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치밀 땐, 따뜻한 녹차

언제나 한결같은 명차원 중작

by 티로운


오늘은 새벽 5시 반에 일어났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제가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일정이 있거나 혹은 고민이 많거나. 간밤에 잠을 설친 이유는 추위 때문입니다. 어제는 집이 춥다는 이유로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10만원이 넘는 가스비를 써도 돌아오는 실내온도는 13.5도. 최저온도 영하 11도에 육박하는 한파임을 감안해도 13.5도는 사람과 고양이가 살기 좋은 온도는 아닙니다. 10만원이 넘는 가스비를 썼으면 실내온도가 적어도 20도는 넘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여름에는 더위, 겨울에는 추위에 시달릴 때마다 짜증이 솟구칩니다. 안타깝게도 이 짜증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추위가 불러온 짜증의 감정에는 과거에 대한 후회, 가난한 현실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돈이 많았더라면 한겨울에 우풍과 결로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하이샷-시가 있는 신축 빌라에서 살았을 텐데"라는 가정은 불만족에서 출발합니다.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고, 방한 비닐을 여러 겹 둘렀지만 실내온도는 15도가 되지 않는 현실. 온도계의 숫자는 매정하고, 피부에 와닿는 한기는 비정합니다. 방한 작업을 한 덕분에 지난 겨울보다 우풍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추운 우리집. 노트북 자판을 칠수록 손가락이 차가워지기 때문에 5분마다 입김을 쬐여줘야 하는 현실. 남루한 현실에 불만을 품지 않고 안분지족? 애석하게도 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름엔 지긋지긋한 더위에, 겨울엔 진절머리 나는 추위를 몸소 체감할 때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하지만 이 집을 벗어나고 싶은 감정을 품을수록 동시에 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 나이 먹도록 모은 돈은 변변찮고, 경력은 시원찮고, 무엇 하나 제대로 잘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마인드가 건강한가? 알고 보면 불안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형편 없는 사람인데. 도전 정신을 갖고 전력으로 노력해도 나아가기 힘든 게 현실인데, 조금만 힘들면 포기부터 생각하는 게 나라는 사람인데. 다른 집으로 이사가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을 계획을 세우는 게 합리적인 해결책임을 알고 있지만, 당장 추운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못난 저를 탓하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를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서른이 넘은 나이에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저는 과거의 어떤 선택을 후회하고,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하며 평생 살아갈테지만요. 차(茶)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감정의 늪에서 비교적 재빨리 헤어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춥지만 어제의 짜증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는 건 전적으로 차(茶) 덕분입니다. 어제와 오늘, 성실하게 차를 마셨습니다.


어제는 한국제다 황차, 명인지가 정산소종, 백학제다 만송포를 마셨고요. 오늘 아침은 지리산 명차원 중작을 마셨습니다. 어제의 한국제다 황차는 볶은 둥글레와 결명자의 구수한 향미처럼 우려져서 무난하게 마시기 좋았고요. 지난 주 명인지가에서 구입한 2019년산 정산소종(화향)은 시음할 때는 평범했는데, 어제 직접 우려보니 동방미인의 풍미가 슬긋 피어올라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백학제다 만송포 2021년산은 고소하고 달보드레한 수선처럼 무르익었고요.


글을 쓰는 지금 마시고 지리산 명차원 중작 녹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명차원 중작은 부드럽고 고소한 율향과 현미, 수수를 섞은 미음죽을 연상시키는 맛을 지녔는데요. 지리산 명차원 녹차는 언제 마셔도 한결같은 맛과 향을 보여줍니다. 지리산 명차원 녹차의 우전, 세작 모두 맛있지만, 요새는 명차원 중작을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명차원 우전과 세작은 진작 다 마셔서 없어버렸고요. 현재 중작만 남았거든요. 물론 중작인데도 전혀 떫거나 쓰지 않습니다. 맛과 향이 일반적인 세작 퀄리티에 준합니다. 전반적으로 고소한 율향과 보드라운 단맛, 입안을 감싸는 부드러운 구감, 안정적인 바디감, 무엇보다 합리적인 가격. 이 모든 걸 감안하면 지리산 명차원 중작은 매일 마시기 좋은 녹차라고 생각해요.


차(茶)의 향과 맛을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는 순간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듯, 좋은 차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차(茶)는 어떤 날 기쁨을 축하해주고, 어떤 날 슬픔을 위로해주고, 어떤 날 짜증을 달래주고, 어떤 날은 좌절한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명차원 중작은 언제나 한결 같은 맛과 향으로 저를 품어주는 차(茶)인데요. 쓰린 속을 달래주는 미음처럼 성난 마음을 다독여주는데요. 오늘도 차(茶)에게 위로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추위가 견딜만한 이유 중 하나는 방한 텐트와 온풍기가 오늘 도착하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어제 추위 때문에 방한용품을 홧김에 지르긴 했는데 이 선택,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제는 추위 때문에 세상만사 짜증스럽고 추운 집에 사는 내 처지를 비관하고 한탄했는데, 오늘은 실내온도 18도를 고대하며, 쿠팡 기사님 도착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보다 조금은 따뜻하게 보낼 올 겨울을 기대하며, 오늘아침도 맛있는 차를 마셨습니다. 추위에 일희일비할지라도 결국은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추위에 온갖 지지리궁상을 떨었던 어제를 반성하면서 커트 보니것 소설 <제5도살장>의 문구로 마무리합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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