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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Aug 13. 2020

먼지 호호 불어 발굴한 음표 조각들.

tearliner - My Aporia 디지털 싱글 작업기

팬데믹 시대의 음악 작업.

 코로나19가 야기한 인간 관계 동맥경화는 직장인이나 자영업자가 아니었던 내게도 일어났다. 멤버들이나 피처링 보컬과의 만남은커녕 스튜디오 녹음 일정도 취소해야 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지 못하는)기관지염 증상까지 지속되어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이 시간만 흘렀다. 결국 2월과 6월 계획했던 디지털 싱글은 발매하지 못했다. 고심 끝에 비교적 작업이 어렵지 않은 자작곡을 골라 겨우 4월에 발매 일정에 맞춰 디지털 싱글 <Moon Rises, Love Falls.>는 발매할 수 있었다.(지속적인 옅은 기침과 가래 때문에 노래는 원하던 미성 대신 허스키한 보컬톤으로 녹음되었다.) 밀린 일정과 불가능한 작업 때문에 10월에 발매하기로 계획했던 8년 만의 정규 앨범도 유통사 '비스킷 사운드'와 협의를 통해 내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4월 발매한 디지털 싱글 <Moon Rises, Love Falls.>의 재킷. 카세트테이프 연작 콘셉트에 4월 봄의 꽃을 담았다. 노래 좋으니 즐겨주시길.

Ready, Steady, GO!

 예정되었던 8월 싱글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업 포기와 강행 중 선택해야만 했다. 팬데믹 시대에 곡 작업을 해도 괜찮은 걸까. 지인과 세션 멤버들에게 의견을 묻고 유통사에도 조언을 구했지만, 가능성을 타진하기보다는 작업을 추진할 동기를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홀로 작업이 용이한 자작곡을 8월 싱글곡으로 이미 점찍어 둔 터였다. 발매에 긍정적인 반응이 다수였고, 다행히 따뜻한 여름이어서인지 기관지염 증상도 개선되어 노래를 녹음할 만했다. 동기도 있고 추진력도 얻은 셈이다. 스튜디오에서의 보컬 녹음 1회를 제외하면 모두 언택트로 작업을 진행해 접촉을 최소화했다. 발매를 한 달 앞둔 시점까지도 포기와 강행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동시에 공존하던 8월 싱글 작업은 고양이가 든 박스를 열자 강행으로 최종 결정되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 곡을 녹음하는 데 사용한 티어라이너의 20년 간 메인 기타 '레씨(Epiphone Les Paul ‘56 Gold Top)'.

"그냥 가도 되겠다."

 혼자 연주와 노래를 완성하려면 대충의 어레인지를 완성했던 데모곡의 연주 소스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조악한 8비트 드럼은 다시 녹음하고, 키보드와 베이스를 추가해야 했지만, 기타는 데모 소스를 재사용할 심산이었다. 데모 연주가 꽤 엉망인 터라 2005년부터 기타 연주를 도맡아 왔던 티어라이너 사운드의 핵심 '눈물기타 강지훈 옹(늙지 않았어도 존경하는 형에게 '옹'을 붙여 부르곤 한다.)'에게 재녹음 필요성을 묻자 "기타톤 색깔 있게 잘 됐네."라고 답했다. 기타 녹음할 시간도 촉박했고, 연주도 귀찮아서 잘 됐다 둘러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육아휴직으로 바쁜 사정을 알기에 더 묻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저렴한 기타 멀티이펙터로 사운드카드 달린 옛 컴퓨터에 녹음했던 로우파이 사운드를 그대로 재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싸구려 로우파이 기타 사운드는 곡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중요한 재료였기에 부족한 연주는 용인할 만했다.

 이 데모 음원은 2006년 급하게 대충 스케치 녹음한 것으로 14년이나 묵혀두었던 파일이다. 악보를 쓰지 못하는 나는 이렇게 순간의 스파크로 만들어진 무형의 음파를 카세트테이프나 하드디스크에 담아 악보 대용으로 보존하는 데 사용하고, 함께 연주하고 노래할 뮤지션들에게도 악보가 아닌 음원을 가이드로 들려준다. 이렇게 기타 소스를 그대로 재활용하고, 편곡도 수정 없이 갈 줄 알았다면 당시 더 신경 써서 녹음할 걸 그랬다.

