펴본다면 청년층의 독서인구는 위와 같은 이유로 줄어들었고, 노년층의 독서인구 변화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독서인구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노년층이 감소되면 전체 독서인구의 감소는 예정된 일일 수밖에 없다. 출산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청년층이 다시 책을 읽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본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한국도 이제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고 앞으로 일본보다 빠르게 노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금의 흐름으로는 결국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준비하는 일본 출판산업의 변화는 새롭다기보다 원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과연 무엇인지, 그 "책을 만든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책을 판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두는지 되돌아본다는 것이다. 히비야센트럴마켓이 유희의 산물로서의 "책"을 정의하고 책이 없는 서점을 열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콘텐츠를 쌓아서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처럼, 다양한 관점을 통해 "책을 판다는 것은 곧 책의 기획에서부터 시작"이라는 포레스트출판사처럼 책의 근본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서의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출판산업도 결국에는 독서인구의 축소와 맞물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일본과 다른 시작점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벌써 그런 시대일 수도 있겠다. 매년 줄어들고 있는 출산율과 출판산업의 매출 규모를 보더라도 말이다.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은 결국 인터넷과 모바일 탓만이 아닌 사회적인 흐름에서 생겨난 복합적인 문제다. 독서의 양을 늘린다고 해서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어서 그동안의 정책적인 독서운동이나 출판 장려로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의 출판산업에서 배워야 할 부분은 유행에 따라 달라지는 이벤트나 화려한 북디자인 같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닌 "책을 만드는, 책을 파는, 책을 읽는" 책의 순환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책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이나 자세에 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서 팔리는 책만 만들거나 남이 만들어둔 콘텐츠를 따라서 만든다고 해서 출판산업이 성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출판이 산업(産業)으로서 경제적인 풍요를 이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책"이라는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만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서 책을 만드는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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