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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함께 홋카이도 갈래요?

14화. 그곳은 언제나 그 자리에

by teaterrace

삿포로는 어딘가 북적이고 바쁜 도시였다. 한국에서도 회색빛 도시보다는 초록의 풍경에서 위로받던 지원에게, 삿포로는 그다지 정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우선 숙소 근처 스테이크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전날 산책하면서 미리 봐둔 곳이다. 스테이크 정식이 무려 만 원 남짓밖에 하지 않는. 엔화가 떨어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일본은 음식값이 정말 저렴하다는 생각이 줄곧 들곤 했다. 저렴하고 신선하고 맛까지 좋으니 지원은 이 매력적인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반짝 들었다.


두대불(頭大仏). 오늘은 이를 보러간다. 우선 삿포로로 이동 후 호텔에 들러 짐을 맡기고 다시 전철을 탔다. 가고 싶은 장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치토세를 거점 삼겠다는 계획도 이렇듯 자연스럽게 바뀐다. 어떻게든 되겠지 여행처럼. 걱정이 많은 지원답지 않게.


두대불전은 마코마나이 역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버스가 자주 없다는 것. 매시간 45분 출발인데, 두 사람이 도착한 시간은 1시 50분이었다. 그 말의 의미는 앞으로 55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 조금 더 큰 문제는 두대불전의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그들은 숙소까지 옮겼지 않았나.

지원은 주변을 두리번렸다.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서있기에 그녀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들은 두대불의 사진을 확인하고는 지원이 타려는 버스 말고도 노선이 있다고 하며, 자신들이 타는 버스를 타도 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횡재구나. 구글맵보다 현지인들이 역시 더 잘 아는 듯 하다. 그리고 그녀들이 알려주는 정류장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내린 곳은 주택가로 보이는 마을이었다. 사진에서 본 두대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건너편에 커다란 불상이 있는 절이 있어 두대불로 향하는 다른 문인가 싶어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불원사(佛願寺). 이 절의 이름이다. 이곳 어딘가에 두대불이 보존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실례합니다-”


지원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자, 안에서 관계자로 보이는 여성이 나왔다. “우선 실내화로 갈아신으시겠어요?”라는 안내에 지원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두대불이 이렇게 실내를 거쳐 보러 갈 리 만무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곳이 두대불전이 맞나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여성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몇 정거장 더 가야 하는데 아직 버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이왕 온 김에 내부를 보고 가라고 덧붙여 말했다.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잡혀가는 건 아닐까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의 친절함을 믿어보기로 했다.


곳곳에 있는 불교 관련 그림과 작품들. 그리고 유리문 건너에 있는 거대한 와불. 황금빛의 부처님이 모로 누워 있는 커다란 불상이 보였다. 불상의 뒤로 병풍처럼 두른 빼곡한 나무, 그 뒤로 파란 하늘이 정말 근사했다.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 예의 여성이 지원에게 다가와 물었다.

“불공을 드리고 싶으신가요?”

한별을 바라보고 지원이 눈짓으로 묻자,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동전 몇 개를 꺼내 향을 사서 불을 붙인 후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건강하게 이 여행을 잘 마치게 해달라고.


그 기도 속에는 이곳에서 자신들이 납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숨어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여성은 두 사람에게 친절했다. 와불을 배경으로 근사한 커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그곳을 떠나는 한별에게 디저트 한 웅큼이 든 작은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실수로 들른 곳에서의 색다른 경험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엄마, 여기 오기 잘한 것 같지 않아? 누워있는 불상도 멋졌지만, 저분들 되게 좋은 분들 같아.”


한별도 지원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이렇게 재잘거렸다. 결국 그들이 탄 버스는 본래 마코마나이역에서 시간 맞춰 탔을 그 편의 버스였다. 어쩌면 남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아까는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던 여대생들이 이제는 고맙게 느껴졌다. 어쩐지 좋은 경험을 선물해 준 것 같은 마음이랄까. 그러면서 동시에 여행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계획했던 길이 아닌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더 멋진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 도착한 곳 역시 산속이었다. 이곳에 버려지기라도 하면 밤에는 분명 곰이라도 나올 법한 그런 외딴곳이었다. 타키노 가든 정문에 들어서니 그와는 상반되는 분위기의 파란 하늘 아래 눈 언덕이 있었다. 그 위에 모아이 석상을 닮은 커다란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부처의 언덕(HILL OF BUDDHA)이라는 이름은 정말이지 찰떡같았다.