당시 녹음에 사용했던 멀티이펙터 GT-3는 헐값에 중고로 팔고 후회했다. 데뷔 앨범 <작은 방, 다이어리.>의 마일드하고 로우파이한 모든 기타 사운드를 만들어줬던 이펙터.

지난했던 유적 발굴 작업.

 기타 음원 파일을 찾는 과정은 공룡 화석을 캐내는 것과 흡사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자욱한 20년 넘은 거대한 컴퓨터 본체에 모니터, 오디오 인터페이스, 키보드, 마우스 등을 연결하고 전원을 켰더니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을 내더니 곧 꺼졌다. 순간 파워서플라이나 메인칩이 고장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런 경우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르면 일어날 경우의 수는 세 가지다, 폭발하거나 어딘가 고장나 아무 반응이 없거나 운 좋게 작동하거나. 앞의 두 경우라면 컴퓨터를 수리하든, 강지훈 옹에게 기타 재녹음을 사정하든 해야 하는데, 어떤 수를 쓰더라도 8월 일정에 맞춰 싱글을 내기는 힘들어진다. 본체를 분해해 먼지를 털어내고, 부품이나 선 상태를 점검한 후 다시 재조립했다. 숨을 참고 버튼을 누르자 다시 한 번 힘겨운 비행기 소리와 함께 본체가 이륙, 아니 작동했고 CMOS셋업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설정 후 재부팅하자 익숙한 윈도우XP 부팅 화면이 떴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음악 작업 소프트웨어 '소나Sonar6'를 실행할 때마다 블루스크린이 뜨며 다운되는 바람에 내 마음도 함께 다운되어 시간이 갈수록 좌절했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악기(VSTi)나 이펙터를 삭제했다 다시 설치해가며 컴퓨터를 재부팅하느라 밤을 꼬박 샜고, 마침내 기타 소스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 고생이면 화석을 발굴했다 할 만하지 않나, 비록 14년밖에 되지 않은 기타 연주 뼛조각이지만.

오래된 컴퓨터에서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여는 데 성공한 ‘소나’ 작업창. 데모라 심플한 트랙 수로 구성되어 있다. 트랙이 왠지 뼛조각 같아 보이기도.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에 간 어벤저스의 로맨스.

 합정동 702 스튜디오에서 보컬을 녹음했는데, 2시간도 채 안 되어 끝냈다. 노래를 잘해서 순식간에 끝냈다면 멋져 보이겠지만, 가사가 짧고 노래가 어렵지 않은 곡이어서였다. 강하고 엉망진창인 기존의 저질 기타 연주에 여리고 섬세한 보컬을 가미하고, 박수가 들어간 신나는 드럼과 베이스를 추가했더니 뭔가 스테이크에 김치를 얹어 먹는 맛이 났다. 듣고 있자면 이 분위기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에 간 어벤저스의 로맨스 같은 매력.

 2006년에 만든 곡의 데모 느낌 거의 그대로 싣는 건 내게는 나름의 레트로이자 오리지널리티로의 회귀인 셈이다. 사운드가 강하고 로우파이해서 그간 작업했던 드라마 음악 등에 비하면 대중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가장 내 내면의 욕망과 관심의 표현에 충실한 창작물이 가장 예술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들이 좋아할 음악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음악이 내 음악이며, 그래야 타인으로부터도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덧 13년 넘게 함께 티어라이너와 함께 한 '702 스튜디오' 대표 김찬영 엔지니어와 9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튜디오의 마스코트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강아지 '호두'.

재킷까지 가내수공업으로 한 땀 한 땀.

