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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 Oct 24. 2022

도쿄, 책의 도시를 만나다.

<2018 글로벌 출판전문인력 양성>프로그램을 다녀와서.

<참고>

1) 이 글은 2018년도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진행으로 다녀온 일본 출판시장 견학에 대한 “여행기”입니다. 앞서 발행한 보고서와 성격을 달리 한 글입니다.

2) 탈고가 이뤄지지 않아 서랍에 넣어뒀는데 생각해볼 부분이 있어 발행하는 것이니 오탈자와 비문은 양해 바랍니다.

3) 당시에는 한국에 작은서점이 증가하던 시기였고 한일간 교류가 원활했습니다.

4) 본문에 있는 링크들은 당시에 모두 연결이 가능한 URL이었지만 지금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링크가 바뀌었더라도 기록으로 남깁니다.

5) 사진은 추후에 삽입될 수 있습니다.




도쿄. 책의 도시를 만나다.

15년 전, 처음 만났던 도쿄의 풍경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출근하는 사람과 높은 건물, 복잡한 지하철만 봤으니 차이점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의 여행 뒤에 느낀 도쿄는 서울과 많은 점이 다른 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점과 지하철에서 만화책이던 소설책이던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단편적인 부분이겠지만 그러한 모습을 통해 일본의 저력을 확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한국에서는 책 읽는 모습을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이겠습니다.

2018년 9월, 출판진흥원의 주최로 다녀온 <2018 글로벌 출판전문인력양성>프로그램은 일본의 출판산업을 관찰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5일 동안 일본의 출판산업 최전선(?)을 만나보았지만 한국과 비슷하게 인터넷 시작 이후의 출판산업은 그리 호황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점의 매출이 급감한 탓에 어떻게 하면 책을 많이 읽게 할 수 있을지, 잘 팔 수 있을지가 큰 고민인 듯합니다.

일본의 출판산업도 외형만 봐서는 한국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독자의 수' 만큼 조금만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책을 다루는 여러 사람을 만나볼 수 있었고,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본의 출판산업과 출판디자인을 통해 앞으로의 출판과 디자인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민의 한 방편으로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디자이너로서 또 한때는 서점인으로서 이번 프로그램이 많은 자극이 되었고, 비록 부족한 글솜씨지만 관심 있는 많은 분들께 그 경험이 공유되길 바랍니다.


첫째 날. 전시와 서점을 만나다.

저를 포함해 9명의 북디자이너와 운영위원 2명(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장, 윤혜정 출판산업지원센터장) 그리고 현지 코디네이션을 맡은 <서점은 죽지 않는다>의 저자 '이시바시 다케후미石橋毅史'씨를 포함해 총 12명이 도쿄의 한 복판을 같이 다닌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다행히 첫날은 공식일정이 없고 운영위원 두 분도 다른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디자이너 9명은 서로의 관심사로 그룹 지어 도쿄의 여러 서점과 전시장을 관람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다이바에서 열리고 있는 <디자인 아! design Ah!>전시를 보는 일정으로 이번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오다이바의 미래과학관에서 열린 <디자인 아!> 전시는 NHK교육TV에서 어린이들의 '디자인 마인드'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을 디자이너 '사토 타쿠佐藤卓'가 디렉팅 하여 전시로 확장한 것입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어린이들의 아! 소리를 들으며 참여형 전시, 영상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보던 사소한 사물들도 다양한 '디자인 마인드'로 해석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문분야를 넘어 일상의 상식처럼 가까이 있는 디자인을 이러한 프로그램으로 경험한다면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디자인 마인드'가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디자인 아! 전시 공식 사이트 https://www.design-ah-exhibition.jp]


전시장을 나와서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오다이바의 관광특구가 있습니다. 관광으로 온 일정이라면 레인보우브릿지가 보이는 카페에서 여유라도 부릴 텐데, 다음 목적지가 있어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상업과 레저시설이 가득한 관광특구 오다이바에도 서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익사이팅 북스토어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 오다이바점입니다.(본점은 시부야에 있습니다.) 처음 "빌리지뱅가드"를 방문하면 서점이라는 생각보단 잡화점 같다고 느껴집니다. 입구부터 빼곡하게 귀엽거나 엽기적이거나 유행하고 있는 최신 잡화들이 놓인 가운데 색다른 구성으로 책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업종을 서점이라고 표방하는 만큼 이곳의 책들은 잡화를 팔 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잡화를 주제별로 묶어주는 주인공입니다.

[빌리지 뱅가드 사이트 https://www.village-v.co.jp ]


다음 일정으로 다른 전시를 잡아두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한 상황이라 유라쿠쵸에 있는 '무인양품'으로 일정을 변경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2003년 영플라자점을 시작으로 매장이 늘어나고 있는 '무인양품'은 198년대부터 시작한 라이프스타일숍입니다. 일본에서는 4년 전부터 매장 내에 책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대형서점 '츠타야Tsutaya'가 다이칸야마에 T-site를 만들고 라이프스타일숍으로서의 서점을 만들면서 대형서점에 잡화를 팔기 시작했는데 무인양품은 반대로 잡화를 팔고 있던 라이프스타일숍에서 책을 팔기 시작하면서  '무지북스MUJI BOOKS'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5년 유라쿠쵸점의 리뉴얼이 그 시작이라 이곳을 찾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무지북스는 "Life with Books"라는 슬로건에 맞게 도서를 큐레이션하고 있는데 일본어의 사さ행- 사시스세소さしすせそ를 섹션명으로 해서 5개 주제(사さ는 책, 시し는 음식, 스す는 소재, 세せ는 생활/인생, 소そ는 옷)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폐장시간이 가까워지자 우리의 발걸음도 바빠집니다. 책과 소품을 사서 줄 서있는 사람들이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는 줄어든 느낌이라 출판의 위기가 일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무지북스 소개 사이트 http://www.muji.com/hk-en/mujibooks/ ]


둘째 날. 일본의 출판시장을 만나다.

