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필요한 순간, 백호은침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난 섬세한 향미, 백호은침

by 티로운
2023년 12월 30일 눈 내린 북악산


1. 2024년의 시작, 2023년 회고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023년도 어영부영 지나갔습니다. 창업지원사업도 실패했고 공모전도 실패했고 미라클모닝도 실패했고 돈 모으기도 실패했습니다. 작년에 성공한 건 퇴사, 금연, 브런치 스토리입니다. 퇴사, 금연, 브런치 스토리. 제가 성공으로 분류한 일이 누군가에겐 하찮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2023년의 실패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소박한 성취 경험이었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감은 살아가는 용기를 줍니다.



2. 2023년의 성공: 퇴사, 금연, 브런치 스토리

고양이 자랑하고 싶어서 은근슬쩍 끼워넣은 사진

일단 퇴사. 2022년 11월 1일 ~ 2023년 11월 30일. 1년 1개월을 일했습니다. 차의 향과 더불어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누군가에게 차의 특징, 맛과 향을 설명하는 일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판매 서비스직의 한계를 체감하니 퇴사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제 업장이 아닌 이상 벌이도, 커리어 패스도 제한적이니까요. 몇 달간 고민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다 겨우 퇴사를 말했습니다. 퇴사에 용기가 필요했던 이유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퇴사 후의 삶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포기하고 꿈을 좇는 과정은 무모하고요. 하지만 인생은 어떻게든 굴러가더라고요. 재취업이 요원해 보여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고요.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도 가능해요. 2023년 저의 선택이 성공담으로 이어질지, 무모한 실패담이 될지는 올 한해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죠? 2024년은 용기를 갖고 불안한 현실을 이겨내는 한해로 만들어가고 싶어요.

두번째 금연. 이십대 초반부터 펴온 담배를 끊었습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담배를 찾았습니다. 불안, 우울, 분노, 좌절, 방황, 외로움의 감정을 담배로 달래곤 했습니다. 2023년 모종의 계기를 통해 10년 넘게 펴온 담배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담배는 불안한 마음을 잠시 잊게 하지만, 그런 마음을 다스리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마다 담배에 의존했던 습관을 끊어낸 이후 제 감정을 조금이나마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세번째 브런치 스토리. 2023년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브런치 기고였습니다. 브런치 선배 작가님들에겐 기고는 당연한 일상이겠지만, 저에겐 작가 신청부터 도전 과제였습니다. 2023년 12월 4일에 브런치 작가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했고, 12월 5일에 브런치 합격 메일을 받았습니다. 브런치 작가 탈락을 워낙 많이 접해서 겁부터 먹었는데 예상보다 수월하게(?) 통과해서 허무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작가 신청을 할 걸, 후회가 밀려오더군요.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실행조차 미뤄왔던 제가 정말 똥멍청이였던거죠.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닌데, 실패가 무섭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일단 올해의 목표는 일주일에 브런치 1편 이상 기고하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글을 쓸 거냐고요? 차의 향에 대한 글을 쓰려 합니다. 향기로운 차의 향기는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줬고, 남루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줬습니다. 차의 향이 저의 일상을 이롭게 물들였듯, 다른 누군가도 차의 향을 통해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글을 쓰려 합니다.



3.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난 섬세한 향미, 백호은침(白毫銀針)

백호은침과 함께 한 찻자리


2024년 1월 2일. 오늘의 차는 백호은침(白毫銀針)입니다. 지난 연말 무무대로 눈 구경을 다녀왔다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해열 작용이 탁월한 백차를 종류별로 돌려마시고 있습니다.


