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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an 24. 2019

주말부부의 아이로 산다는 것



"엄마, 우리 동물원 갈까요?"


우리 아이는 동물원을 참 좋아하는 5살이다. 동물원은 우리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아이가 어려서는 자주 데리고 갔는데 조금 크니까 더운 날엔 더워서 동물들이 밖에 안 나온다며 안 갔고, 추운 날엔 동물들이 추워서 집 안에 있다면서 안 갔으며, 날씨 좋은 날엔 미세먼지 핑계를, 그것도 아니면 일찍 출발하지 않아서 주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안 갔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보니, 마음을 먹기가 오히려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주말 가족이 되다 보니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갈 때가 많아졌다. 특히 주말에 가족행사라도 있는 주간이면, 떠나는 날  하루 정도는 남편도 집에서 휴식을 하다가 가야 할 것 같아서 우리의 외출은 더 힘들었다. 물론 남편은 제주로 돌아가는 동안 쉬면 된다고 말하지만, 막상 애쓰게 하고 돌려보내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부모의 카테고리 안에서 실망이 커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아이였다.


한 번은 남편이 회사 일로 바빠서 금요일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취소를 하는 일이 생겼다. 비행기 시간까지 최대한 맞춰보겠다던 남편은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다고 전화를 했다. 토요일 아침 비행기라도 끊어서 오겠다고 했지만, 그냥 쉬라고 했다.

 

"그럼... 그래도 될까?"


남편도 한 주 내내 바빠서 몸이 곤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주에는 남편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동물원에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겸아... 있잖아...."

"알아요, 나도. 아빠가 없어서 안 된다는 거."


엄마 아빠의 수많은 핑계 속에 아이는 이제 체념하는 법도 배운 모양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아이가 하자고 하는 많은 일들은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서 '아빠가 오면 하자'고 아이를 설득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를 떠봤다가 엄마의 대답이 심상치 않자 스스로 정리를 해버린 것이다. 고작 5살 아이가 말이다.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아이에게 아빠의 빈 곳을 채워주지는 못할 망정, 더 확실하게 아빠의 부재를 확인시켜주고 있었구나.


운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일엔 5분 거리의 학교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길을 운전하는 것은 어쩐지 두렵고 아이를 태우고는 더더욱 부담스럽다. 아이가 두 돌쯤 되었을 때는 단둘이 제주 한달살이를 하며 이곳저곳을 잘도 누비면서 다녔는데, 이제 학교와 집을 벗어나는 곳을 운전을 하는 것이 겁이 난다.


운전이 안된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전철을 타고 한 번만 갈아타면 대공원역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전철역에서 동물원까지 걷는 거리가 꽤 되고, 동물원 구경을 마치고 다시 전철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힘들다고 하면 업어주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기 때문에 선뜻 대중교통을 이용할 결심을 하기가 어려운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아빠가 없을 때 먼 곳의 외출은 삼가게 되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엄마의 무능함을 자책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평일에 아이의 등하원을 전담하는 부모님에게 주말만큼은 휴식을 드리고 싶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주말에는 가급적 친정에 가지 않는다. 주말부부 생활 초반에 친정엄마는 일주일 만에 만나는 사위에게 손수 지은 따뜻한 밥 한 끼라고 먹이고 싶으시다며 토요일 아침 식사는 꼭 와서 먹으라고 하셨다.


"엄마, 사위가 손님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대접하려고 하지 마세요."

"맞아요, 어머님. 저 가족이에요. 매주 오잖아요. 오랜만에 한 번 오는 거 아니구요."


몇 달의 시도 끝에 친정엄마도 가끔은 이런 의례를 거르긴 하신다. 하지만, 당신이 못 해먹이시면 한 끼라도 사주시려고 하신다. 그런 부모님들이시기에 주말에는 더더욱 휴식을 드리고 싶다.


그런데, 이번과 같이 남편이 오지 않을 때면 아이와 둘이 먹는 식사가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다. 외로움도 외로움이지만 식단이 엄청 단출해진다. 평일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기껏 찌워놓으면, 주말에 무심한 부모덕에 강제 다이어트로 아이의 무게가 줄어드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하물며 남편이 안 오면 더 심해진다. 옥수수 컵수프에 밥을 말아주거나 누룽지를 끓여준다. 조금 더 노력해봤자 계란 간장밥이다. 물론 반찬은 없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널브러질 때가 많다. 특히 아이가 TV를 보고 있으면 내 몸이 매우 편해지기 때문에 이러면 안 되지, 싶으면서도 TV에 아이를 위탁해버릴 때가 많다. 그러고 난 후 밀려오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주말은 낫다.