평소에는 TV를 안 봅니다만 여행지의 호텔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TV를 틉니다. 현지 느낌을 더 느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때마침 틀어둔 채널이 NHK교육TV였습니다. 첫날 봤던 <디자인 아!>전시의 방송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어서 한참을 봤습니다. TV에서 나오는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상만 보고도 디자인을 생각해볼 수 있는 구성을 하고 있어서 한국에 돌아가서도 해당 채널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TV프로그램은 끝나지 않았지만 오늘의 일정을 생각하며 서둘러 호텔에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2018 글로벌 출판 전문인력 향상>프로그램은 1시간 30분가량의 강의를 오전에 2회, 오후에 2회를 듣는 일정으로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 총 12개의 강의를 듣게 됩니다. 첫날에 자유로운 일정과 다르게 아침일찍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듣고 있으니 다시 학생이 된 기분입니다.


첫 수업은 '문화통신사' 호시노 와타루 편집장의 <일본 출판 시장의 현황>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단군이래(?) 호황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출판 산업이지만 일본의 경우 출판 산업이 전체 산업군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만큼 계속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고 매출(2조6563억 엔)을 찍었던 1996년 이후 인터넷과 모바일의 영향으로 현재는 전체 매출이 반토막(2015년 1조5220억 엔)이 날 정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매출의 급감은 잡지의 매출이 줄어든 게 큽니다. 잡지의 매출이 50%이하로 급감하면서 관련된 유통산업, 출판사, 서점이 줄줄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잡지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이유는 한국의 출판산업 구조와 다르게 유통회사가 서점이나 출판사보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출판 시장 구조에 있습니다.

유통회사라고 해서 단순하게 배본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점과 출판사의 대금을 조정하는 금융업의 기능도, 재난과 자연재해에 대한 보험기능도, 때로는 서점의 도산을 방어하고 그 피해를 흡수하여 출판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신용보증회사의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잡지의 매출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배본해야 하는 일도 줄었다는 뜻이 됩니다. 잡지를 배송하면서 신간도 같이 배송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동안 단 한 권이라도 배본하거나 반품할 수 있었지만, 매출이 줄고 잡지의 발간이 줄어든 지금은 그러한 배본 방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잡지의 매출이 급감해서 생기는 수익률 악화는 유통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오고, 이는 곧 서점과 출판사에도 부담을 주게 되었습니다.

잡지 매출이 줄었다고 하지만 단행본의 매출은 사실 크게 변화가 없었습니다. 서점과 출판사가 어려워진 것은 그동안 잡지 매출에 의존해 운영해왔던 출판 순환 구조에 있습니다. 잡지의 판매 수익으로 단행본의 제작에 투자하던 출판사는 잡지가 판매되지 않자 신간 단행본을 출판할 동력을 잃게 됩니다. 신간 단행본이 줄어들면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방문율도 떨어집니다. 결국 출판 순환 구조가 붕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최근 100평 이하의 작은 서점이 생겨나는 이유는 이러한 출판 순환 구조를 벗어나 가족경영으로 수익을 개선하고, 개인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력을 내세워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기존에 대형서점의 미니어처로 운영하는 방법(잡지의 유통과 매출에 의존하는 방법)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시장 변화에 대형서점도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츠타야와 무지북스를 비롯해 일본의 전통 서점도 여러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가장 파격적인 행보는 대형서점 '유린도有隣堂'입니다. 유린도 서점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형서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출판 시장이 급격히 변화면서 새로운 형태의 서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3월 29일, 책과는 전혀 상관없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나미 타카유키南貴之 http://alpha-tokyo.com'에게 프로듀스를 맡기고 일본의 인기 셰프 '마루야마 치히로丸山智博 https://www.instagram.com/chihiromaruyama'가 디렉션한 식당(一角)이 있는 복합 문화공간을 만들게 됩니다. 바로 '히비야 센트럴 마켓'입니다.

[히비야 센트럴 마켓 사이트 https://hibiya-central-market.jp ]


히비야 센트럴 마켓은 넓은 공간에 하나의 가상 도시를 만들어둔 형태입니다. 물론 책을 판매하고 있지만 쇼와시대의 레트로 한 간판을 지나 입구를 들어서면 유린도 서점답게 상징적인 책들이 잔뜩 꽂혀있는 빈티지숍 'Library'이 있고, 그 옆으로는 기차역의 키오스크처럼 디자인한 간판과 함께 구마모토의 유명 커피 전문점인 'AND COFFEE ROASTERS', 그리고 가상의 운송회사를 이미지화한 'FreshService'가 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루야마 치히로의 식당 '일각(一角)'과 옛날 이발소의 느낌인 '이발사 히비야', 프랑스재 빈티지 프레임을 모아둔 안경점 'CONVEX'와 시부야의 셀렉트숍 'Graphpaper'도 입점해있습니다. 그밖에 갤러리 공간에서는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히비야 센트럴 마켓이 만들어질 당시, 유린도의 마츠노부 켄타로松信 健太郎 전무이사는 "일본에서 가장 새롭고 멋진 서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유린도 지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서점의 콘셉트를 잡아나가고 있던 시기에 미나미 타카유키의 "지금까지 없던 가게"라는 콘셉트가 마음에 들어 '책이 없더라도 괜찮다'는 조건으로 전체 프로듀스를 맡겼다고 합니다. 유린도는 "책이란 단지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통해 '정보'와 '오락' 또는 '꿈'을 파는 것"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책이 없다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기에 '서점'을 다시 정의하고 어쩌면 책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서점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책에 대한 고민은 계속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알게 된 미나미 타카유키는 여전히 책이 있는 공간으로서의 '히비야 센트럴 마켓'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서점의 형태에는 드라마처럼 한 편의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유린도 서점 웹사이트 http://www.yurindo.co.jp/ ]


