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주는 고사리장마

by teaterrace



'고사리 장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장마는 보통 6월 말에서 7월 초쯤 계속 내리는 비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4월과 5월에 제주에 장마가 왔단다. 3월 이후로 노란 볕이 좋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빨래가 그리도 잘 말랐더랬다. 1층 아파트에서 베란다 창을 열어 빨래를 그득히 널어놓고 외출을 하면, 돌아왔을 때는 바짝 말라있는 것이 시골 사는 느낌이 한가득해져 '이게 진짜 진짜 제주지' 싶었다.


내 본거지는 오래된 도시라 길이며 건물이며 모두 낡았다. 신도시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다 보니, 현재의 본거지는 아이 키우기에 불편한 점이 많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런데, 나란 사람이 웃긴 것이 이 도시에 애정이 없다 보니 사소한 불편함이라도 생기면 모두 이 땅에서 살기 때문이라는 불평을 하게 된다. 반대로 제주는 워낙에 가고 싶었던 땅이라서 그런지 빨래 잘 마르는 것조차 이 땅의 혜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혜택의 땅 제주에서 언제부턴가 볕은 쨍한데 빨래가 마르지 않는 날들이 계속된 것이다. 아직 장마가 오려면 멀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제주의 혜택이라고 여겼던 황홀한 날씨가 갑자기 꿉꿉한 불편함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바다마을이라 습한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빨래가 바짝 말랐던 시기가 있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창문을 닫고 제습기를 틀어둔 외출하기 일쑤였다.


'요즘 빨래 진짜 안 마르지 않아요?'


요가원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목소리로 '요즘 고사리 장마잖아'라고 이야기한다.


고사리 장마라니. 이건 또 뭔 소리인가, 하고 물으니, 고사리를 키우는 장마란다. 고사리는 습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라 물이 풍족해야 잘 자란다고 한다. 고사리가 제주에서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제주의 날씨까지 이 녀석의 성장을 돕게끔 바뀌는 것인지, 고사리를 따기 전에는 그 위력을 실로 알지 못했다. 제대로 된 고사리 장마를 거쳐야 비로소 고사리 풍년이 온다. 사실 고사리를 키우기 위해 기후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이 기후에 적합한 식물이 잘 살아남은 것이겠지만, 어쨌든 '고사리 장마'라는 말만 들어봐도 고사리가 제주를 대표하는 식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고사리를 키우는 장마라니 참으로 환경친화적인 동네다. (이것 보시라. 또다시 애정 가진 땅에는 호의적인 나를.)


아무튼 이런 꿉꿉한 날씨 덕분에 올해 고사리는 풍년이었다. 5월이 다 되어가도록 넉넉한 고사리를 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고사리 꽃이 피어 대가 뻣뻣해 지기 전까지 마음껏 고사리를 땄다. 더는 없을 만큼 충분히 땄어도 비가 온 다음날에 또다시 가보면 키가 훌쩍 자란 고사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하루 만에 아기 고사리가 어른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있다. 고사리 장마라는 이름의 비는 정말 마법사 같았다.


이렇게 딴 고사리를 오래 보관하려면 삶아서 말려야 하는데, 삶는 것도 일이지만 꿉꿉한 날씨 속에서 과연 잘 말릴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제주바람은 이 고사리들을 충분히 잘 말려줬다. 물론 식품건조기를 써서 말릴 수도 있지만 그 많은 양을 모두 건조기에 맡길 수는 없다. 아침 해가 뜨면 대자리를 펴놓고 삶은 고사리를 널어놓고, 저녁 무렵이 되면 거둬들인다. 이 무렵 아파트 입구 여기저기에는 고사리를 말리는 풍경이 매우 일상적으로 목격되었다. 심지어 주차장 조차 고사리 몫이 될 때도 있었다. 귀한 고사리를 잘 말리기 위해서 이때는 일기예보에도 귀를 기울이고 지내야 했다.


이렇게 잘 말린 고사리를 지퍼백에 넣어 시댁에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어떤 선물보다도 좋아하시며 젊은 사람이 이런 것도 할 줄 아느냐고 칭찬해주셨다. 내 기쁨으로 딴 고사리를 보내드린 것뿐인데 이렇게 만족해하실 줄은 몰랐다. 고사리 장마 속에서 지내는 것은 분명 불편함이 많았지만, 고사리 장마는 고사리 따기를 통해 힐링을 주었고, 의외의 효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제주 이 녀석. 파도 파도 계속 새로운 것이 나온다.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한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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