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었다고 해서 분리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부득이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곧바로 휴직을 하였다. 교사라는 직업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육아휴직이 아닐까 싶다. 출산을 5개월 앞두고 산전휴직을 하였고 방학까지 포함하면 7개월 정도 휴직 상태로 뱃속 아이를 키운 셈이다. 업무 스트레스로 아이에게 어떤 좋지 않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고도 내게 남은 육아휴직을 다 썼다. 만 3세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것이 아이한테 좋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엄마와의 상호작용보다 아이에게 좋은 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이는 애착 인형 같은 것도 없었다. 소위 '분리 불안'이 없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오랜 시간 볼 일을 봐도 나를 찾으며 울지 않았고, 처음 어린이집에 맡겨진 30개월 차에도 손 흔들며 비교적 잘 떨어졌다. 그랬기에 우리 아이는 엄마와의 애착형성이 비교적 잘 되어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유독 '이별'과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것은 마음이 여리고 감성적이며 공감능력이 뛰어난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에게 '불안'의 정서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복직과 어린이집 입학이 동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로 인한 엄마와의 '분리불안'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부분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엄마와의 이별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가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그것만이 이유라고 볼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놀이를 했다. 아이의 지시대로 아빠와 아이는 한편이고 엄마는 악당 역할을 하게 되었고 아빠와 한편이 된 아이가 나를 공격해 나는 힘없이 쓰러지는 시늉을 냈다.
"깨꼬닥! 엄마 죽었다. 으으윽... 엄마가 죽으면... 으으윽..."이라고 말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깜짝 놀라서 '놀이하는 중'이라고 일러주었지만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모르고 온몸을 들썩이며 서럽게 우는 것이다. 울음이 잦아들고 나서 아이에게 물으니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슬펐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아이 월령에서 '죽음'이라는 뜻을 아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마저도 미루어 상상해서 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은 '청개구리'동화에서였다. 말을 안 듣는 청개구리 때문에 엄마가 하늘나라에 갔다는 이야기를 아는 아이에게 때때로 '말 안 들으면 엄마도 청개구리 엄마처럼 하늘나라에 갈지도 몰라'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그 시기에 외증조할머니 장례식에도 가본 터라 '죽음'에 관한 어렴풋한 인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이는 '죽음'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로부터 장난으로라도 '엄마가 죽는다'라는 말만 해도 세상이 떠나가라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엄마와의 이별이 그리도 슬픈 아이를 보며 안쓰럽지만 기쁘기도 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존재가 또 한 명 있다는 것이 기쁜 데다 그것이 나의 자식이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하지만 아이가 놀이에서 조차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은 아이에게 엄마의 죽음이 대단한 고통이었다는 말이다. 평소 스치듯 내뱉은 '엄마도 청개구리 엄마처럼 죽을지도 몰라'라는 말은 결코 아이에게 가벼운 훈계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아이의 '불안'까지 조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에게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말해준 적이 있다.
"엄마도 나중에 죽어요?"
"그럼~ 엄마도 죽지."
"엄마 죽으면 안 돼요. 나 어른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죽어도 겸이는 또 다른 가족이 있어. 겸이도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하잖아. 그럼 아내도 있고 겸이 같은 아기도 생기고. 엄마는 그럼 할머니가 되겠네. 엄마 말고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 당시에는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죽는 것이 사실이고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과연 아이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진짜인지가 궁금해서 그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세상의 전부인 엄마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을 텐데 지혜롭지 못한 나는 아이에게 지식 전달자 노릇만 했다.
뿐만 아니다. 가급적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도 가끔 욱해서 정말 삐져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쓰는 방법 중 하나가 그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엄마 화나서 갈 거야."라며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아이가 벼락같이 울며 달려든다. 물론 나도 아이의 그런 반응을 유도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싶어 지는 것이다. 문을 닫고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다가 다시 들어가곤 했는데 그런 행동 역시 '엄마가 떠날까' 불안했던 아이에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분리불안'은 분리된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아이와 얼마나 양질의 상호작용을 하였고, 불안을 유발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였는지도 중요한 요소이다.
심리학에서 불안은 부모로부터 대물림된다고 한다. 부모가 '불안'의 요소를 갖고 있으면 아이 역시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릴 적 기억을 되돌려보면 출근하는 엄마를 몇 번이고 쫒아 울고 매달리는 일과를 반복하던 때가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그런 경험들로 인해 다른 인연들과의 이별도 남들보다 유독 힘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분리(또는 이별)'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을 지닌 아이로 성장시키려면 부모가 불안을 떨쳐버려야 한다. 부모의 불안으로 인해 과잉보호 또는 지나치게 허용적으로 자란 아이들이 부모의 불안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한다.
'불안'을 유발하는 말과 행동도 이제부터는 금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