두 번째 수업은 <디자인의 현장> 전 편집장이자 현재 '도쿄예술대학東京芸術大学'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 '후지사키 게이이치로藤崎圭一郎'교수의 수업이었습니다. 도쿄예술대학이 무사시노미술대학이나 타마미술대학과는 다르게 실무보다는 이론 중심의 수업을 해오고 있기 때문인지 후지사키 교수의 강연에서는 실무자보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상업화의 목적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이 디자이너에게 중요하다는 "도전적인 메시지" 같은 것입니다. 사실 사회에 나오면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편집자의 가이드 내에서 디자인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디자인을 사회에 나와서는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후지사키 교수의 말처럼 "'스기우라 고헤이杉浦 康平'의 디자인과 같은 작품은 이 시대에서는 허락하지 않을 듯"합니다. 한편 상업 출판에서는 제한이 있지만, 이러한 제한에서 벗어나기 위한 활동으로 "독립출판"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편집자를 통하지 않은 디자이너의 결과물이 독자를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코믹마켓"도 그런 점에서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1인 출판사'나 '독립출판'은 큰 이슈입니다. 디자이너가 편집자를 통하지 않고, 또 편집자가 디자이너를 통하지 않고 다양한 출판물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들이 하향세를 보이는 출판산업이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후지사키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도 일본의 출판산업에서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쿄예술대학 웹사이트 https://www.geidai.ac.jp ]


후지사키 교수가 디자이너와 편집자와의 관계에 대해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쇼분샤晶文社의 '사이토 노리타카齊藤典貴' 편집장은 한국/일본을 통틀어 그동안 만나본 어느 편집자보다 열린 마인드의 편집인이었습니다. <쇼분샤의 책 만들기>를 통해 사이토씨가 디자이너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쇼분샤는 소규모의 출판사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1960년부터 지금까지 문학/철학 등 인문서적을 만들고 있는 인기 있는 출판사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책이 3100권 이상으로 연 50권 이상 출간하고 있습니다. 1964년 대형 출판사에 밀리지 않기 위해 기획한 "웨스턴 3부작"의 디자인을 시작으로 디자이너 한 사람에게 출판사의 디자인을 맡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디자이너 "히라노 코가平野甲賀"입니다. 30년 가까이 한 회사의 디자인을 한 사람이 맡아서 해온 것은 일본에서는 무척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쇼분샤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히라노코가는 80세가 된 얼마 전까지도 쇼분샤의 디자인을 해왔다니 그의 에너지도, 쇼분샤의 신뢰도 상상 이상입니다. 하지만 히라노 코가의 은퇴로 다음 디자이너를 고민해야 했고, 그와 같이 디자인을 맡길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으면서 요즘은 여러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토씨는 쇼분샤에서 편집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압축합니다. "편집자의 의향을 디자이너의 영역까지 침범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글씨의 크기를 키워달라는 요청을 한 것을 보고 그것은 디자이너의 영역이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글씨의 크기는 결국 가독성을 높여달라는 뜻으로 한 의견이고, 그 방법이 글씨를 키우는 것일지 다른 디자인을 할 것인지는 디자이너의 몫이란 뜻입니다. 디자인 시안이 잘못 나오는 것도 결국 편집자의 탓이라고 합니다. 책의 콘셉트를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연을 듣고 있는 우리가 모두 북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지만, 디자이너를 신뢰하는 것만큼 까다로운 기준으로 디자이너를 고르기 때문에 가능한 마인드입니다.

최근 쇼분샤는 한국 문학 중에 선별하여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한국 문학의 선물>시리즈입니다. 한강의 <희랍어의 시간>,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등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쿠온출판사(CUON)에서 이미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는 시리즈로 한강의 <채식주의자> 등을 출판했기 때문에 쇼분샤로서는 한국문학끼리 싸우지(?) 않도록 조율할 필요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디자인이 겹치지 않도록 이미 한국문학시리즈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피해서 디자인을 의뢰할 텐데 쇼분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같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면 오히려 디자이너가 그러한 차이를 주면서도 한국문학을 잘 살려서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디자이너가 바로 이번 프로그램의 마지막 강의를 해줄 "요리후지 분페이寄藤文平"입니다.)

