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말죽, 보말칼국수: '제주'하면 빠지지 않는 것들.
보말죽, 보말칼국수. '제주'하면 빠지지 않는 제주의 대표음식이다. 처음 이 음식들을 먹었을 때는 그 빛깔 때문에 매생이나 김과 같은 해조류 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보말은 제주의 '고둥'이다. 보말, 몸국처럼 육지에서는 낯선 이름들이 제주에는 참 많다.
카페에서는 고사리철이 막을 내리고 보말 철이 오고 있다고 했다. 나도 도전해보기로 했다. 함덕 서우봉 해변에 그 많던 다슬기들이 모두 소라게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허무해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카페에서 나름의 사전조사도 마친 터였다. 성산 광치기 해변에 차를 대놓고, 양파망 하나만 들고 바위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곳에는 바위마다 크고 작은 보말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보말을 처음 보는 5살 우리 아이도 꽤 여러 마리 주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미세먼지가 육안으로도 뿌옇게 확인되는 그날, 우리는 감기를 감수하고 보말 따기를 즐겼다. 제정신인 부모는 아닌 셈이다.
남편은 물길을 건너, 보다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줍고 있는 무리 가까이로 갔다. 그곳에는 내쪽에 있는 보말보다 더 큰 녀석들이 있다고 했다. 멀리서 해녀들이 문어를 낚는 모습도 보였다. 성산 쪽 해녀들이 일반인의 해산물 채취에 관대한 편이기도 했지만(남편의 말에 근거하면), 해녀들이 보말을 줍는 시기가 지나서 큰 터치가 없는 때이기도 했다.
이렇게 수확한 보말을 집으로 들고 왔다. 물에 슬쩍 씻어서 끓는 물에 넣었다. 구수한 냄새가 어릴 적 학교 앞에서 팔던 삶은 다슬기나 번데기를 연상시키게 했다. 입에 넣고 힘껏 빨아 알맹이를 쏙 빼먹던 기억. 하지만, 이 녀석들은 입구를 딱지로 꽉 막고 있어 그리 먹지는 못한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서랍에서 옷핀을 찾아 내 딱지 사이로 찔러 넣은 후 뱅그르 돌리니 알맹이가 쏙 빠졌다.
우왑! 쓰다!
보말 맛에 대한 첫 느낌은 이랬다. 보말죽과 보말칼국수를 먹었을 때는 분명 시원한 맛이 났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주운 보말은 이상하게 쓰고 떫었다. 잘못 주워왔나, 그래서 그렇게 지천에 널려 있던 걸까,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나중에 제주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보말은 종류가 여럿이라고 했다. 주로 딱지가 볼록렌즈처럼 튀어나온 녀석들은 맵거나 쓴 맛이 강해서 먹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주워온 것들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볼록렌즈 딱지였다. 우선 보말은 맞다고 하니 계속 살을 발라내 본다. 그래도 쓴맛 사이로 구수한 맛도 전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껍질 속에서 뽑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사리를 딸 때처럼 '보말 살 발라내기'도 무념무상이다. 어느새 산처럼 쌓인 껍질 사이로 아주 적은 양의 보말 알갱이가 모였다. 그런데 무념무상으로 살을 발라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허리와 눈이 아프고 핀을 쥐었던 엄지와 검지도 아프다. 먹기 위한 과정이 과연 중노동이다. 보말죽과 보말 칼국수는 괜히 비싼 것이 아니었다.
먹고 남은 보말들은 죽으로 만들었다. 보말죽과 칼국수가 초록빛이 돌았던 것은 다름 아닌 보말의 내장 때문이었다. 전복내장을 넣어 갈빛이 도는 전복죽을 만들듯 보말죽 역시 보말의 내장이 그 맛과 빛깔을 책임진다. 구수한 맛은 보말의 살보다는 내장 쪽에서 내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쌉쌀한 맛의 보말이었지만, 죽으로는 꽤 괜찮은 맛을 냈다.
이날 이후, 우리는 기회가 날 때마다 보말을 찾았다.
