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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Feb 11. 2019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인생은 반전의 연속, 롤러코스터 인생



이번 설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뛸 듯이 기쁜 일도 있었지만 미안함, 안타까움 같은 서글픈 감정이  많이 남은 명절이었다. 분노로만 치닫던 명절만큼이나 쓰라린 명절이었다.


# 1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기차 출발시간 30분 전. 평소라면 기차역까지 15분 정도면 충분한데 운이 좋지 않을 때는 30분 정도 걸렸던 적도 있었다. 이를테면, 초보 택시기사님과 조우했을 때. 명절이어서 그런지 기사님들도 대개는 상냥한 편이시다. 이번 기사님은 옆집 아저씨 같은 분이셨다.


"이번 명절엔 어디 안 가세요?"

"돈이 없어서 못 가지요. 오라는 데는 많은데. 허허."


잠시 동안 숙연해져서는 아저씨의 말씀에 대꾸하질 못했다. 사정이 어려운 분이실까.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을 때쯤 아저씨가 먼저 입을 여셨다.


"집을 두 채를 날렸어요. 지금 전세로 사는데 빚 같은 게 생기니까 어렵네요. 한때는 처제한테 차도 사주고 그랬는데 지금은 겨우겨우 대출원리금 갚느라... 허허."


아주 무겁지도 않게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애가 곧 제대하는데 차를 사달라네요. 근데 집을 날려버린 걸 말을 못 했어요... 못하겠더라고요..."


다행히 아저씨는 가족도 없고 형편마저 어려운 분은 아니고, 다만 실패를 경험하시고 재기 중인 분이셨다. 차마 고향 갈 돈도 없어 택시 영업 중이신 줄 알았던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추석 당일은 쉬어야 아내분께 혼나지 않는다는 농담 섞인 계획도 말씀해 주셨다.


"베풀고 사셨으니 분명 다시 돌아올 거예요. 마음으로 응원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심이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나보다는 아저씨의 소원을 더 빨리 이뤄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2

최대한 손님처럼 지내다 오려고 작정하고 시가에 들어섰다.


부모님이 제주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무실 때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도 마음이 편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베푸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시가에 가면 내가 객이 되는데, 마음만 객이 되고 몸은 그렇지 못하니 편할 리가 없다.


제주와 공간만 바뀌었을 뿐이니 마음 편히 뻔뻔해지자고 다짐을 했다. 나는 객이다, 객이다, 몸도 마음도 객이다. 남편이 모든 설거지를 도맡아 하겠다고 해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남편도 처가에선 손님이니까 나도 마찬가지인 거라고 수없이 자신을 다독이면서 말이다.


설 전날, 식사를 마치고 커피타임을 가지려는데 아버님께서 손주 녀석들 노란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히고 싶으시다며, 날더러 같이 가자 하셨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아버님, 지난번 제주에서 보니까 아버님이 카페를 제일 잘 즐기시는 거 같아요. 오늘 나가서 제가 커피 한 잔 또 사드릴게요. 이번 달 월급을 좀 많이 받았거든요. 하하"라고 말씀드렸다. 그것을 계기로 온 식구가 외출에 나서게 되었다. 어머님께선 "아이고, 내가 이렇게 한가하게 보낼 때가 아닌데..."라고 하시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채비를 하셨다.


쇼핑 후 커피 한잔은 꿀맛이었다. 게다가 구멍가게 하나 없는 시골 동네에서 갑갑하게만 지내다 시내로 나오니 해방감도 느껴졌다. 그리고 바깥 밥을 싫어하시는 아버님께서 식사를 하고 들어가는 것까지 동의하셨다. 올레!


"아버님! 이렇게 오랜만에 다 같이 나들이 나오니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어머님께서 점심 준비도 안 하셔도 되니까 더 좋고요."


아버님께선 슬쩍 미소를 보이시며,

"나오면 다 돈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표정을 보니 아버님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계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돈이 안 드는 곳으로 찾아볼게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못 당하겠단 표정으로 허허 웃으셨다.