[쇼분샤 웹사이트 https://www.shobunsha.co.jp]


사이토씨의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진보초 근교에 있는 출판 디자이너 '사토 아사미佐藤亜沙美'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최근 일본의 출판디자인을 선도하고 있는 사토 아사미씨는 단행본뿐만 아니라 매거진, 광고, 음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한다는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아사미 씨의 디자인 특징은 '계획Plan'입니다. 작업들이 대부분 화려하고, 아이디어가 많이 담긴 그리고 공들여서 작업해야 하는 스타일인데 이러한 작업의 이면에는 아주 자세하게 정리한 계획표가 있었습니다. 사토씨는 원고를 비판적으로 읽고, 아이디어를 체크해서 Plan을 만든다고 합니다. 자세한 계획을 짜는 것은 디자인을 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출판사와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모두 사이토 씨와 같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에 공을 들이는 것은 우리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보다 보니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사토 아사미 씨의 스튜디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책 보다 모두가 좋아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사토 씨의 바람을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북디자인을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토 아사미 웹사이트 http://www.satosankai.jp]


다시 소그룹으로 나눠져 보낸 저녁시간은 앞서 설명한 '히비야 센트럴 마켓'을 비롯해 새롭게 등장한 서점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보냈습니다. 다카라즈카 극장이 있는 히비야는 최근 히비야센트럴마켓이 있는 '도쿄미드타운히비야'를 비롯해 새롭게 오픈한 상점들이 많습니다. 도시를 작정하고 바꿨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대형 쇼핑몰들이 주는 이미지가 무척 화려합니다. 도쿄미드타운히비야의 맞은편에는 '히비야챈터Hibiya Chanter'라는 쇼핑몰이 있습니다. 쇼핑몰 대부분이 여성들을 위한 숍이어서인지 3층에 위치한 서점 "HMV&Books HIBIYA COTTAGE"도 여성을 위한 서점입니다. 도쿄의 여성들이 별장처럼 편안히 쉬면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찾길 바란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여성들에게 공감받을 다양한 표현(이야기 · 말 · 음악 · 영상 · 예술 · 정보)을 위해 '재미', '기쁨', '휴식', '배움', '발견', '성장', '미래'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지역에 어울리는 음반과 DVD등 영상매체도 같이 판매하고 있습니다. 서가의 형태는 다른 서점과 비슷하지만 부분부분 특색 있는 책의 배치를 보면 책을 다루고 있는 느낌이 꼭 화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HIBIYA COTTAGE 웹사이트 https://www.hmv.co.jp/fl/34/71/1/? ]


히비야에서 벗어나 '쿠사마 야요이草間 彌生'의 작품이 걸려있던 "긴자식스GSIX"로 이동합니다. 도쿄에 들릴 때마다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늘 지나치고야 마는 긴자식스. 이번에도 폐점시간이 다가와서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긴자식스의 영업시간외에 입점되어 있는 츠타야 서점은 꽤 여유 있는 시간까지 운영을 하기 때문에 가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프랑스의 개념미술 작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작품으로 로비 전시가 바뀌었습니다. 쿠사마야요이의 작품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파란색, 빨간색으로 펼쳐진 깃발들을 츠타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츠타야는 다이칸야마T-Site가 워낙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긴자식스의 츠탸야는 기대가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긴자의 중앙에 올라선 긴자식스의 위용에 맞게 츠타야의 서적 큐레이션도 예술서적에 집중하고 있고, 한편에 만들어둔 스타벅스 리저브 바(bar)에서는 위스키도 팔고 있어 다이칸야마와는 다른 고급스러움이 묻어납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FENDI의 전시가 열리고 있던 중앙홀도 그러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폐점시간이 가까워 다른 긴자식스의 다른 매장까지 둘러볼 수 없었지만 츠타야 외에도 다양한 디자인 숍들이 입점되어 있어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공간이었습니다.

[긴자식스 웹사이트 https://ginza6.tokyo ]


셋째 날, 북디자인의 현장을 만나다.

 NHK교육TV를 틀면서 어느덧 일본의 아침을 익숙하게 시작합니다. 이번 <2018 글로벌 출판 전문인력 향상> 프로그램의 강연 장소는 대부분 '진보초神保町'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후에 방문하게 될 종이 전문점 "타케오竹尾"도 진보초 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부산에는 보수동 책방골목, 파주에는 출판단지 등 우리나라에서도 책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처럼 일본의 진보초는 고서점이 밀집된 도쿄의 유명한 책거리입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부터 지금까지 쌓인 고서적들이 서점마다 가득 쌓여있는 모습은 진보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보초에는 작은 고서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초 1-1번지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산세이도"서점은 1881년 창업한 역사 깊은 서점입니다. 셋째 날인 오늘의 첫 수업이 바로 산세이도 서점의 "우치다 다케시"영업기획실 과장에게 듣는 <서점인이 본 팔리는 북디자인>입니다. 우치다다케시 과장은 일본의 "서점대상本屋大賞"을 만든 사람들 중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전문 서점인입니다. (서점대상은 2004년 설립된 문학상입니다. 그동안의 문학상과는 다르게 작가나 문학가가 참가하지 않고 단지 "신간을 판매하고 있는 서점의 서점인들"이 뽑게 됩니다.) 역사적인 서점이지만 산세이도 역시 책의 판매는 줄어들었기 때문에 잡화를 판매하는 코너가 생기기도 하고, 책을 팔기 위한 아이디어를 많이 고민한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서점대상"처럼 산세이도 직원이 뽑은 "직원대상"도 그러한 아이디어입니다. 카레를 좋아하는 직원이 맡은 카레 코너도 인기 있는 코너입니다.

