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잡아 가수 돼서 돈 많이 벌어라.’
지인 아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러 적당히 차려입고 나섰다. 돌잔치 전문 뷔페식당에 들어서자 창가 쪽에 일렬로 나뉜 네 개의 룸에서 시간차를 두고 돌잔치가 이뤄지고 있었고, 식당은 접시에 음식을 담으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북적였다. 한복 차림의 귀여운 아이를 안은 지인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잡이 진행자가 들어와 마이크를 켜고 잔치를 시작했다.
분위기를 띄우는 게임에 불려 나간 아이 부모의 친척이나 지인들이 진행자의 요청에 어색한 축사를 하고 들어오곤 했는데, 한 살배기 아이에게 하는 축복에 ‘돈 많이 벌어 부자 되어라.’라는 말이 빠지지 않아 놀라웠다. 건강 기원이나 부모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같은 뻔한 축사를 기대했던 터라, 왠지 나 혼자 돌잔치 트렌드에 한참 뒤떨어진 꼰대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앞으로 불려 나가지 않아서 내 올드한 축사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트렌드에 뒤떨어졌다는 내 우려는 진행자의 돌잡이 멘트로 확실해졌다.
“이 지폐 잡아서 커서 돈 많이 벌고, 청진기 잡아 의사 돼서 돈 많이 벌고, 마이크 잡아 가수 돼서 돈 많이 벌고, 판사봉 잡아서 돈 많이 벌고, 야구공 잡아 프로 선수 돼서 돈 많이 벌고, 실 잡아서 정년퇴직까지 돈 많이 벌고, 연필 잡아서 대기업 취직하거나 교수 돼서 돈 많이 벌고...’
진행자는 돌잡이 물건을 하나씩 들어 보이며 자상하고 위트 있게 설명했다. 돌잡이에 올려진 지폐가 적다며 아이 친척 중 누군가 5만 원권 몇 장을 더 내도록 독려하는 재치까지 선보였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아이에게 ‘돈마니(돈 많이)’라는 자본주의적 주술이라니, 맙소사.
돌잡이가 끝난 후 차려진 음식을 죄다 먹어주겠다는 각오로 호기롭게 뷔페 담을 접시를 들고 나서지만, 정작 값싸고 자극적인 아이 입맛 음식만 골라 담은 첫 접시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매번 이러니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다. 그럴 때마다 뷔페 음식에 포만감을 부르는 약을 타는 게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상상하곤 한다. 다만 이번에는 음모론에 대한 상상의 나래가 조금 달랐는데, 마치 주술 같은 ‘돈마니'라는 축복어를 잔뜩 들어서 심리적으로 배가 부르고 입맛이 없어진 건 아닐까. ‘돈이 뭐죠, 먹는 건가요’라는 듯한 표정으로 지폐를 입으로 가져가는 저 귀엽고 순수한 아이에게 투영된 성인들의 부에 대한 욕망은 웃어 넘기기엔 찬 입김이 날 만큼 현실적이고 진심이라 마음이 팍팍해지고 어느 정도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우짜등가 돈 되는 일을 해이지, 거 해가 돈 되긌나? (뭐든 돈 버는 일을 해야지, 음악 해서 돈 벌겠니?)”
아버지는 아들이 ‘딴따라’인 게 항상 못마땅했다. 돈을 벌지 못하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떨어져 살아서 당신의 염려와 걱정이 저 멀리 바닷가에서 옅고 희미하게 들려올 것 같지만, 실상은 20년 가까이를 통화할 때마다 반복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했다. 심지어 아들이 나름 뮤지션으로 자리를 잡았는데도 입사준비를 해서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방송국 PD가 되길 바랐다. 아들이 방송 전문대학을 나왔고, 인디밴드 활동을 하는 중에도 먹고 살기 위해 방송일을 했었기에 TV에서 채용 자막이 흐르거나 관련 소식을 접하면 어느 방송국에서 직원 모집한다더라고 알려오곤 했다. 나는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던 아버지의 자식 걱정을 이해했기에 적당히 호응하며 안심시켰다.
내 나이가 마흔이 넘자 아버지는 더 이상 다른 일을 알아보라는 종용을 포기한 듯했지만, 여전히 통화 때마다 아들의 주머니 사정과 살림살이를 걱정한다. 음악감독으로 작업이라도 해야 돈 버는 일을 하는 줄 알아서 새로운 드라마 작업 안 하냐고 종종 물어온다. 당신은 음악감독 외의 밴드 앨범 작업이나 공연, 글쓰기 등은 일로 여기지 않았다. 굳이 수입을 따지자면 아버지의 생각이 영 틀린 건 아니지만, 돈을 얼마 벌지 못한다고 일이 아닌 건 아니다.