생각보다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 '올 굳(all good)'은 불가능한가 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님께서 갑자기 아들을 동반하고 앞산에 다녀오시겠단다. 아, 이런.


일손 빼가는 건 너무 싫다. 어제 갔어도 되었고, 내일 차례 후에 가도 되는데 왜 하필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 그 시간에 꼭 가시려는지, 그리고 꼭 누구를 동반해서 가시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시 또 아버님이 미워졌다. 덩달아 간 아주버님도 싫었다. 다녀오셔서는 피곤하다시며 잠을 청하러 들어간 것도 못마땅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


그래서 나도 딱 할 일만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밥상을 치우건 뭘 하건 내다보지 않았다. 아이를 재우면서 같이 자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시위였다.



 아침.


"명절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인천 국제공항입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명절 출국객 수가 역대 최고치를..."


쳇! 누구는 명절에 해외여행도 간다는데, 나는 해외는커녕 국내여행도 제대로 못 가고 이게 뭐람, 비교를 하는 순간 인간은 불행해진다.


어제 그 일 후로 기분이 여전히 그대로다. 세배를 하고 덕담을 해주시는 가운데에도 나는 눈을 맞추지 않았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시선만 내리깔고 있었다. 화가 났을 때 자주 나오는 제스처다. 차례를 지내고 식사자리에 앉았을 때 아버님이 말씀을 꺼내셨다.


"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으니 내가 한마디 하겠다."


또 무슨 훈화를 늘어놓으시려고 저러시는 걸까, 듣기 전부터 듣기 싫었다.


"우리 둘째 며느리가 변화를 원하는 거 같다."


응? 이건 무슨 말씀이람? 왜 훈화에 갑자기 나를 들먹이시는 거지? 가족들 모아놓고 내게 면박 주시려는 건가? 아니면 혹시, 가끔 제주에서 차례 지내자는 부탁을 들어주시려 하나? (전부터 여러 번 건의를 했지만 "시끄럽다"라는 한마디로 단박에 거절하셨었다.) 말씀의 행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명절마다 여행 간다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하고, 추석이란 건 농경사회에 기초한 명절인데 지금 시대가 그런 것도 아니니, 설은 이대로 지내고 올 추석부터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걸로 하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쳐버렸다. 그러자 가족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흡사 연인에게 이별 선언을 하려 했는데 상대가 그날따라 더 로맨틱하고 제 몸처럼 찰떡같이 알아서 해줄 때의 기쁨과 민망함 같은 감정이 교차했다.


"어떠냐? 마음에 드냐?"

"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명절 시가 우선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고 슬슬 몸풀기를 하려던 때였다. 하지만, 반쪽 명절이 되면 엇비슷한 효과를 보는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근본적으로는, 시가에 우선 가는 것보단 명절에 반드시 매여있어야 하는 상황이 싫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매여야 한다면 공평하게 매이자란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뛸 듯이 기뻤지만 최대한 기쁨을 억누르고 마음속으로만 쾌재를 불렀다. 



친정에 전화를 드리려고 마당으로 나갔다. 남편과 더불어 전화를 드리고는 볕이 좋아 마당을 서성거렸다. 마침 아버님이 잡초를 고르시려고 호미를 들고 나오셨다. 친정집 이야기며 여러 다른 지인들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번 설에 며느리들의 불참으로 친정엄마가 직접 명절 음식을 준비하시게 되었단 말씀을 듣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는 주변 지인 이야기를 꺼내셨다. 말씀의 요지는 차남인데 부모님도 모시고 제사도 모신다는 이야기였다. 설마 앞으로 우리에게 제사를 모시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 "겸이가 크면 말하려고 했는데..."라는 말씀으로 운을 떼신 걸 보면 심상치가 않았다.


"하지만, 제사라는 것은 너희 세대로 가면 다 없어질 것들이니 내 대에서 정리하려고 한다."