서점인이 보는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보는 디자인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디자인이 분명 잘 팔리고 있지만 반대로 디자인하지 않은 것 같은 책도 그러한 책들 사이에서 잘 팔리고 있었습니다. 서가에서 책을 배치할 때 전부 화려한 책들로 채우면 오히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화려한 책들 사이에 그런 디자인하지 않은 책을 껴 넣어두면 그것이 더 눈에 띄어 잘 팔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책의 콘텐츠가 좋았을 경우입니다만. 이러한 이야기는 열심히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의 기운을 빠지게 하지만 디자인보다는 "콘텐츠가 더 중요"한 책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산세이도에서는 책의 표지를 전부 덮어버리는 광고 커버가 있는 책도 있습니다. 매장의 점원이 추천하는 문구를 가득 채운 광고 커버는 출판사에서 마음에 들어 이후 출간될 때 아예 표지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책의 판매에 있어 디자인이 중요한지 마케팅이 중요한지 아니면 정말 콘텐츠 만이 중요한지 고민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 합이 맞아야 책이 판매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세이도 서점 웹사이트 https://www.books-sanseido.co.jp ]


출판사 밖의 외주 디자이너만이 책을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서 디자인을 맡고 있는 인하우스디자이너의 활약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입니다. 문학을 중심으로 성장한 출판사 "신쵸사新潮社" 장정실(디자인실)의 "구로다 다카시" 부장의 강연 <신쵸사의 북디자인>을 통해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초기 출판디자인은 화가가 그린 그림에 명조체의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책의 판매도 경쟁이 되면서 전문 디자인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외주 디자이너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외부에 디자인을 맡기는 것은 여러 디자이너를 통해 높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외주 디자이너는 자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편집자나 출판사와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단점도 있습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경우는 그러한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보다 독자를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을 한다거나, 편집자와 원활한 소통을 통해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외주 디자이너와는 다른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신쵸사의 경우는 내용(본문)은 교열실에서, 표지는 장정실에서 진행하는 분업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편집자와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내부의 의견을 가까이에서 듣고 좀 더 콘텐츠 중심의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외주 디자이너로서 한 번쯤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신쵸사 웹사이트 https://www.shinchosha.co.jp ]


역사가 오래된 출판사와는 다르게 신생 출판사의 에너지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활발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출판"이라는 말처럼 1인 출판사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시모히라오 나오시下平尾 直"대표도 8년간 인문서 담당으로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사장으로부터 "당신 같은 우수한 편집자가 독립적으로 출판사를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로 2014년, 독립출판사 "공화국共和国"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출판사의 이름에서처럼(사진으로 보듯 그의 외모에서도) "록 스피릿"이 가득한 시모히라오 대표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도 록밴드에 비유합니다. 북디자이너도 1명과 계속 일하고 있고, 인쇄소 등 책을 만드는 모두가 고정된 멤버라서 자신과 함께 여럿이 같이하는 록밴드처럼 출판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출판업계에서 유명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인지도를 위해서는 북디자인이 무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콘텐츠가 있더라도 당장 인지도를 올리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콘텐츠에 디자인이 같이 활약했을 때의 파급력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한편 앞서 신쵸사의 구로다 다카시 부장이 말했던 것처럼 외주 디자이너의 단점이었던 출판사와의 소통의 부재는 오히려 공화국에서는 간단한 문제처럼 보였습니다. 소규모 출판사의 예산과 마감일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디자이너의 제안이나 상상력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디자이너의 제안도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고정된 이미지나 제한된 서체, 가독성 등으로 비판도 받을 수 있지만 그것 또한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1인 출판사의 '록스피릿'을 제대로 보여주는 출판사였습니다.

[공화국 사이트 https://www.ed-republica.com ]


오후가 되어 찾아간 "타케오 견본첩본점竹尾 見本帖本店"은 창업 110년이 넘는 종이회사 "타케오竹尾"의   대표 매장입니다. 사방 벽을 모두 견본이 들어있는 서랍으로 만든 매장의 위용은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모입니다. 원하는 종이를 모두 찾아볼 수 있고 구매도 가능하다니 일본의 디자이너가 누릴 수 있는 이런 환경이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매장을 소개하는 "마쓰이 다케루"점장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에서도 그러한 힘이 된다는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일본의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화지和紙'는 마麻나 닥나무楮, 삼지닥나무三椏 등 식물을 원료로 하여 전통적인 제조방법으로 만드는 종이입니다. 각 지역마다 만드는 방법이나 소재가 다르기 때문에 종류도 무척 다양합니다. 타케오는 이러한 다양한 종이를 취급하는 회사인데 특히 견본첩본점에서는 '파인페이퍼'라고 불리는 인쇄/제작에 적합한 종이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을 대표하는 크레에이터와 협업하여 디자이너가 요구하는 종이 상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굿디자인컴퍼니의 '미즈노 마나부水野学',  <디자인 아!>전시의 디렉터이자 그래픽디자이너 '사토 타쿠佐藤卓', D&DEPARTMENT의 '나가오카 겐메이長岡賢明' 등 쟁쟁한 일본의 크리에이터들과 함께한 종이도 2층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이가 있는 만큼 종이를 고르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각 종이 견본마다 사이즈와 특성이 나와 있고, 매장 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종이와 별도로 주문해야 하는 종이도 표시되어 있는 라벨이 붙어있습니다. 엽서 크기의 작은 견본으로 종이를 찾은 다음 카운터에 가져가면 그 라벨에 맞는 대형 사이즈의 종이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생산된 종이 이외에 이탈리아 등 해외에서 수입해온 종이도 판매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견본에 있는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센스는 있어야겠습니다. 수입종이를 별도로 표시하지 않지만 '전지의 사이즈가 일본에서 쓰는 규격이 아닐 경우 수입 제품일 확률이 높다'는 마쓰이 다케루 점장의 말처럼 말입니다.

[타케오 웹사이트 http://www.takeo.co.jp ]


넷째 날, 요리후지 분페이를 만나다.