꽤 큼직한 녀석들이 보여 물속으로 손을 쑥 들이밀면, 돌 아래로 댕그르르 굴러 떨어진다. 이런 녀석들은 보말이 아니라 백 퍼센트 소라게이다. 보말의 등껍질 속에 사는 녀석들인데 처음에는 실수로 이 녀석들도 데리고 와서 물에 삶았는데 홍게처럼 익은 모습을 보니 보말과는 다르게 어쩐지 가여웠다. 이런 실수도 거듭하다 보니 다음부터는 바위에서 댕그르르 떨어지는 녀석들은 보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놓아주게 되었다. 고사리를 딸 때처럼 보말도 먹을 때보다 주울 때 더 기쁨이 있었다. 멀리 찾아간 성산 바다보다 집 앞 삼양 바닷가에 더 실하고 많은 보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쩝;;;)
하루는 요가원 언니에게 주워온 보말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나도 제주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요만한 녀석들을 많이 잡았지. 하지만 이제는 요만한 녀석들은 잡지 않아. 간에 기별도 안 가거든."
그녀는 깔깔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언니의 말은 과연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내 주먹만 한 뿔소라들과 엄지발가락만 한 보말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한 문어들까지. 부러워하는 나에게 언니는 비밀스럽게 그것을 줍게 된 장소를 알려주었다. 이후에도 언니는 문어를 잡은 이야기며, 그 방법까지 술술 전수해주었다.
주말에 남편을 꾀어 그곳에 갔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녀가 보여준 사이즈의 소라는 없었다. 보말조차도. 실망을 안고 돌아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니 지난번 그곳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눈에 띄지 않는 스팟이 나온다고 했다. 남편이 쉬는 날, 남편의 지인까지 동원해 그곳을 찾았다. 과연 언니의 말대로 굵은 씨알의 소라들이 물속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마을 어장의 경우 일반인이 함부로 채취하면 어마어마한 벌금형에 처해진다고 한다. 덜덜덜;;; 특히나 뿔소라는 씨를 뿌려 양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모르고 했을 때는 마음 놓고 주웠지만,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조심스러워졌다. 다음부터는 해녀들이 채취하는 기간이 지났거나 마을어장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채취하기로 했다. 또한 '금어기'도 있으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것도, 남편회사를 찾은 해녀회를 통해 전해 들었다. ('금어기'에는 해녀들은 물론 누구도 해산물을 채취하면 안 되는데, 이른바 '씨 보존'을 위해서이다. 너무 어린 시기에 모두 잡아 버리면 성어가 되었을 때 잡을 물량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이때는 곳곳에서 해녀들이 감시를 한다.)
제주의 바다를 제대로 즐기려면 물때를 잘 이용해야 하는데, 보말이나 소라를 잡을 때에도 예외는 아니다. 물때표를 확인하여 간조 중에서도 수위가 가장 낮을 때 가야 줍기가 수월하다. 우리는 주말이면 반드시 물때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수위가 낮으면 보말을 줍고, 수위가 높으면 물놀이를 즐겼다. 우리의 정보 덕분에 훌륭한 스팟을 알게 된 남편의 동료는 그 후로 우리보다 더 많은 수확을 하기도 해서, 도리어 우리가 얻어먹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소라와 보말 줍기에 재미가 들린 남편은 이윽고 갈치잡이 배까지 타자고 졸라댔다. 조그만 어선이 아니라며 나를 꼬셨지만, 배를 타는 일은 무서웠다. 게다가 아이까지 데리고는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나의 반복되는 거절에 남편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방파제 낚시 무리에 끼었다. 주로 세월을 낚았지만 가끔씩 손바닥 만한 고기를 낚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우리집 냉동실을 물고기로 가득 채울 예정이라는 둥, 요샌 한치 배를 타러 가는 때라는 둥 허풍 섞인 계획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이렇듯 제주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 주었다. 언제 보아도 근사한 풍경과 크고 작은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재미, 그리고 몸 던져 놀 수 있는 즐거움까지 말이다.
다음에는 문어잡기에 도전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