백호은침은 찻잎의 새싹만을 이용해서 만드는 차인데요. 뾰족한 바늘(銀針)처럼 생긴 새싹에 하얀 솜털인 백호(白毫)가 빼곡하게 덮여 있어서 백호은침(白毫銀針)이라고 불러요. 백호은침은 이른 봄 자란 새싹만을 이용해 만들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고 비쌉니다. 백호은침은 귀한 차로 여겨지는 만큼 차왕(茶王), 미녀(美女)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 무이암차인 대홍포와 중국 호남지역의 흑차 천량차도 차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어요. 대만의 유명한 차 브랜드 천인명차에서도 ‘차왕’이란 오룡차를 팔고 있죠. 이쯤 되면 차왕의 의미는 크지 않은 걸로...)


중국에서 백차는 주로 중국 복건성 복정현과 정화현, 그리고 중국 운남성 일대에서 생산되는데요. 백호은침은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복건성 복정현, 정화현에서 복정대백차 품종의 새싹을 이용하여 만든 차를 뜻합니다. 중국 서남부 운남성 일대에서 생산된 백아차는 운남 백아차, 운남 대백차, 월광백이라고 부르는데요. 운남 지역의 백아차는 주로 경곡대백차 품종의 싹을 이용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간혹 운남 백아차를 백호은침이라 파는 경우가 있는데요. 운남 백아차는 진또배기 백호은침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백호은침은 백차 중에서 가장 맑고 산뜻하고 깔끔하고 상쾌한 맛을 가졌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차맛이 가장 슴슴하다는 소리죠. 향도 거의 안 느껴지고요. 수색도 투명에 가까운 미색입니다. 오종종한 하얀 솜털이 귀여운 건엽에 비해 밍숭맹숭한 무(無)맛에 실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호은침을 계속 마시다 보면 추운 겨울을 이겨낸 싹이 피워낸 섬세한 향미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싱그러운 봄기운을 담은 풀내음, 향긋한 들꽃향, 그리고 산뜻한 단맛이 와닿는 그 순간이요. 백호은침은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매력에 충실한 차입니다. 백차의 제조 과정은 매우 단순한데요. 신선한 찻잎을 딴다, 잘 말린다. 이게 끝입니다.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 시킨 만큼 백호은침은 꾸밈 없이 순박하고 담박한 차맛을 보여줍니다.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끼듯 백호은침을 마실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낍니다.



4. 용기가 필요한 순간, 백호은침

탐스러운 백호은침

인생의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실패할까봐 겁부터 먹은 채 도망친 일이 많았습니다. 노력하기 귀찮아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변화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2024년은 계획과 실행을 반복하는 한 해로 만들어보려 해요.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침체기를 피보팅(Pivoting)의 기회로 만드는 건 전적으로 제 몫이니까요. 추운 겨울을 담담하게 견뎌낸 백호은침처럼 지금 이 시기를 씩씩하게 건너가고 싶어요.

백호은침 특유의 향기를 호향(毫香)이라 부르는데요. 한겨울의 추위와 서리가 있었기에 싱그러운 호향도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지나치면 차나무가 냉해를 입으니 곤란하지만, 적당한 고난은 차를 맛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거든요. 올해는 적당한 고난과 적절한 고생, 그럭저럭 견딜 만한 성장통을 앓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요. 용기가 필요한 순간, 백호은침을 마십니다.



5. 내게 용기를 준 책, 『검은 감정』

책『검은 감정』과 함께 한 찻자리



"실패를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상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험이라고 본다면 실패라고 여기는 사건을 통해 나의 한계, 장단점, 욕망을 발견할 수 있겠죠. 그로 인해 실패를 내 마음의 자산으로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로만 본다면 실패는 내내 미해결 과제로 남아요. 관점의 차이가 우리의 감정, 생각, 행동을 순식간에 바꿔놓습니다. 분명 실망을 일으키는 실패나 포기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를 해석할 때, 어떤 자리에 서서, 자기 마음을 바라볼 것인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라면 괴로움은 짧고 혜택은 큰 해석을 해보려 노력할 것 같습니다."
- 설레다, 『검은 감정』, 휴머니스트(2022), p81


작년에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은『검은 감정』이었는데요. 용기가 필요한 저에게 필요했던 책이었습니다. 이 좋은 책으로 연말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안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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