여행에서 책을 구입하면 그 무게로 인해 복귀할 때 고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제의 산세이도 서점에서 무려 세 권의 그것도 '문학책'을 구입했습니다. 자료라면 가끔은 무리해서 구입하곤 하지만 읽지도 못할 외국어 '문학'을 구입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이번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후에 만나게 될 디자이너 "요리후지 분페이寄藤⽂平"가 디자인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출간된 <디자이너의 일デザインの仕事>(한국 번역판 제목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의 추천사에서도 밝혔듯이 학생 때 영향을 받았던 디자이너였고, 이제 10여 년이 흐른 지금 동시대의 디자이너로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에 그의 서명을 그가 디자인한 책에 받아두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숙소에 책을 두고 오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서명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요리후지 분페이의 강연은 오후에 잡혀있어 오전 수업을 듣고 숙소에 들리려고 했으나 강의 장소에서 바로 분페이의 스튜디오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부린 결과입니다.


오전 첫 강연은 1936년 창업한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 '카이세이샤偕成社' 편집부장 "히로마츠 겐지広松健児"의 <오래 사랑받는 그림책, 아동서 디자인>입니다. 성인 책과는 다르게 "어른들이 쓰고 만들지만 아이들이 읽는" 아동서는 대부분 그림이 크게 들어가는, 그림이 책의 주역이 되는 '그림책'입니다. 그만큼 일러스트를 다루는 디자이너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예제로 가져온 세계적인 그래픽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의 작품을 보더라도 그림책 자체가 하나의 그래픽디자인입니다. 아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최소한의 페이지에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보여주기 위해 그림책에 있어 디자이너는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책을 만드는 러프한 단계에서부터 디자이너의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카이세이샤 웹사이트 https://www.kaiseisha.co.jp ]


한편 일본의 출판산업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책의 수요는 꾸준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림책의 성인 수요는 늘어났다고 합니다. 성인들도 쉽고 따듯한 내용의 그림책을 많이 보는 것으로 힐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갈 곳을 잃은 정년퇴직자들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손자들을 위해 그림책을 사 갔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이 재미있는 결론은 두 번째 강연인 포레스트출판フォレスト出版의 대표 "오타 히로시太田 宏"의 <팔리는 책을 만드는 방법>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경제경영서 전문 출판사의 대표답게 일본 출판산업의 흐름을 파악하고 팔리는 책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일본의 최근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비즈니스 서적에서 건강관리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건강관리 식사방법>이나 <하루 1분 인생 변화>, <읽기만 해도 시력이 좋아지는 책> 등 어쩌면 터무니없는 민간요법인 듯 하지만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타 히로시 대표는 한 가지 문제를 내었습니다. "정년 퇴직자들이 갈 곳이 어디인가?" 정년퇴직 이후에는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갈 곳을 이른 정년퇴직자들은 갈 곳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 안 드는 곳을 찾아가게 됩니다. 1위는 도서관, 2위는 극장, 3위는 스포츠, 그리고 마지막 4위는 서점입니다. 바로 이 서점에서 자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는 아끼는 손자를 위해 어린이 그림책을 사 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답입니다. 오타 히로시는 이어서 두 번째 문제를 물어봅니다. "이러한 정년퇴직자들은 어떤 것을 궁금해할까?" 1위는 역시 건강입니다. 그리고 2위가 돈, 3위가 장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1위가 건강인 이유는 바로 이어서 나온 2위 돈 때문입니다. 건강해야 병원비가 들지 않고, 그래야 고령화 사회에서 자녀들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병원비가 많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의료보험비가 많이 든다는 뜻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세금의 비효율성 때문에 민간요법을 장려하고, 건강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를 하게 됩니다. 결국 출판사가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건강관리 식사방법>같은 민간요법 책이 잘 팔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65세 이상의 인구비율, 즉 고령화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고령 인구가 늘어났다기보다는 노인들은 장수하고, 출산율이 떨어져 청년층이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산업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독자가 줄어 다기보다는 2-30대는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으로 독서인구에서 빠져나갔지만, 노인들은 변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 독서인구로 남았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한국도 이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고 앞으로 일본보다 빠르게 노령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출판산업을 준비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포레스트출판 웹사이트 https://www.forestpub.co.jp ]


점심식사를 하고 빠르게 이동한 곳은 "요리후지 분페이寄藤文平"의 스튜디오 "분페이 긴자文平銀座"입니다. 스튜디오 이름처럼 긴자에 스튜디오가 있을까 싶지만 최초 스튜디오가 긴자에 있었고 지금은 오모테산도와 하라주쿠, 시부야가 모두 한두 정거장 근거리에 있는 아오야마 근처로 이전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하고 있었을 요리후지 분페이를 드디어 만나게 됩니다.

분페이긴자의 운영방식은 우리가 알던 기존 회사와는 다릅니다. 직원이 없고 각각 다른 계약을 했기 때문에 같이 일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튜디오의 가구 배치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일에 맞춰서 적당한 위치로 책상을 옮겨가곤 합니다. 요리후지분페이도 마찬가지로 책상이 따로 정해지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 할 때는 각도가 조정되는 화판 같은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컴퓨터 작업을 해야 할 경우 또 다른 책상으로 옮겨가서 일을 하게 됩니다. 효율적인 운영 방법이라 생각돼서 따라 해보고 싶지만 분페이긴자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일 듯합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두 명의 디자이너는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긴장감이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정식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어시스트로 일하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친절한 요리후지분페이였지만 어쩌면 스튜디오 내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디자이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명하는 내내 옆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분페이긴자에서 오랜 기간 일해온 "스즈키 지카고鈴木千佳子"씨도 한동안은 요리후지분페이의 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몇 년 전부터 독립해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분페이긴자에서 나오는 디자인을 보면 '요리후지분페이+스즈키지카고'가 쓰여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서로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을 분담해서 작업하고 이름을 같이 넣는 것입니다.

