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풍경이 필터가 되는 날
열차에 타서 오른쪽 좌석에 타면 바다를 보며 갈 수가 있다.
지원은 하코다테 상하행 모두 좌석 쟁탈전이 있음을 며칠 간 예약 조회를 하면서 이미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리 좌석을 예약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홋카이도 짬밥'이 생긴 것이다. 취소하더라도 우선은 미리 예약해두기. 좌석이 없어서 가고자 했던 곳을 선회했던 경험이 남겨준 교훈이다. 후회할까봐 결정하지 못했던 이전의 지원이 아니다.
역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하코다테 우유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편의점 계란 샌드위치는 어딜 가나 촉촉하고 맛이 좋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촉촉한 샌드위치가 없는 걸까, 먹을 때마다 말하게 된다. 순식간에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고 바다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그러다 어느새 지원은 잠이 들고 말았다. 잠이 든 것 뿐만이 아니라 아주 신나게 졸았다. 잠깐 눈을 떴던 것도 같은데, 바다 같은 게 잠깐 보였던 것도 같은데. 바다다, 라고 생각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외로워보인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기차여행은 지루하지 않게 스쳐갔다. 한별은 자는 엄마를 보며 신나게 게임을 했을 테지.
미나미 치토세에서 내려 환승 열차를 타고 치토세에 도착했다. 치토세는 '신 치토세 공항'이라는 이름에서만 들어봤지,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그렇지만, 삿포로 대안의 숙소 위치로 훌륭하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치토세 역 앞은 한산했다. 마침 이곳에는 유명한 스프카레 집이 있다.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고 구글맵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짐을 맡긴 후 스프카레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스프카레를 떠올리면 아찔한 기억이 뒤따라온다.
작년 삿포로에서 스프카레를 처음 먹었던 날.
한별이가 핸드폰이 든 가방을 몽땅 잃어버렸었다. 비에이 투어를 다녀오는 길. 휴게소 화장실에 그만 가방을 두고 버스로 돌아왔다. 코로나 이후로 오랜만에 함께 한 가족 여행에서 아이의 지갑과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말다니.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핸드폰, 여권 사본, 지갑과 돈, 청의 호수 마그네틱까지 든 가방. 스프 카레를 포장해서 집에 오는 길에 깨달았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다면 가이드에게 말해 그 휴게소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한별은 망연자실한 표정과 함께 풀이 죽어있었다.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핸드폰인데…….”
9천5백 엔. 돈을 잃어버린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기념품과 핸드폰 속 사진은 지원 역시 너무 안타까웠다. 자책하는 아이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어른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위로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카레를 받아 집에 돌아오는 내내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우선 배가 고프니 잊고 밥을 먹자고 했지만, 이내 입맛이 없어졌다. 그 맛있는 사무라이 스프 카레가. 흑흑. 너무 놀라서 사진 찍을 정신도 없었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닭다리를 바삭하게 주문해야 더 맛나다는 것. 토핑이 어마어마하게 풍부했다는 것.
부랴부랴 여행자 보험사에 문의하니 분실은 보장이 안 된다는 답변만 들었다. 보장이 아니라 이런 경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를 물었는데 말이다.
급하게 검색 해서 영사콜 센터라는 어플을 발견하고 그곳에 전화를 했다. 잃어버린 가방 안에 여권 사본이 있으니 혹시 영사관 쪽으로 연락이 오면 우리 쪽으로 연락을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쪽에선 우선 내일 가이드를 만나는 게 좋을 것 같고, 경찰서에 분실 신고할 때 통역 서비스를 해주니 다시 연락하라고 친절하게 안내 해주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또한 주삿포로 영사관 전화번호(81-218-0288)도 알려주며 내일 아침 이곳으로 연락을 해보라고도 했다.
가이드는 이미 떠난 후였고, 여행사 역시 영업을 종료한 터라 전화도 메신저도 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가이드 연락처만 알면 되는데. 우선 여행사에 연락처를 남겨놓았다. 다국적 사람들이 이용하는 휴게소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면 오늘 밤이 아니면 안 될텐데. 최소한 휴게소 이름이라도 알아야 경찰서에도 갈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엔 여행사에 화까지 났다.
카페에도 글을 올려 삿포로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휴게소를 묻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까지 올려주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삿포로에서 가까운 상행 휴게소를 수소문하기는 했지만, 찾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밝았다.
