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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Feb 13. 2019

주말부부에게 제주는 불효의 땅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으로 우리는 주말부부가 되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주말부부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예상했지만, 제주에서 이렇게 갑자기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러워 할 겨를이 길지는 못했다. 짐을 챙기는 일부터 부모님께 알리는 일까지 우리에게는 첩첩 쌓인 일들이 많았다.
 

부모님께는 전화로 알렸다. 찾아뵙고 말씀드리기에 대전은 거리가 있었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어머님께선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간다고 하니 너무 멀어지는 것 같다며 울먹이셨다고 한다. 전화통화를 마친 남편도 '에효, 내가 불효하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근처에 사는 게 아니라서 자주 뵙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부모님과 지금보다 멀어지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라는 곳은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먼 땅이었다.  


친정부모님은 더 아쉬워하셨다. 매일같이 함께 식사하고 인사를 나누던 식구 하나가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으신 것이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인사를 드리려는데 친정엄마가 남편을 끌어안고 "왜 이렇게 멀리 가..."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님, 저 일주일마다 올 거에요. 염려마세요"라며 엄마를 다독였지만 남편의 눈 역시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지켜보는 나도 눈시울이 빨개졌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우리 가족만 익숙해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들이 이렇게 서운해 하실 줄은 몰랐다.  




남편이 제주로 가고 첫 하루를 보내고 나서 시아버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어떠냐, 남편 없이 하룻밤 보낸 소감이?...... 너는 힘들겠지만, 나는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매일 1시간씩 자동차로 출퇴근 할 때는 영 마음이 안 놓였거든." 


남편이 제주로 간 것이 비록 서운하기는 해도 부모님이 안심하시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육부부(제주-육지 주말부부)가 때로는 좋은 점도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주말부부 생활에 익숙해졌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부모님들도 우리의 생활에 적응하셨다. 금요일 밤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떠나다보니 대전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은 시간상 어려웠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주말에 집에 올 때 맞춰 오시기도 했고, 가까이 사시는 친정부모님은 주말 중 한끼 정도는 꼭 같이 식사를 하시려고 노력하셨다.  



가끔씩 남편이 본사로 출장을 가는 일이 있을 때 부모님댁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가끔이었다. 주말가족인 우리를 안쓰럽게 여기셔서 직접 찾아뵙지 못해도 그러려니 하셨다. 


뿐만 아니라 제례행사에도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물론 평소에도 참석을 해왔던 것은 아니지만 못갈 때마다 형님댁에 쌓이는 부채의식 같은 것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하면서 그리고 아이가 어려서 그외 기억나지 않는 사유들로 불참하게 되었다. 남편만 갈 때도 있기는 했지만 내가 참석했던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결혼 전에 제사는 절에서 모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제사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았었는데 위탁을 해도 직접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었다.  


암튼 첫 참석이자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참석이 되었던 날, 아버님께서는 "매번 오라고는 안할테니 돌아가면서 격년씩은 참가를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신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직장인에게 꿀같은 주말을 거기에 희생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촌 며느리는 만삭 중에도 참석했었다는 어머님의 비교섞인 말씀 때문에 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아버님은 육형제이신데 형제들을 포함해서 그 자식들도 명절에 오지 않는다. 게다가 사는 지역도 우리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가깝다.) 아무튼 내 마음 속 투쟁이 의미 없어진 것은 주말부부체제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댁 찾아뵙는 것도 어려운데 제사 참석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의지만 있으면 뭔들 못하겠냐마는, 나는 의지가 없다. 우리에게 주말부부의 장점이 하나 생겼다.  


동시에 부모님에게는 불효를 더해드렸다. 어른들끼리 모이면 으레 하게되는 자식자랑에 제사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은 둘째며느리는 흠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람을 들이지 못했다는 류의 깎아내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생각하며 살자면 삶이 너무 고단해진다. 



불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아버님과 친정아빠의 생신은 모두 음력 1월인데 그 기간은 내가 방학이라 남편과 함께 제주에 머무는 기간이다.  


제주에 머물면서 아버님 생신을 먼저 맞이했는데 생신 때문에 세식구가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며 그냥 보내자고 하셨다. 큰집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오셔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다음엔 친정아빠 생신이었는데 생신을 며칠 앞두고 제주로 간터라 더욱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미리 식사를 함께 하긴 했지만 생신 당일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죄송했다. 우리 가족 때문에 근처로 이사오신 부모님의 생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은 더욱 그랬다. 용돈케이크를 주문하는 것도 모두 전화로 했다. 올캐의 도움으로 케이크를 찾아 영상통화를 하면서 축하를 해드렸다.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의 불을 끄시는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 받아보시는 케이크 선물에 "세상에 별난 것도 다 있다"면서 좋아하셨다고 전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축하를 하지 못하는 죄송함은 여전했다. 외국에 가족을 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가족의 모습이 되었다. 


그 다음 돌아온 아버님 생신도 열흘이나 앞당겨 축하해 드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설이 지나고 약 보름 후인데 그 전에 올라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오신김에 생신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생산주간에는 큰집도 못 찾아뵙고 우리도 제주에 있는 기간이기 때문인데 너무 이른 축하와 생신 당일 두분이서 조촐하게 보내실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생신 선물을 준비하러 백화점을 돌아다니는데, 남편이 어렸을 때 자주 사서 신기셨다는 랜드로버 신발이 보였다. 당시로서는 꽤 신경을 써서 입히고 신기신 듯 한데, 정작 지금의 당신들은 자식들에게 그만한 대접을 못 받고 계신 것 같아서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물론 물질이 아니라도 보답할 길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주말부부 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 깊이가 점점 더 얕아지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앞으로 이렇게 죄송할 일들만 켜켜이 쌓을 생각을 하니,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주말부부라면 아마 이런 고민 한번 쯤은 하게 될 듯 하다. 효도는 못하더라도 불효는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주말부부로 사는 것 자체가 불효가 된 것 같은 기분, 우리만 행복하려고 선택한 삶이 되어버린 기분에 씁쓸함이 맴돈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말씀을 전하면 '늬들만 행복하면 돼'라는 대답을 돌려주시겠지? 


주말부부에게 제주는 어느새 불효의 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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