언덕을 오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언덕에 눈이 수북이 쌓여 앞서 지나간 발자국을 쫓아 밟지 않으면 다시 다리를 빼내기 쉽지 않은 깊이였다. 그렇게 다가간 석상은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컸다. 워낙 여러 개가 줄지어 있어 그 정도로 큰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사람 크기의 3배는 되어 보였다. 아니, 한별이 곁에 서니 5배는 되어 보였다. 이렇게 큰 석상을 이리도 많이 만들어 세우다니. 인간은 자연 앞에서만 작은 것이 아니구나. 역사 앞에서도 이렇게 작아지는구나. 선사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큰 석상을 만들었을까. 지금처럼 과학도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을 텐데. 그들의 지혜는 어떻게 해도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스톤헨지라 불리는 거석기념물도 곳곳에 보였다. 완전하게 같은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신비로움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내는 관람 시간이 지나 이미 폐관을 했다. 아쉽지만 동시에 아쉽지 않았다. 지원이 보고자 했던 건 어차피 두대불이었으므로. 다음에는 그저 서둘러서 오자고 다짐했다.

멀찍이 부처의 머리만 빼꼼 내보인다. 그 부처에게 닿기까지는 40m 터널을 통과하고서야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한 부처는 하늘과 닿아있었다.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자태임에 틀림이 없다.


- 안도 타타오는 ‘영원’과 ‘관광’이라는 두 기능이 융합한 이곳이 홋카이도의 대표 시설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 삿포로 시민, 홋카이도 도민에게 휴식의 장소로서 시설을 개방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경치, 영속성을 가진 심볼이 되도록 한 것이 「두대불전」이다.


과연 설명대로 공양이나 분묘를 하는 장소인 동시에 볼거리가 풍부한 곳으로 설계되었다. 안도 타다오는 정말 천재가 맞구나. 지원과 한별은 부처의 곁으로 가서 한참동안 기도했다. 아마 한별의 기도 역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아닐까 지원은 추측했다. 사진으로는 그 웅장함을 담아내기 어려워 지원과 한별은 눈으로 깊이 새기기로 했다.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이라 얼어 죽을지도 몰랐지만, 어쩐지 부처가 지쳐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 들었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구름 뒤에 숨은 해가 힘껏 마지막 빛을 내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별의 볼이 빨갛게 얼었다. 마치 볼에 홍시 한쪽을 얹은 것처럼 그렇게 새빨갛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일본은 버스 시간에 정확한 나라이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시내처럼 택시를 타기 쉬운 곳도 아닌지라, 지원은 점점 초조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약속을 믿어보기로 했다. 뒤늦게 도착한 버스는 이미 중국인들로 꽉 차 있었다. 버스의 종점 부근에 스노우랜드 같은 게 있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았다. 심지어 앉을 자리도 없어서 버스 바닥 이곳저곳에 주저앉아 있는 통에 두 사람은 발 딛고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지원은 마음 속으로 그들을 욕했지만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추위 속에 있다가 따뜻한 버스 안에 오른 것만으로 노곤해진 한별이 선 채로 졸기 시작했다. 누구 한 명 내리든지, 누구라도 자리를 양보해 주든지, 그도 아니면 제발 그 입 좀 다물든지. 그렇게 바랐지만, 역까지 그 누구도 내리지 않았다. 기차를 타자마자 한별은 기절하듯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 작은 녀석이 이 작은 발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안쓰러움이 솟구쳤다.

삿포로 역에서 딤섬과 새우볶음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그동안 밀린 속옷과 양말을 빨았다. 욕실 안에 빨래 건조용 로프가 있어 거기에 널어 말렸다. 그랬더니 제법 우리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홋카이도 대학 부근의 숙소라 역으로도 박물관으로도 이동이 편했다. 이튿날 아침 겸 점심 식사는 대학 안의 마르쉐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홋카이도 대학 농장의 우유를 사용해서 수제로 만든 치즈, 화덕에 구운 생지, 마르쉐 공방에서 제조한 홋카이도 우유 모짜렐라 치즈, 토마토 소스, 데미그라스 소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설명만 읽고도 지원은 군침이 돌았다. 치즈 함박 스테이크와 모짜렐라 피자를 주문했다. 먼저 서빙된 우유 병에는 우유의 가치에 대해 멋스럽게 적은 태그가 붙어 있었다.

“별아. 이 홋카이도 대학 우유는 소에게서 받은 은혜래.”

“은혜? 그건 어버이랑 스승님한테 느껴야 하는 거 아냐?”

“크크. 그러네. 근데 여기 이렇게 쓰여 있어. 흙, 풀, 소의 순환에서 나오는 우유야말로 가치가 있다고. 소는 풀을 뜯고, 풀은 흙으로 만들어지며, 흙은 소의 배설물을 영양분으로 삼고 자라고, 그 흙에서 자란 풀을 또다시 소가 먹는다고.”

“아, 자연의 은혜네, 그럼.”

“그렇지. 그래서 무해한 이 순환이야말로 진정한 낙농의 가치라고 말하고 있어.”

“이거 그냥 마시기 조금 미안한데?”

우유 한 잔에도 이렇듯 가치를 되새기니, 지원 역시 한 방울 한 방울이 정말 귀하게 여겨졌다. 자연의 순환에서 얻은 귀한 결과물을 영접하는 기분이랄까. 분명 한국에서도 봐왔을 문구임에도 일본어로 쓰인 문장들을 곱씹고 보니 괜히 달라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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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선 아이에게 배웁니다. 소설가로 전업을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여행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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