의외의 말씀이셨다. 추석 차례 없애자는 말씀에 이어 두 번째 파격 선언이다. 물론 겸이를 임신하고 성별을 알았을 때, 남편과 '장손이란 이유로 제사라는 의무만을 지우지 말자'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부모님 입에서 그런 말씀이 먼저 나올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크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라는 말씀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 마음을 찔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된다는데 괜히 염려가 앞섰다. 지난번 제주에 오셨을 때 "80까지는 염려 없다"라고 하시면서도 "하루하루가 다르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게 떠올랐다.


자손을 대동하시고 산에 올라가신 아버님을 흉본 것이 어쩐지 옹졸했던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건가 싶기도 했다. 차례와 제사가 간소화되어 홀가분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신은 최선의 효를 다하고도 자식에게는 효의 부담을 덜어주시려는 아버님의 헤아림 때문이었다. 생각의 날실과 들실이 바쁘게 교차되었다.


시가를 나서며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이상하게 차 안에서도 아버님을 향한 시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 3

돌아오는 기차는 KTX가 아니라 그런지 입석객들이 엄청 많았다. 캐리어 두 개에 잠든 아이까지 안은 채 많은 인파 사이를 뚫고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자리에 도착했을 때 우리 자리에는 다른 손님이 앉아있었다. 정중하게 말씀을 드리고 아이를 먼저 앉혔다.


머리 위 선반에는 이미 타 있던 사람들의 짐으로 가득했다. 캐리어 하나는 아이의 좌석 앞쪽에 놓고 하나는 통로에 놓으려는데 아무래도 서있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것 같다. 기존에 있던 짐을 최대한 밀고 자리를 확보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남편이 짐 둘 자리를 물색하는데 내 옆에 서 있던 외국인이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곤 남편을 도와 짐을 올려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들도 힘들었는지 각각 내 자리 앞뒤에 쪼그려 앉았다. 그 덕에 나는 등받이에 편히 기대지도 못하고 다리를 쭉 펴지도 못했다. 하지만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동남아계 노동자로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넥워머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는데 괜히 수상한 느낌이 드는 데다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까지 있던 나는 기차에서 내릴 때까지 졸린 눈을 꼭 참고 버텼다. 고마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차에서 내려서 남편에게 다리를 펴지 못해서 불편했다는 말을 하는데 남편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 우리 도와준 사람들인데도 괜히 경계하게 되더라. 당신 바로 옆에 있으니까 걱정되더라고. 사람의 선입견이란 게 참 나쁘다. 그렇지?"

기차역엔 예의 그들을 닮은 많은 외국인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들보다 잘날 것 없는 우리는 비록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우리보다 못하다 여기며 동정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노랑 모발에 흰 피부색을 가진 서양계 외국인이었다면 '역시 매너가 좋네'라고 넘기며 일점의 의심도 안 했을 터였다. 모두가 행복한 명절이 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에 그들을 제외했었다는 미안함이 든 시간이었다.


# 4

기차에서 내리니 배가 출출했다. 시간상 밥을 먹고 들어가는 게 나을 듯해서 전에 눈여겨봤던 식당을 찾았다.


"아버님이 제사 정리하실 생각하신단 말씀 듣고 놀랐네."

"그러게. 나도 아버지가 추석에 차례 안 지내신다고 선언하셔서 깜짝 놀랐어."


어머님마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며 놀라셨으니 자식들은 그보다 더했다.


"근데 어쩐지 마음이 짠하네, 난... 차례가 없어져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이 드셔서 변하신단게 자꾸 마음에 걸려."


남편은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이, 그런 말 말아. 그냥 당신이 착해서 그래."

"아냐, 맘 속으로 막 흉보고 그랬어."



인생의 롤러코스터는 짧은 시간에도 참으로 많은 오름과 내림을 반복한다. 원망도 했다가 원망한 걸 후회하는 일도 생기고,  선입견도 가졌다가 반성도 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아팠고, 누군가는 화가 났으며, 누군가는 억울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쉬워했으리라.

 

내 감정만, 내 삶만 옳은 것이라고 자부하기에는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하고, 그래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과 헤아림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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