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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 Aug 10. 2023

임신은 어차피 불공평한 거예요

어쩌다보니 난임

   

 결혼한 지 아직 일 년이 채 되지도 않았지만 느긋하게 신혼을 즐기기엔 나와 남편의 나이는 결코 적지 않았다. 신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만 나이를 무시하면 나는 올해 마흔을 넘겼다. 결혼 전 받은 산전검사에서 amh(난소나이)는 1점대였고 최대 4번의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고 바로 난임 병원으로 달려가라는 어명을 받았다. 


 싱글 시절 나는 결혼은 언젠가 하겠지, 임신도 언젠가 되겠지라고만 생각했을 뿐 난임 판정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은 결혼을 기점으로 불과 일 년 안에 벌어진 일이다.     


 사십 대에 결혼을 하게 되면 장단점이 극명하다. 장점은 비교적 결혼을 빨리한 친구들에 비해 싱글이어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딩크족으로 살지 않는 이상 '결코 쉽지 않은 임신의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흑과 백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 험난한 허들이었다. 물론 간혹 시험관을 하면서 잠시 쉴 때 자연 임신이 되었다더라, 흑염소를 먹은 후 되었다더라, 술 먹고 얼떨결에 되었다더라,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을 푹 내려놓으면 된다더라 하는 카더라는 수없이 들어봤지만 내겐 아무런 도움과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임신이 되기 전까지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평소 꿈을 많이 꾸는 편이어서 자연임신 시도 기간에는 매달 태몽의 형태와 비슷한 꿈을 꾸고 혼자 기대했다가 쓸데없이 조심했다가 혼자 우울해지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내가 꾼 꿈들은 무려 방울토마토와 새끼 고양이, 그리고 멧돼지였다. 하지만 임신 테스트기에서 선명한 한 줄을 보는 순간 내가 꾼 꿈들은 결국 모두 개꿈으로 판명이 났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지금 임신을 하더라도 사십 대에 초산,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즈음이면 나는 오십 줄에 들어선다.     


 4번의 시도가 모두 기대와 실망 속에서 끝이 난 후 며칠 동안은 무언가에 홀린 듯 난임 병원을 검색했다. 내가 선택한 담당교수는 이름 탓에 인터넷상에서 일명 장군님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는 진료가 30초 컷이더라, 차수의 간격이 커서 시간이 금인 고령에게는 잘 맞지 않다더라, 말투가 차가워서 상처를 받았다는 등의 후기가 난무했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끌어당겼던 것은 손기술 하나는 최고더라! 였다.     


 나는 평소 따뜻한 말 한마디에 감동을 받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실력이었다. 또한 담당교수는 3일 배양이 아닌 5일 배양만을 고집한다고 했다. 3일 배양보다 5일 배양까지 가는 배아의 가능성은 물론 떨어지겠지만 임신이 되더라도 건강하고 안전한 임신을 하고 싶었다.      

    

 난임 병원을 가기까지 나의 감정은 예측할 수 없는 성난 파도처럼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았다. 나는 평소 아이가 자연스럽게 생긴다면 감사히 받고 그렇지 않다면 의학의 힘을 빌려서 낳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남편은 내가 본 사람 중 아이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일에 대한 욕심이 큰 나는 아이가 없어도 남편과 단 둘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아이가 있음으로써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편, 아이가 있어서 과연 행복만 할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질문은 추후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다시 해보고 싶다.     



 

 우리 부부의 아이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는 한 사람의 손을 번쩍 들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도 아이를 싫어하지는 않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 지금을 후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한 명은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다. 내 감정의 소용돌이와 변화가 고작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된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보상심리가 반영된 나의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난임 병원을 가기 전까지 남편에게 오만가지의 화를 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애매하고 들끓는 이 마음은 담당교수와의 첫 진료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교수님은 미리 준비해 온 산전 검사결과를 살펴본 후 난소나이가 너무 낮다며 왜 이제 왔냐고 혼(?)이 아닌 혼을 냈다. 나는 그때 몽롱한 졸음에서 번쩍 깨어난 듯했다.     


"지금 간절하게 임신을 원하는 게 맞나요?"  


처음에는 교수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맞아요. 전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면 그 분위기에서 당장 진료가 끝날 것 같았다. 장군님과는 영원히 바이바이~   

  

"아내도 이렇게 (임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데 남편은 얼마나 더 없겠어요."     


속으로 언젠가는 임신이 되겠지 하고 느긋하게만 생각했던 남편을 조금 더 혼(?) 내주길 바랐다.     


"남자가 아무리 아이를 원해도 선택은 결국 여자가 하는 거야."     


그리고 이어서 들은 장군님의 말은 어떠한 말보다도 내게 강력한 위로와 힘이 되었다.     


"임신은 어차피 불공평한 거예요."     


그런데 이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잖아? 임신은 어차피 내가 하고 아이도 내가 낳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왜 당연한 말에서 위로를 받고 힘이 났을까. 


 부부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흔히 가치관의 문제 또는 성격차이라고 한다. 물론 이 부분들이 큰 영향을 끼칠 때도 있지만 ‘가치관’과 ‘성격’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하나씩 벗겨보면 의외로 아주 단순한 덩어리만이 남아있다. 그 덩어리는 바로 '욕구'인데 이것이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러했다.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것. 바로 '너 때문에'이다.

(임신자체에 대한 부담감은 더 깊은 나의 내면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차차 풀어가도록 하겠다)     


 살을 보태어 말하자면 왜 내가 시험관까지 해야 하나(그런데 남편이 시험관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남편이 원해서 내가 결정했으니(나는 순전히 당신 때문에 결정했으니, 그렇게 싫으면 안 하면 되잖아! 그런데 안 하기엔 나도 후회할 것 같기도 하잖아..) 그래서 네가 나에게 지금보다 잘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그래도 내가 큰 마음먹고 용기를 냈으니 나한테 더 잘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다.




 때로는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들이 타인을 통해서 말끔하게 정리될 때가 있다. 전문가에게 심리상담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심지어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깨달을 때가 있지 않는가. 나는 장군님에게 마치 심리상담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 30초 컷으로.

출처 : Unsplash의 Anna Hecker



그래, 임신은 내가 하는 거야.

비록 시험관의 과정은 힘들겠지만 

창조와 탄생의 모든 순간들은

결국 나만이 오롯이 느끼는 것이고

세상 무엇보다도 위대한 일을 해내는 거잖아.



 나에겐 시간이 없으니 인공수정을 건너 띄고 바로 시험관으로 직행해야 한다며 끝으로 시술을 할 건지 결정하고 다시 오라는 교수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난임 판정을 받고 시험관이라는 꿈 꾸지 않았지만 결국 꿈꾸게 되는 신비로운 길에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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