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4박 5일
인천에서 아침 비행기에 몸을 싣고 도착한 다카마쓰(高松) 공항. 지방 소도시답게 입국 수속은 지문을 찍는 시간 외에는 지체될 것이 없었다.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편의점으로 향했다. 원래는 지역 명물인 우동마끼 도시락을 사려 했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아쉬운 대로 소박한 삼각김밥과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시내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다카마쓰 항구에서 나오시마(直島)로 향하는 거대한 페리에 올랐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갑판 위에서 차가운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50대의 나. 대기업 그룹기획실과 IT 기업 대표를 거치며 숨 가쁘게 달려온 비즈니스맨에게, 식사란 때로 목적지 도달을 위해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임무와도 같았다.
50분을 달려 섬에 닿자마자 강렬한 붉은 호박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겼다. 가볍게 호박 안을 구경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는 찰나의 순간, 눈앞에서 마을버스가 야속하게 문을 닫고 출발해 버렸다. 단 1분의 차이. 다음 버스는 무려 1시간 뒤에나 온다고 했다. 섬 전체에 택시라곤 단 한 대뿐, 그마저도 2시간을 대기해야 한단다.
분초를 다투며 효율을 쫓던 상인(商人)에게 일정표가 어그러지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하지만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이 작은 섬에서는 그 알량한 조바심도 무용지물이었다. 체념하고 항구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특이한 이름의 대중목욕탕 '아이러브유(I Love 湯)' 앞을 서성이고, 낡은 신사를 둘러보았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자, 아이러브유라는 재치 있는 언어유희와 낡은 항구 마을의 고즈넉한 디테일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유여행의 진짜 묘미는 이처럼 철저한 계획이 무너진 틈새에서 피어나는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지중미술관(地中美術館). 안도 타다오의 서늘한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 안에는 클로드 모네와 제임스 터렐, 그리고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이 빛과 그림자 속에 경이롭게 숨 쉬고 있었다. 극도로 제한된 공간에서 작품과 온전히 독대하는 시간, 특히 월터 드 마리아의 압도적인 스케일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한 환상마저 느꼈다.
섬의 끝자락, 바다를 향해 선 도리이(鳥居)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바닷가 근처의 작은 카페에 앉아 나오시마 카레와 세 가지 맛의 지역 수제 맥주로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밤바람을 가르며 다카마쓰로 돌아오는 쾌속선 안, 낮에 버스를 놓쳐 동동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호텔에 짐을 풀고 다카마쓰의 밤거리로 나섰다. 목적지는 지역 명물인 호네쯔키도리(뼈 달린 닭고기)를 파는 유명한 식당. 질기고 씹는 맛이 강한 노계(老鷄)와 부드러운 영계(軟鷄) 중 선택할 수 있는 투박한 닭구이 요리다. 고급스러운 미식은 아니었지만, 이 단순한 닭구이 하나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며 지역 콘텐츠가 가진 무서운 상업적 잠재력을 실감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야식으로 무료 라멘을 제공하고 있었다. 늦은 밤, 후루룩 라멘 한 그릇을 비워내며 길었던 시코쿠의 첫날밤을 넘긴다. 효율과 속도만이 전부라 믿었던 내게, 1분 차이로 떠나버린 나오시마의 버스는 '기다림'이라는 아주 낯설고도 우아한 여행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턱시도의 여행수첩 : 예술의 섬, 나오시마(直島)]
카가와현에 속한 나오시마는 원래 구리 제련소가 있던 평범한 산업 섬이었습니다. 산업의 쇠퇴와 함께 버려지다시피 했던 이 섬은, 베네세 그룹과 안도 타다오 등 수많은 예술가의 협업을 통해 '자연과 인간, 예술의 공존'을 내세운 세계적인 현대미술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특히 구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과 '노란 호박'은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쇠락해가던 작은 섬이 어떻게 세계적인 문화 브랜딩의 성공 사례가 되었는지,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감을 주는 공간입니다.