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47개 도도부현 중 45곳. 수없이 현해탄을 건너며 일본의 구석구석을 밟았지만, 결국 모든 여정의 시작과 끝에는 늘 후지산이 버티고 있었다.
신칸센 창밖으로 거대한 산의 실루엣이 나타날 때면, 묘한 안도감과 함께 시즈오카(静岡)라는 땅이 주는 무게감이 밀려온다. 시즈오카는 단순히 후지산을 품은 짙은 녹차의 고장이 아니다. 100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최후의 승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말년을 보낸 평화의 땅이다.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
이에야스의 이 유명한 인내의 철학은, 내 지난 삶의 궤적과 묘하게 겹쳐진다. 대기업 동경 주재원이라는 안정된 울타리를 벗어나 30대 초반 홀로 야인으로 나섰다. 무역과 유통이라는 험난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30년. 트렌드가 명멸하는 치열한 시장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하이엔드 일본 식자재를 발굴해 내기까지, 비즈니스 역시 기다림과 타이밍의 연속이었다. 좋은 간장 한 병, 깊은 맛의 식초와 네콘부 다시가 탄생하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는 일본 소도시 장인들의 모습은 이에야스의 우직함과도 꼭 닮아 있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다시 대학원 책상에 앉아 일본의 고전문학과 언어를 파고드는 지금, 시즈오카의 풍경 속에서 지난 여정을 되돌아본다. 주말이면 교회에서 주차 안내 봉사를 하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배우는 요즈음, 화려한 대도시의 네온사인을 뒤로하고 내가 굳이 이름 모를 소도시의 낡은 역에 내리기를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에야스의 발자취가 서린 시즈오카의 굽이진 길 위에서 첫걸음을 떼어본다. 이것은 치열했던 비즈니스맨이자 늦깎이 만학도가 45개의 소도시에서 발견한 진짜 일본의 맛과 멋, 그리고 삶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