혹시 못 일어나서 가이드를 못 만나게 될까 봐 알람까지 야무지게 맞춰놓고 부리나케 일어났다. 가이드를 만나면 휴게소 위치를 찾아서 삿포로 역 앞 파출소(交番)에 갈 계획을 남편에게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그것은 자기가 하기 어렵겠다’며 다정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본어를 안 한 지 십 수 년. 어차피 타지에서 외국인인 건 남편이나 지원이나 피장파장이다. 그럼에도 곤니찌와, 라도 할 줄 아는 자신이 가기로 했다. 남편에게는 자신이 휴게소 이름을 알게 되면 메시지를 줄 테니 호텔 리셉션에 가서 휴게소에 전화 요청을 해달라고 부탁하라는 미션을 던지고.
그런데 남편은 갑자기 복잡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니, 이 냥반이. 난 지금 삿포로역 가서 가이드 만나고 그걸 가지고 경찰서에 가서 하소연해야 하는 사람이라구! 내 앞에서 뭘 망설이는거냐고! 남편은 미간을 좁혀가며 한참 핸드폰을 뒤적이더니 지원더러 봐달라고 했다.
실례합니다. 어제 저녁 7시 즈음 후라노에서 삿포로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휴게소 여자 화장실에 빨간 크로스백을 두고 왔습니다. 가방 안에는 아이폰과 약간의 돈 그리고 여권 사본이 들어있습니다. 혹시 제가 추정하는 휴게소에 전화해서 분실물이 접수된 것이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푸하하. 한국어 문장이 더욱 더 번역기 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괜찮다고 했더니 남편은 파파고를 돌려서 일본어 문장을 만들고는 그걸 캡처했다. 혹시라도 직원에게 말을 걸어놓고 파파고가 안 될까 봐 당황하지 않도록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남편도 불안하구나. 대체로 느긋한 성격의 남편이지만, 외국만 나오면 이토록 조급해하고 불안해한다. 신혼여행 때 괜찮은 영어 실력으로 하와이를 편히 다닐 수 있게 해주던 남편이었는데, 내 일본어의 후진(後進) 만큼이나 남편도 그랬으리라 짐작해보았다.
드디어 지원은 역으로 출발했다. 걸어가면서 역에서 가까운 숙소에 묵기를 여러모로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본래 스스키노 쪽을 고민했지만, 역을 이용할 일이 많은 일정이라 아이를 데리고 짐까지 끌고 15분 걸을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역 앞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15분을 씩씩거리며 걸어서 역까지 갔다면, 그럼에도 결과물마저 없다면, 더 허무하고 화가 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가이드를 기다리는 모든 눈길들이 지원을 향했다. 그래서 지원은 나도 기다리는 중인 사람이다, 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가이드를 찾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가이드의 출근이 늦었다. 그 사이 고객센터에서 메시지가 왔다. 가이드에게 전달할 것이고, 아마 놋포로 PA 상행(野幌PA[上り])일거다, 라고. 그래서 지원은 일정에 없던 휴게소라 거기가 아닐 수도 있으니 가이드에게 연락해서 내 쪽으로 연락바란다고 전해달라 요청했다.
그 순간. 구세주가 등장했다. 바로 달려 나가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그녀도 평소보다 늦은 출근 때문인지 출석 체크를 하느라 바쁜 듯 보였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기회가 오기까지 눈치를 살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가이드는 지원을 바로 알아봤다. 상황을 설명하자, 엄청 놀라면서 오늘 투어 마치는 길에 들를 수 있으면 물어보겠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봐야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알아볼 테니 휴게소 이름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놋포로 PA 상행(野幌PA[上り]). 여행사 안내가 맞았다. 부리나케 남편에게 휴게소 이름을 알리고 파출소로 향했다. 도착하면 영사콜센터에 전화해서 통역을 부탁해서 경찰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겠다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파출소 문 앞에 섰는데 눈 앞에서 경찰차가 출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휑-. 책상과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휑댕그렁한 사무실. 책상 위에도 벽면 그 어디에도 경찰서라고 추측할 만한 물건들이나 표시가 없었다.
“스미마센-(실례합니다).”
용기 내서 한마디 외쳤으나 아무 응답이 없다. 파출소를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역시 아무도 없다. 다시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대충 보니 수화기를 들면 바로 연결된다고 써 있는 것 같다. 아- 손짓 발짓이라도 해야 그나마 의사소통이 될 텐데, 온전히 언어로만 응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렇다고 전화기에 대고 영사콜 통역을 부탁할 수도 없는 지경. 수화기에 손을 올렸다 놨다 반복하기를 몇 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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