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여행의 지극히 개인적인 후기
꽤 긴 시간 또 글쓰기를 놓고 지냈다. 아, 지난 2년 사이 8개 정도의 소논문을 썼으니 글쓰기를 아예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비추는 글쓰기는 없었다.
바빴던 25년도를 마무리하던 11월 경, 나는 충동적으로 마드리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것도 편도로.
아는 언니가 마드리드에 자리를 잡아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핑계가 있었고, 때마침 학교에서도 한 학기가 다 가도록 나를 속시끄럽게 괴롭혔던 사건이 있어서 탈출을 합리화하기 위한 사연도 충분했다. 일단 가기로 하긴 했는데, 어디서 돌아와야 할지 이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고, 또 얼마나 오래 있어야 적당할지 그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일단 마드리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여름방학에도 9일간 유럽을 갔었지만 엄연히 출장이었고, 그러고 보니 휴가다운 휴가를 가지 못했다. 또 다른 핑계다. 겨울방학에는 꼭 나만의 시간을 즐기리라고 그때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더해, 40대 결혼 못한(?) 여교수가 누릴 수 있는 이 자유로움이라는 어드밴티지(advantage)를 누려야 하지 않을까? 라는 내 친구들의 표현에 의하면 나의 '기특한' 다짐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갔다. 장장 20일간의 첫 장기 나 홀로 여행을. 해외학회 가는 김에 혼자 2박 3일 짧은 여행을 했던 몇 번과, 필리핀 외딴섬에 요가 리트릿(Yoga Retreat)을 갔던 것 외에 (그때는 외국 친구들이 다른 나라에서 조인했었다) 이런 장기 홀로 여행은 나이 40에 처음이다.
그래서 어땠냐고?
스페인은 1, 2월 우기라서 때때로 비가 오고 날도 추웠지만, 내 기억 속의 20일 동안의 스페인에서는 오렌지 향기가 나고 있다. 내 친구들이 그토록 바랐던 스페니쉬 연하남과의 설레는 플링(fling) 따위는 없었지만, 매일 호텔 방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OOTD를 살피던 그 순간 항상 어김없이 두근거렸다. 가우디의 스승이 강조했던 아름다움이 치유를 선사한다는 그 믿음을 나도 갖게 되었고, 나름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화이트 와인의 취향을 이 여행은 바꿔놓았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속속들이 들여다봐도 대문자 I인 나라는 사람이 낯선 동행을 만나 먼저 말을 걸고, 같이 식사를 하고, 그리고 이런 것도 참 좋구나- 어찌 보면 사람에 질려서 훌쩍 떠나왔는데, 결국 나도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라고 느끼게 해준 여행.
검색창에 스페인의 각기 다른 도시 이름을 치면 넘쳐나는 형형색색의 브이로그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스페인 여행의 정보를 이 글에 담고 싶지는 않다. 어디 도시는 어땠고, 뭐가 맛있었고, 뭐를 사야 하고- 이런 이야기로는 이번 여행이 내게 준 의미를 담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매일이 참 충만했고, 감사했고, 눈으로 코로 소리로 그리고 맛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아름다움에 많이 치유받았다. 내가 이런 시간이 필요했구나- 나 스스로에게 미리 알아채지 못해 미안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알아채고 이런 시간을 망설임 없이 스스로에게 선물했음에 뿌듯했다.
트렁크 하나 달랑 가지고 갔던 여행에서 올리브오일 몇 병과 화이트 와인 몇 병을 이고 지고 돌아온 나는, 산파우 병원 로비의 핑크색 천장 색으로 매니큐어를 하고, 매일 아침 토마토를 얹은 토스트에 올리브오일을 범벅으로 뿌려 먹으면서, 이제 달랑 한 병 남은 스페인산 화이트 와인에 아쉬워하고 있는 중이다.
돌아와 시차 맞추는데 여행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럴 때 새삼 나이를 느낀다. 생각해보니 스페인에 가서는 시차를 맞출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현실 도피와 현실 복귀의 차이인가.
그러는 와중에 어김없이 개학날이 돌아왔다.
나는 또 현실에 허덕이면서 시간을 레고 쌓듯이 조립해 놓은 구글 캘린더의 노예가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내가 오렌지 향기의 추억이 없던 나와는 다르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