평일에 갑자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더 복잡해진다. 나는 방학이 있는 대신 평일에 연가가 어려운 직업이다. 연가를 내려면 미리 수업을 교체하고 연가를 신청해야 한다. 그래서 갑자기 아이가 아프면 정말 곤란해진다. 주말 부부가 되기 전에는 남편이라도 응급 연차나 반차를 낼 수 있었는데 지금 의존할 곳이라고는 친정부모님 밖에 없다. 이마저도 어려운 가정도 많겠지만, 우리 가정은 남편의 제주 발령 이후로 발생한 어려움이기 때문에, 주말부부인 상황을 탓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내가 아프면 병가라도 낼 수 있지만 아이가 아프면 그마저도 불가하다. 게다가 부모님에게 부탁드릴 수 있는 것도 가벼운 감기나 장염 정도인데 그보다 상황이 심각하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오전 수업이 없다는 전제 하에 교감선생님께 전화해서 출근을 늦추거나 출근한 후에 공강 시간에 외출을 해야 한다. 어떤 방법을 쓰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병원을 다녀오면 아이는 또 친정부모님 몫이 된다. 출근을 했어도 마음은 아이에게 가 있다.




가고 싶은 곳을 데려가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가끔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아빠와의 놀이를 필요로 하고 심지어 엄마와 놀 때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를 수없이 반문하게 된다. 아무래도 사내 아이다 보니 넘치는 에너지를 어느 정도 몸으로 풀어야 하는데 엄마와의 놀이로는 이제 성에 차질 않는다.


목욕을 할 때도 그렇다. 손이 설은 남편을 보다 못해 아기 때부터 주로 내가 목욕을 시켰는데, 이제는 아빠와의 목욕을 더 좋아한다. 아빠와의 목욕은 힘 겨루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와의 목욕이 이성의 다른 신체를 보고 만지는 시간이었다면, 아빠와의 목욕은 자신과 유사한 신체구조를 보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엄마 쭈쭈다. 엄마는 꼬추가 없네."인데 반해, "나도 크면 아빠처럼 꼬추가 커져요? 털도 생겨요?"라며 남성으로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물론 둘 모두 각각의 장점이 있지만 이제 아이는 동적 에너지를 쓸 수 있는 아빠와의 목욕을 더 기다린다.


생존수영처럼 욕조에 전신을 담그고 힘을 쭉 빼서 몸이 뜨게 하거나, 처음으로 일어선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를 감는 날이면 "엄마, 아빠한테 꼭 자랑해줘요."라며 아빠의 칭찬을 기다린다. 아빠가 경쟁자인 동시에 롤모델인 아이는 자신의 변화성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빠가 곁에 있었다면 현장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며 의기양양했을 텐데 엄마의 전언이나 동영상 전달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빠가 오면 목욕은 반드시 해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일이 되었다.


나도 어렸을 적, 내가 기억이 나는 선에서는 초등 저학년쯤, 아빠가 해외 근로로 집에 계시지 않았다. 우리처럼 주말에 한 번이 아니라 1년에 한 번 만나는 상황이라 '이산가족'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늘 그리운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우리 아이도 엄마를 넘어설 정도로 아빠의 존재가 대단해진 것은 아니지만, 딸인 내가 아빠를 그리워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아빠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우리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이 길의 끝이 있기는 한 걸까.


한없이 긴 터널을 걷는 기분을 지울 수 없을 때가 바로 아이가 아빠를 그리워할 때, 아빠가 없기에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아빠의 부재를 엄마인 내가 대신할 수 없을 때이다. 


아빠 이야기를 하다가 곤히 잠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밤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아픈 것이 몸이 힘든 것을 앞선다. 내일 아침부터는 아이의 제안에 "그러자"라고 대답해 줘야겠다.


내 몸이 부서져도, 그래! 가자, 동물원. 네가 원하면 엄마가 지구 끝까지라도 데려다 줄게. 너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주말부부의 자녀로 자라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잘 자,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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