‘에헤이, 그람 뭐하노. 돈을 모아이지 이 사람아. (그러면 뭐 하니. 돈을 벌어야지, 아들아.)’
세계적인 영화감독 이안의 보수적인 아버지는 이안이 아카데미상을 탔을 때에도 영화감독보다는 교사가 되는 편이 낫다고 했더라지. 뮤지션에 대한 인식을 바꿔 아버지 걱정을 덜 요량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나도 설득을 해봤다. 뮤지션은 ‘딴따라’나 취미 행위가 아닌 어엿한 직업이라고, 아들이 나름 해외팬들로부터 사랑받는 뮤지션이라고, 유명 작품들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이 직업에 자부심도 있다고 부러 과장된 자화자찬을 해도 아버지의 반응은 약장수 앞에 선 구경꾼처럼 시큰둥했다. 언젠가는 전략을 바꿔서 ‘여유롭지는 않지만 음악 해도 먹고살 만큼은 벌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말했다가, ‘있쟈, 어카든 늘그마 돈이 있으야 된다. 내 봐라. (들어봐, 어떻든 늙으면 돈이 있어야 돼. 아버지를 봐라.)’라는 답을 듣고 못내 목구멍이 시렸던 적도 있었다.
장성한 아들이 자리를 못 잡았다 생각했기 때문인지 염려는 갈수록 늘어갔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노후가 안정적이려면 기본소득제와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진보 정권을 아버지도 지지하셔야죠.’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그러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 한심하다는 듯 ‘아주 이상주의자 납셨네’라는 뉘앙스의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귀가 시리도록 밀려오곤 했다. 나에 대한 걱정을 정치 화제로 돌렸지만, 내 메시지는 진심이었다. 큰 잘못 없이 한평생 열심히 일한 부모 세대가 노년에도 빈곤한 삶을 사는 사회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칠순이 넘은 아버지는 매년 봄이면 시청 등에서 발주하는 하청 노동자로 4개월 정도 군부대 제초일을 하고, 겨울이면 추위에 떨며 산불 감시원으로 일한다. 노인 일자리라 부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노동 강도가 강하고, 시간당 최저임금을 지급하면서 비 내려 쉬는 날이면 무급이다. 그나마도 올해는 면접에서 떨어져 다른 일자리도 신청했지만 얻지 못했다. (무릎이 심하게 아픈 상태인데도 소염제를 먹고 파스를 붙인 채)무거운 쌀포대를 둘러메고 언덕을 정해진 시간 내에 뛰어야 하는 테스트를 통해 경쟁자들을 물리쳤는데 마지막에 면접에서 떨어졌다며, 이미 내정자가 있더라고 전화로 내게 한탄했다. 불효자는 그저 최저임금 대비 혹독한 조건과 과한 노동에 대신 화를 내거나, 적당히 건강 챙기면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당부하며 통화를 마무리할 뿐이다. 칠순이 넘은 노인들 사이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최저임금 4개월짜리 일자리를 위해 경쟁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거리가 먼 만큼, 아버지의 검게 탄 피부와 진하게 접힌 주름을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집에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서 일을 하는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멀지는 않았다.
어릴 적 희망하던 직업은 내 것이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 꿈이었다. 부모의 바람은 사회가 흐르는 대로 변했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이 쿠데타로 집권한 시절에는 '크면 뭐 될래?' 물으면 ‘군인이요, 장군이요!’ 소리쳤고,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강제진압하고 독재하던 시절에 물으면 엄지 치켜들며 '대통령!' 그랬고, 만인지상인 줄 알았던 대통령보다 높은 곳에 앉은 판사들이 죄수복 차림에 손이 묶인 전직 대통령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모습을 보고 '판사!'를 외쳤다. 답을 들은 아버지의 흐뭇한 표정은 내 대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비록 무럭무럭 자라서 당신의 기대와는 달리 ‘딴따라’, 아니 뮤지션이 되어 아버지의 걱정을 달고 살고 있으니 여러모로 효자는 못되지만. 작가 커트 보네거트도 그랬다던가,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고.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나는 돌잡이 때 연필을 잡았다고 한다. 연필이 가리켰던 미래가 뮤지션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게다가 나는 악보를 그릴 줄 몰라 더더욱 연필은 쓸 일이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글을 써서 책을 내기도 했으니 아주 틀린 건 아닌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배금주의 돌잔치 진행자가 양팔을 크게 돌리며 말했듯 ‘돈마-니’ 벌지는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