스즈키씨의 작업은 손으로 직접 만든 느낌이 많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출간된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口笛を吹きながら本を賣る 柴田信,最終授業>의 원서 디자인도 스즈키 씨의 작품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을 쓰지 않고 모든 요소를 직접 만든 판화로 찍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컴퓨터가 낼 수 없는 손맛이 디자인에서도 바로 느껴집니다. 스즈키 씨가 꺼내 준 판화의 원판을 직접 만져볼 수 있어서 작업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편집자는 앞서 소개한 쇼분샤의 "사이토 노리타카", 저자는 현지 코디네이터를 맡아준 출판 저널리스트 "이시바시 다케후미"입니다. 책 한 권을 작업한 모두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리후지분페이의 작업방법은 무척 치밀한 계획을 통해 큰 그림부터 완성된 그림까지 점층적으로 만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읽은 책의 한 단원을 명함 크기의 종이로 요약해서 글과 그림으로 담아둔 뒤에 여러 장을 모아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둡니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면서 생각이 날 때마다 확대해가며 살펴볼 수 있어서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명함 묶음으로 된 원고 더미가 여러 개 만들어진 뒤에 이것을 커다란 종이에 펼쳐두듯 자신의 머리로 필터링해서 그려나갑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이 콘텐츠를 이해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도 그림 속에 담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부분을 챕터별로 정리해서 책으로 완성합니다. 콘텐츠를 시각화하는 방법은 디자이너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분페이의 방법이 꼭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외국어 단어 외우듯 명함에 콘텐츠를 옮기고 다시 넓은 종이로 옮기는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작업 방법을 이런 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쇼분샤에서는 최근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시리즈 책이 나왔습니다. 산세이도에서 샀던 책이 바로 이 한국 문학 시리즈입니다. 기존 문학과 다르게 기하학적 선으로 그려진 일러스트로 디자인된 시리즈는 최근 분페이가 작업한 것입니다. 하나의 시안만 만드는 분페이의 작업스타일 때문에 혹시 떠오르는 감각으로만 작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스케치를 보면 완성단계까지 여러 번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시안을 여러 개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 가지 시안의 완성도를 계속해서 높여가고, 그 과정을 편집자와 고민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사실 쉽지 않은 방법입니다. 편집자와 디자이너 간의 신뢰가 뒷받침되었을 때 그리고 편집자가 자신의 책을 완벽히 이해하고 디자이너의 감각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페이 긴자 웹사이트 http://www.bunpei.com ]


분페이긴자를 나와 마지막 저녁이 되었습니다. 정해진 일정이 끝났지만 마음이 홀가분하기보다는 더 많은 생각들이 꽉 찬 느낌입니다. 이번 프로그램의 후기는 그런 생각들이 정리되길 기다리며 내일 아침시간으로 미뤄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일정을 보내기 위해 또다시 소그룹으로 나눠졌습니다.

분페이긴자가 있는 곳은 아오야마 위쪽이기 때문에 시부야 방향으로 걸어오면서 디자인 숍들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들린 곳은 아오야마에 있는 "Found MUJI"입니다. 무인양품은 원래 물건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좋은 물건을 "찾는" 것부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철학으로 세계의 "무인양품다운 좋은 물건"을 찾는 운동을 2003년부터 시작했습니다. 바로 "Found MUJI"입니다. 그리고 1983년에 무인양품을 처음 개점한 1호점인 아오야마점을 2011년에 Found MUJI Aoyama로 리뉴얼하게 됩니다. 여러 곳 있는 Found MUJI중에서 이곳을 들려본다는 것이 나름 의미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Found MUJI 웹사이트 http://www.muji.net/foundmuji/ ]


Found MUJI를 지나 조금 걸어 내려가면 시부야에 도착합니다. 1956년 개업했던 도큐문화회관을 개승하며  2012년에 들어선 "Shibuya HIKARIE"는 오피스와 상업시설,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 등을 갖춘 복합문화시설입니다. 지상 34층, 지하 4층의 거대한 시설로 시부야 거리 전체의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철도도 8개 노선이 지나갑니다. 바로 이곳 8층에 '나가오카 겐메이'가 만든 'd47 Museum'이 있습니다.

d47 Museum은 이름처럼 일본의 47개 도도부현(일본의 광역자치단체 구분 都,道,府,県)에서 모은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입니다. 매번 다른 주제로 열리고 있어 도쿄에 들릴 때마다 찾아보게 됩니다. 이번에는 <순서>라는 테마로 전시가 있었는데 방문한 이틀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잠시 휴관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창 밖으로 살펴볼 수 있어서 전시의 대략적인 느낌만 감상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d47 MUSEUM 웹사이트 http://www.hikarie8.com/d47museum/ ]


다섯째 날, 일본 디자인의 현재를 만나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날입니다. 아침부터 틀어뒀던 NHK교육TV를 못 보는 것마저도 아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여행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많은 경험들로 머리와 양손이 모두 무겁기 때문에 현실로 하루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지금까지 들었던 강연의 리뷰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기 위해 호텔 식당에 11명이 모였습니다. 어제까지 매일매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챙겨주셨던 '이시바시 다케후미'씨와는 어제 분페이긴자 앞에서의 인사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언어가 달라 마음속 깊은 감사까지 전할 수 없었지만 이 글을 빌어 감사 인사를 남겨둬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시바시 상"  