 싱글곡 가내수공업은 첫 삽부터 마지막 포장까지 혼자 힘으로 꾸림을 의미한다. 8월 발매에 맞게 여름 분위기를 내고 싶어 어항을 장식했던 모래와 조개, 구슬 등을 꺼냈다. 그간 발매한 싱글의 카세트테이프 연작 콘셉트에 맞게 카세트테이프를 모래 한가운데 살짝 묻었다. 장식 아이템들은 여행했던 곳에서 하나씩 주워 온 것들이다. 예를 들면, 테이프 왼쪽의 투명 구슬은 일본 벳푸의 한 온천에서 마셨던 사이다 병에 들어있던 구슬이고, 구슬 위 산호는 몰디브 해변에서 주운 마모된 조각이며, 테이프 아래의 갈색 조각과 파란 유리조각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북부 해변도시 스베틀로고르스크에서, 그 오른쪽의 유니크한 고둥 껍질은 코타키나발루에서, 테이프 위 달팽이 껍데기는 라오스에서, 사진 위쪽의 가리비 껍데기는 택배 주문해 먹었던 것이고, 모래는 속초 모래사장의 것을 손수건에 담아왔다. 내 청춘을 관통하는 카세트테이프를 중심으로, 삶의 여러 경험의 조각들이 모래 위 곳곳에 놓인 것이다.

 단어 '아포리아Aporia'는 그리스어로 '난제, 난관, 막다른 골목'을 의미하는데, 표지에 그리스어를 그대로 사용했을 때 문자의 질감과 모양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타이틀 '마이 아포리아Mψ Απορία'를 그리스어로 표현함으로써 마치 포세이돈의 삼지창 같아 보이는 'ψ'가 표지의 해변 느낌을 한층 강화시켜 줬고, 'π'는 수학 원주율 '파이π'를 의미하는 듯해 타이틀에 중의성과 모호성을 더해줬다. 온라인에서 앨범명은 영어로 표기될 예정이라 재킷은 그리스어로 치장하기로 했다. 타이틀 문구의 색은 카세트테이프에 적힌 글과 비슷한 색을 사용해 동질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전달하고픈 '나의 난제Mψ Απορία'는 분명했지만, 나는 음악에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담기 싫어한다. 설사 의도하는 바가 있어도 모호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청자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억과 경험과 자아에 기초해 재해석하고 나름의 다양한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누군가에게 그 난제는 복잡한 현실일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으며, 마스크 벗고 자유로이 사람을 만나기 힘든 답답한 팬데믹 상황일 수도 있고, 연인과의 사랑이나 직장 상사와의 관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막다른 골목은 어디이며, 풀리지 않는 당신의 난제는 무엇입니까?

재킷 사진촬영과 완성된 싱글 재킷. 세계 각지에서 주워 어항에 넣었던 재료들로 사진을 찍었다. 타이틀은 그리스어 아포리아Aporia를 원어 그대로 사용했다.

B-Side, 보라색 재킷.

 두 번째 트랙으로 실은 'Purple Jacket [Another Rush]'는 천재 기타리스트 강지훈 옹이 리드기타를 연주한 강렬한 기타 연주곡이다. 이 곡 역시 2003년 작곡해 2007년에 리드기타를 덧붙인 티어라이너 원류라는 점에서 싱글곡 'My Aporia'와 궤를 같이 한다. 심지어 이 곡은 새로 녹음하는 연주도 없이 2007년 버전을 그대로 발표했다.

 강지훈 옹의 기가 막히는 기타 테크닉과 종반으로 갈수록 휘몰아가는 리드 라인은 평범한 곡에 펄떡거리는 생명을 입혔다. 나는 이 곡을 정말 좋아한다. 2003년의 나는 음악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열정은 넘칠 때라 잠도 자지 않고 회사 출근 직전까지 드럼을 미디로 하나하나 찍었다. 싱어송라이터 이전 드러머였던 경험은 이런 때 직접 드럼 세트를 연주하는 상상을 하며 찍을 수 있어 편했다. 마치 놀이기구 타듯 짜릿하고 시원한 연주를 즐기자. 세상에 들려줄 기회가 없던 아끼는 내 새끼를 이 기회에 발표할 수 있어 행복하다.


* 2020.08.11. 발매된 티어라이너의 새 싱글 <My Aporia> 작업기입니다.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이용해 BGM으로 해당 곡을 들으며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싱글곡에 대한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tearliner - My Aporia [Single, 2020.08.11]
멜론: https://bit.ly/3kzp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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