강연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본의 출판시장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던 문화통신사 편집장의 강연을 시작으로 서점인/편집자/예술대학교수/북디자이너/마케터 등 책을 만드는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엄청난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책 한 권을 만들어서 독자의 손에 쥐어지기까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본에 와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더불어 이러한 프로그램을 준비해주신 출판진흥원의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토론을 끝내고 짐을 꾸렸지만 다행히 출국시간까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날 보려고 했으나 놓쳤던 전시를 보기 위해 유라쿠쵸에 다녀오기로 합니다. 바로 "CreationGallery G8"에서 열린 "굿디자인컴퍼니 Good Design Comapany"의 20주년 기념전입니다. 굿디자인컴퍼니의 대표 "미즈노 마나부水野学"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계기는 몇 년 전부터 인기 있는 구마모토 현의 캐릭터 "쿠마몬" 때문입니다. 양쪽 볼이 빨간 검은 곰 캐릭터 덕분에 구마모토 현이 새로운 관광지로 뜨고 있다는 소식처럼 그의 활동은 최근 일본의 산업을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캐릭터나 브랜딩뿐 아니라 상품의 기획,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전방위적으로 디자인 활동을 하고 있어 알게 모르게 그의 디자인을 만났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책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팔다'에서 '팔리다'로>(이콘)를 비롯해 <센스의 재발견>(하루)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베스트셀러이기도 합니다.

[Creation Gallery G8 웹사이트 http://rcc.recruit.co.jp/g8/ ]

[Good Design Company 웹사이트 http://gooddesigncompany.com ]


G8에서 긴자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긴자그래픽갤러리 'ggg'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를 볼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래픽디자이너 "타다노리 요코오横尾忠則"의 전시가 열리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타나노리가 그린 1974년부터 75년까지 도쿄 신문에 연재된 역사소설 <환화幻花(꽃의 환영)>의 삽화 전시입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들어간 전시였지만 8x14cm 작은 크기의 흑백 그림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가 일본 디자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잘 그린 그림이기도 했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구도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타다노리 요코오 웹사이트 http://www.tadanoriyokoo.com ]

[ggg갤러리 웹사이트 http://www.dnp.co.jp/gallery/ggg/ ]


남은 체력으로 찾아간 곳은 도쿄역 맞은편에 있는 일본 우편(Japan Post)이 만든 상업시설 "킷테KITTE"입니다. 킷테는 옛 도쿄중앙우체국 건물의 일부를 보존한 상태로 신축한 건물이라 독특한 외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표切手"라는 뜻과 "오세요来て"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름으로 우표가 우편물을 여러 지역에서 데려오는 것처럼 공간 안에 각 지방의 인기 음식점과 상점을 입점시킨 복합쇼핑몰입니다. 이곳의 2, 3층에는 도쿄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학술 표본과 연구자료, 각종 학술 유산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 "인터미디어테크 JP Tower Museum INTERMEDIATHEQUE"가 있어 무료로 둘러볼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굿디자인컴퍼니"가 셀렉한 상품을 파는 "THE"숍과 "GoodDesignStore"도 있어 디자이너라면 도쿄에 왔을 때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KITTE에 들린 것은 이런 숍뿐만이 아니라 특색 있는 서점 "마루노우치리딩스타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KITTE 웹사이트 http://jptower-kitte.jp ]


KITTE의 4층에는 "마루노우치리딩스타일マルノウチリーディングスタイル"이라는 서점이 있습니다. 일본의 서적 도매상 "오사카야大阪屋"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출범한 '리딩스타일 주식회사'가 만든 서적+잡화 매장입니다. 책 커버에 날짜만 쓰여있는 "생일문고"라던가 제목과 내용을 볼 수 없도록 숨긴 "백색문고white bunko" 등 색다른 서가를 운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책을 숨김으로 오히려 책을 찾아보게 만드는 이러한 "어른의 호기심"이라는 마케팅은 이후 다른 서점이나 한국의 대형 서점 이벤트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잡화를 취급하고 있지만 아마도 도쿄 중심상가에서 서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츠타야나 무지북스처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 붙어있는 카페에서 서가의 책을 읽게 해 주고 있는데 시간제한이 있고 커피 가격이 다른 전문점에 비해 비싼 것으로 봐서 아마도 카페 수익에서 어느 정도 보전받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서점인이 아님에도 예전처럼 서점의 운영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마루노우치 리딩스타일 웹사이트 https://www.readingstyle.co.jp ]


도쿄역 앞의 광장을 걷고 있을 때는 5일간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글로 정리해보니 하루하루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행하듯 매일을 살아간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만큼 시간을 쪼개서 하나씩 경험하는 시간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행하는 시선으로 책과 서점, 숍들을 바라본다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매년 어렵다는 출판산업이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출판산업은 동네서점과 독립출판을 기점으로 일본과 다르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출판계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출판산업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런 성장 에너지를 부러워하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이 일본보다 10여 년 늦는다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출판산업과 같은 지식산업은 이제 일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모습도 정보화 시대에서는 장점이라고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출판산업을 배우고 느끼러 왔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출판산업도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9명의 북디자이너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가 커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먼저 제 자신부터 한걸음, 한 뼘 더 나아가고 커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요약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두서없이, 시간별로,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긴 글이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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